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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고전 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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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고전 10:1~13)

  
유명한 명작 동화 '백설공주'에 보면, 백설공주의 계모인 마녀가 매일 거울 앞에 자기를 비춰 보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는 질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 마법 거울은 "그야 당신이 세상에서 최고로 예쁘시지요."라고 대답해 주었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여자가 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백설공주가 자라서 성년이 되었을 즈음 어느 날 그 마녀가 똑같은 질문을 하자, 그 거울은 말을 바꾸어 "백설공주님이 가장 예쁘십니다."라고 말하는 바람에, 그 마녀는 그 미녀 랭킹 1위 자리를 재탈환하기 위하여 백설공주를 죽이려고 꾀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가 거울이란 자기 얼굴이 깨끗한지, 화장이 잘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 즉 자신의 흠을 발견해서 그것을 고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이지만, 실제로는 그 마녀의 경우처럼 많은 사람들을 '자기도취증'에 빠지게 만들기도 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6상반절)라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여기서의 '거울'이란 그 원래의 용도 즉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여 고치기 위한' 용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11절에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실패했던 사건들을 오늘날의 신약 시대 성도들이 '자신을 스스로 살펴보고 조심하는 경계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통하여 우리가 똑똑히 보고 깨닫고 경계해야 할 두 가지 교훈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지상교회의 일원은 되어도 개인구원은 받지 못할 사람들이 분명히 있음을 경고해 주는 거울입니다.

본문 1절부터 5절에 "1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라는 말은 '너희들이 옛날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당했던 일을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즉 과거의 실패한 역사를 오늘의 경종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표현만 바꾼 것입니다.
이하의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하면서 모두 다 같이 누렸던 아주 특별한 공적 은혜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면서 홍해를 앞에 두고 애굽 군대에게 쫓기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여 구원하셨던 사실을 가리킵니다.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란 물론 바로 그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 한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셨던 사실을 말합니다.
  
그처럼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란 말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교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이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과 똑같은 은혜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은 이 점을 더욱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마셨던 반석의 물을 가리켜 "신령한 식물"과 "신령한 음료"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들이 단순한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신령한 음식물'이 된 이유는 바로 그 제공자가 "곧 그리스도"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교회나 공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속하였던" 이스라엘이란 표현도, 궁극적으로는 그 모세가 예표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교회임을 상징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 표현이 "다" 혹은 "다 같은"이라는 말입니다.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홍해 통과'를 위시해서 '만나'와 '반석에서 솟아난 물' 등 최고의 기적적인 은혜와 축복을 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광야교회의 일원으로서 공적인 은혜생활을 충만히 누리는 데에 있어서는 그 '60만 명'의 사람들 중에 단 한 명도 예외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매우 극단적인 전환을 5절에 기록했습니다.
바로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라는 충격적인 사실이었습니다. 
  
그처럼 '다' 출애굽하고 '다' 광야생활 통하여 온갖 은총을 누렸던 이스라엘이 '다' 구원받지는 못하는 비극의 결말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니 대다수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 "저희의 다수"란 출애굽 세대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만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출애굽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 절대다수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고 광야에서 "멸망", 문자 그대로 다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광야교회에 속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같이' 그처럼 큰 은혜를 받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다수'는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는 이 실로 충격적인 사실은 적어도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볼 수 있는 준엄한 '경계의 거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 역시 지상교회를 통하여 함께 누리고 있는 공적 은혜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의 지체가 되는 이 놀라운 특권을 다 같이 향유하고 있습니다.
  
대학교 학생이 되는 것이 이렇게도 어렵고 웬만한 회사에 사원으로 들어가기도 바늘구멍 같은데, 이 지상 최고의 거룩한 공동체인 이 교회의 한 일원이 되는 것은 이토록 간단하고도 쉬운 일이니 이것이 보통 은혜이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다 같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과 바다 가운데서' 세례를 받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다 같이 이 완성된 신구약 성경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양식을 먹고 생명의 음료수를 마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강조하신 대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었던 '신령한 식물'인 만나 정도로는 상대도 될 수 없는 '생명의 떡'이며, '반석에서 나온 물' 정도 가지고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할 영생수'인 것입니다.
실로 저와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통해서 받았던 은혜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큰 기적의 축복들을 누리면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바로 여기서 우리는 '경계의 거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를 통한 공적 은혜들을 함께 나누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리 각자의 개인의 구원과 자동적으로 직결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학군으로 이사를 간다고 해서, 유명한 학원에 등록한다고 해서 절로 다 대학교에 합격하게 됩니까?
결국은 그런 좋은 학교나 학원에서 우수한 교사나 강사로부터 배우게 되는 것을 자기 본인이 열심히 공부를 해야 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름이 '다 같이' 이 교회의 등록교인 명부에 가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곧 '보좌 우편의 생명책'에도 올려 있다는 보장은 결코 아닙니다. 
그저 매주일 한 번씩 '다 같이' 교회의 공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나중에 천국 문에도 들어갈 수 있도록 자동적으로 인도해 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아무리 '다 같이' 전도회에 들어가서 '다 같이' 공적 행사와 봉사에 참여하더라도 그것이 나중에 영생 구원 받게 될 공로는 조금도 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교회생활을 중심으로 결국은 각자가 예수 십자가의 대속을 자기 개인의 신앙양심으로 분명히 믿고 고백해야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곧 '구원 확정'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그렇게 되려니'하고 방심하고 있는 교인들이 이 지상교회에는 참 많이 있습니다.
물론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거에 '60만 명' 중에서 '59만 9천 9백 9십 8명'이 그렇게 착각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오늘날에도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닐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출애굽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의 절대다수가 저질렀던 실패를 자신의 거울로 삼고서, 지상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곧 개인구원의 보장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이 엄중한 경계를 꼭 심령에 새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신앙의 연단을 쌓지 않으면 결국 시험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음을 명백히 보여 주는 거울입니다.

6절부터 10절에 기록하기를 "6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 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9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라고 말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중에 그들의 악한 행위에 대한 버릇을 좀처럼 고치지 못했습니다.
아니 아예 습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툭하면 악행을 저질렀는데, 본문에서는 그들이 여러 차례 반복했던 악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 네 가지를 '거울'에 비춰 주고 있습니다. 

우선 7절에 기록된 "우상 숭배"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있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의 금송아지 숭배는 과거에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에 애굽 사람들이 하던 것을 보고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과거 이 나라의 조상들이 가졌던 우상숭배의 습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럴듯한 신자처럼 보이던 교인이 부모상을 당한다든지 하면 갑자기 자식의 도리니 예의니 뭐니 하면서 유교적 불신행위를 꼭 차리려고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 8절에 기록된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라는 말은 민수기 25장 1절 이하 9절에 기록된 사건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서 모압 땅 바알브올이란 곳에 머물고 있던 중 모압 사람들의 잔치에 초대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잔치란 것이 바로 우상에게 제사하는 자리였고 당시의 우상숭배는 흔히 혼음 등의 '간음' 행위들이 동반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미혹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라는 표현도 바로 그런 난잡한 성행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신자라 하면서도 성도덕의 문제에 가서는 동시대의 불신자들과 꼭 마찬가지로 태연히 혼전관계를 가지거나 혹은 혼외관계의 간음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특히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이 문란하기 짝이 없는 성인문화에 자기 자녀들을 무방비로 방치함으로써 '이스라엘 중에서 어떤 이들이 간음하는 것'을 그대로 재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9절의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행군을 막 시작했을 무렵 음식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했던 일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대표적으로 맛사에서 있었던 일이 출애굽기 17장 7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결론에 보면 "그곳 이름을 맛사라 불렀으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즉 단순한 불평불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하여 의심하면서 '하나님 존재 여부'까지 '시험'하려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 교만해질 수 있는고 하면, 감히 '하나님을 테스트해 볼 정도까지' 교만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정말 얼마나 두려운 경계의 거울입니까?
'교회에 좀 다녀보고 기도도 좀 해 보고 뭔가 좀 내 소원대로 잘 풀려 나가면 신앙생활이란 것도 할 만하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아주 당연히 여기는 교인들이 바로 감히 하나님을 테스트해 보려 하는 정말 '간 큰 인간'들인 것입니다.

10절에 기록된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란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원망했던 것을 가리킵니다.
  
민수기 14장 2절과 36절, 16장 41-50절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모세나 아론이 아니라) 멸시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 단순히 자기네들의 지도자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도전이었음을 정확하게 진단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교회의 제도와 직분에 따라 이루어지는 리더십에 대하여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목사가 교회생활에 대하여 지도하는 일들이 그렇게도 못마땅하게만 보이고 당회에서 결정하고 해 나가는 일들을 두고 항상 비판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그런 악습에 아예 완전히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특별히 그 목사나 그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십중팔구 그 본인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경외,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절대 순종, 교회의 권위와 치리에 대한 존중심 그 자체가 애당초 전혀 없기 때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자들이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다"라는 말씀은 출애굽기 12장 23절에 애굽의 장자를 죽인 천사를 "멸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천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출애굽의 은혜를 체험하고 아무리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한 공동체에 등록되어 있어도 전혀 상관없었습니다.
그 각 개인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악한 행위를 탈피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존재와 권위 그 자체에 정면 도전하는 불신을 드러내었을 때에는, 여지없는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었습니다.
  
불뱀에게 물려 죽고, 갈라진 땅에 빠져서 죽고, 옛날 애굽 사람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바로 그 '멸망의 천사'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좀 다녔다 하더라도 도중에 신앙을 잃고 배교하게 되면 그 받는 징벌은 평생 예수 안 믿던 사람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평생 불신으로 살던 사람이라면 그렇다손 치더라도, 교회생활을 어느 정도 했고 교인 노릇도 좀 해 보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왜 이런 비극적인 결말이 일어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평소에 신앙생활의 자기 단련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맷집이 튼튼하게 잡혀 있지 않는 까닭에 약간의 시험 앞에서도 그 신앙이라는 것이 그냥 뿌리째 흔들리고 뽑히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1절 이하 13절의 말씀에 "11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은 곧 신앙생활의 방심과 자만심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외면적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서 결코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방심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시험"이라는 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현실이 주는 압박감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가 보여 주는 이 명백한 교훈을 아주 간단하게 망각하고 똑같은 시행착오를 아주 쉽게 저지르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시험당한 그 자체를 가지고 자기의 죄짓는 행위에 대한 변명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게 주어지는 시험이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즉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신자의 믿음을 테스트하시고 더 강하게 연단시키기 위하여 시험이라는 일종의 극약 처방을 사용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왜 많은 교인들이 신앙생활 도중에 탈선합니까?
왜 오랫동안 교회생활하다가도 어처구니없게 한 순간에 파선하고 맙니까?
그 교인에게만 특별히 큰 시험이 생겨서가 결코 아닙니다. 
크고 작은 시험들은 예수 믿는 신자라면 그 어느 누구나 다 똑같이 겪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지 오기만 오면 여지없이 당하는 교인들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독감에 걸리는 것이 어디 감기 바이러스가 그 한 사람만 골라서 침입하기 때문이겠습니까?
호흡을 통하여 똑같이 감기 균을 들이마셔도 건강한 사람은 가볍게 치르고 끝내든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래가 체질적으로 감기에 아주 약한 사람, 조금도 면역성이 없는 사람들은 환절기만 되면 홍역을 치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시험은 신자가 되고나서도 누구에게나 오는 것입니다.
자기만 특별히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에게만 특별히 주일성수할 수 없는 곤란한 일이 생기고, 자기에게만 특별히 십일조생활하기 힘든 난관이 생긴다고 절대로 오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험은 이기려고만 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이란 것을 참된 신자에게 치명상이 되도록 절대로 만들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애당초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시고, 일단 그 시험이 닥치면 반드시 "피할 길을 내어 주심"으로써 감당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평생 교역자의 말만 듣고 간신히 신앙생활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사사건건 전도사가 잔소리를 해 주어야만 겨우 유지되는 그런 영력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려고 하니 거기에 무슨 맷집이 있겠습니까? 
  
항상 다른 교인들이 달래고 신경을 써 주어야 겨우 주일오전예배에만 출석하는 그런 나약한 체질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시험이라는 바이러스가 살짝만 지나가도 유독 남달리 온갖 심각한 증세들을 다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직 평소부터 꾸준하게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탄탄히 연단해 나가는 성도만이 웬만한 미혹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영적 면역력'과 그 어떤 환난을 당해도 간단히 물리치는 '영적 저항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아무 연단이 없는 그런 허약한 신앙생활은 언젠가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자리에 완전히 드러눕게 만들 위험이 남들보다 몇 배, 몇 십 배나 더 높은 줄을 깨닫고, 평상시에 외면적인 교회생활하는 것만 가지고서 방심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경건생활의 훈련을 통하여 더욱 강인한 영력을 키워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광야교회에 속했던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말세를 만난" 오늘날 우리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거울이 되게" 하기 위하여 "경고"로 기록되었습니다.
거울은 남의 얼굴을 두고 잘 생겼니 못 생겼니 하고 비판하기 위하여 보는 도구가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더 잘 보려고 쓰는 도구입니다.
  
광야교회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실패는 바로 오늘의 우리 자신의 속에 있는 약한 모습과 악한 본성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극히 선명한 거울, 그야말로 반사율 100%의 거울입니다.
즉 이 구약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바보짓을 했구나.'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나는 그보다는 훨씬 더 낫지.'라고 방심하고 자만하는 '자기도취증'에 빠지라고 보여 주는 거울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우리 자신을 똑똑히, 자세히, 작은 점 하나까지도 놓치지 말고 스스로 살펴보라고 비춰주는 거울인 것입니다.

일단 '성경의 거울'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판단, 정확한 진단을 내렸으면 이제는 그것을 고칠 줄 알아야 합니다.
거울을 통해서 자기 얼굴에 때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고도 씻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울을 보고서 자기 얼굴의 화장이 잘못된 것을 발견했는데도 그것을 고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의 거울을 그렇게 오용하는 바보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거울을 자기 경계에 사용할 줄 아는 사람, 과거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죄를 이렇게 심판하고야 마시는 분이시구나'라는 사실에 대하여 벌벌 떨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절로 다 구원받는 것은 결코 아니구나.'라고 깨닫고 '시험에 걸려서 신앙생활의 도중에서 탈선하고 파선하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계속 구원의 확신에 거하고 경건의 훈련을 쌓아야지.'라고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고사에 '전차복철(前車覆轍)은 후차지계(後車之戒)'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 수례의 엎어진 바퀴 자국은 뒷 수례를 위한 교훈이 된다.'는 뜻으로서, '앞 사람이 실패한 전철(前轍)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엎어진 바퀴 자국'을 통해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정신이 번쩍 들도록 '충격 요법'을 실시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질렀던 실패의 전철을 바로 오늘 신약교회의 신자된 우리의 교훈으로 삼고서, 교회의 등록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에만 안주하지 말고 더욱 각자의 경건생활을 통하여 신앙 연단을 쌓아감으로써 예수 십자가만을 믿고 의지하는 구원의 길, 평생토록 매사에 오직 교회중심으로 사는 축복의 길에 끝까지 든든히 서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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