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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과 부활 (막 9: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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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부활 (막 9:30~32)


한 배를 탔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온전한 하나는 아닙니다. 어쩌면 인생은 온전한 하나이기보다는 같은 방향을 향해 나란히 뻗어나간 철도의 두 레일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특히 부부란 삶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누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각하는 것까지도 똑같은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바라보고 함께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의 두 바퀴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이 다 같아야 한다고 하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동상이몽이라고 해서 한 침대에서 잠을 자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고 하는 이것이 진리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같이 잠을 자니 꿈조차도 같이 꿔야 한다고 하는 미련 속에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3년 동안이나 함께 먹고 자고 가르치고 배우며 살아온 스승과 제자라면 아마 그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 수 있는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실제로도 그러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제자 훈련의 중요성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수도원에 있을 때 제자가 되겠다고 두 사람의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프랜시스는 두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서 배추를 두 포기 주면서 이것을 갖다가 땅에 심으라고, 꼭 잎이 땅으로 내려가고 뿌리가 위로 올라오도록 그렇게 심으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가서 선생님이 시킨 그대로 심었습니다. 잎이 땅에 내려가게 하고 뿌리가 위로 올라가도록 심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게 경험으로 안 맞거든요. 그래서 뿌리를 땅으로 내려가게 하고 잎이 위로 올라가도록 잘 심고 돌아왔습니다. 

한 사람은 제자가 되었어요. 순종한 사람은 제자가 되었어요. 한 사람은 이치로 보면 맞아요. 원칙으로 보면 맞아요. 상식으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그게 맞아요. 뿌리를 아래로 가게하고 잎을 위로 오게 하는 것이 맞았어요. 그러나 제자로서는 자격이 없는 거예요. 지금 스승은 제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찾는 거예요. 이치나 원칙으로 보면 그게 맞아요. 

그러나 제자가 되는 길은 수 만 가지를 새롭게 배워야 하는데 네가 가지고 있는 네 경험과 네 지식을 가질 것 같으면 제자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여기에 올 필요가 없는 겁니다. 배추 심고 그렇게 살려면 농사를 지으면 되는 것이고, 훌륭한 스승의 제자가 되려면 스승이 가르치는 대로 백 가지 천 가지 앞으로 순종하고 따라가야 하는데 항상 자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면 그 사람은 새로운 일에 성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을 불러서 가르치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으로부터 시작해서 병든 자를 고치시기도 하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며 많은 이적을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모여든 사람들에게나 아니면 직접적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도 하고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궁금한 것을 예수님께 물어 예수님이 다시 설명하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여를 지내며 직접 보고 듣고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주님을 따르는 제자된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요 주님은 모든 기회를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집중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저들을 둘씩 짝을 지워서 각 지방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도록 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 제자의 삶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지혜와 능력으로 다시 말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며 모든 사람들의 본이 되도록 살아가야 하는 것이 제자의 참 모습임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토록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이유가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 주셨던 마지막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결국 주님의 뜻은 자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다른 제자들을 훈련시켜 키워낼 선생이 되도록 하는데 제자를 키우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배워서 나 하나 살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을 키워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가르침을 되새기도록 함으로서 다른 제자들을 키워낼 제자들 역시도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맞닥트리는 모든 현장이 훈련의 장소였고 모든 가르침의 재료가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우리는 하나도 놓치지 않아야 하고 그것을 마음에 새길 때 참 제자로서 또한 다른 제자들을 키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토록 제자들을 가르치셨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고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들이 자신들만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받을 영광만 생각했지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그런 생각은 무시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놓치고 있었던 부분은 결국 주님이 받으실 영광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고 주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의 소리 역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해서 주님이 왕이시지만 동시에 섬기는 종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여전히 메시야의 영광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 그 영광이 고난과 섬김을 통해서 열매 맺는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고 믿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얼마나 엉뚱한 데로 빠져 들어갈 수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건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이 은혜 가운데 허락하시는 생각으로 내 마음을 채우지 않으면 내 딴에는 주님을 위해서 한다는 모든 생각과 그로 인한 삶의 모습들이 오히려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어쨌든 주님께서 모든 시간과 장소와 기회들을 이용해서 제자들을 훈련하시는 것은 그만큼 제자를 키워나가는 일에 있어서 훈련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모든 기회를 하나님의 제자로서 훈련받는데 사용하여야 하고 철저히 제자로서 훈련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 올 때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임박해서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보통은 나이 지긋하도록 무병장수하다가 세상을 떠나길 사람들은 소원합니다. 거기다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복을 누리다가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이처럼 복된 삶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복되게 세상을 떠나는 것일지 몰라도 성경은 그 기준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데는 성경도 동일하게 증거합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문제는 그 다음에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 두 갈래 길이라고 하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심판을 받고 불못 곧 둘째 사망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의 부활과 생명의 부활이라는 두 길이 죽은 자들 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천당 극락 하늘나라 등 이름은 달리 부를지 몰라도 한결같이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원하는 것처럼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 아픔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죄 가운데서 태어나 죄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형벌이 있는 불못 다시 말해서 지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지만 그러나 죽음 앞에는 그 누구도 장사가 없습니다. 따라서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이 말처럼 무서운 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생들에게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인생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는데 그 길은 바로 하나님 자신에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 가운데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값을 대신 치룰 누군가가 필요한데 바로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기 위해서 피 흘림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틈만 나면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이미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바이기도 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랬기에 주님은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면서 사단에게 먼저 시험을 당하셨던 것이요 오직 말씀으로만 사단을 물리치심으로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결코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권세로 사단을 물리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으로입니다. 그 주님이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없습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왔고 죽음이 시작되었듯이 한 사람 예수님이 살리는 영이 되셔서 먼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다시 살 길이 열린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우리의 생각하는 것과 계획하는 모든 것이 악할 뿐이었습니다. 그랬던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다 용서하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 죄를 다 씻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의롭다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나는 본질적으로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보혈이 나를 씻어 정하게 하심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우리는 한 번 죽은 자들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며 죽으실 때 그 때 이미 나도 주님과 함께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죄로 말미암은 심판은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다 해결이 되었기에 이제는 나를 사랑하신 주님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려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날마다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이 믿음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둘로 나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 지성소에 들어갈 때 필요한 것은 피와 믿음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지성소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임재 하시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이 내 안에 함께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모신 자로서 우리의 삶은 당연히 이 보혈을 내 마음에만 뿌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 가운데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뿌려 그들 역시 보혈의 은혜로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며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야 하는 것이요 세상 사람들처럼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모이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자의 마땅한 도리는 서로 돌아보는 것이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이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습관처럼 모이기를 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이지 않을 어떤 핑계거리도 만들지 마십시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그래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 내 핑계거리들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오직 말씀대로 하나 되기를 힘쓰고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귀한 삶을 날마다 살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를 실천했던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새 단체를 조직하기 위하여 그 간부 요원으로 열두 제자들 뽑고 경영 상담소에 그들의 자격 심사를 의뢰했다면 이런 회답을 받았을 것입니다.
"나사렛 목공소 요셉의 아들 예수 귀하

귀하가 의뢰한 열두 명의 이력서를 검토하고 심리 테스트와 직업 적성 검사를 모아 컴퓨터에 넣어 결과를 뽑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귀하가 계획하는 새 단체의 간부 사원으로 자격 부족입니다. 학력이 너무 낮고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들은 단체 관념이 없고 협조 정신이 약하여 경영 관리자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정서적으로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고 성격이 너무 과격합니다. 안드레는 한마디로 무능력자입니다. 남을 지도할 사람이 못됩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회사의 이익을 제쳐놓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사람들입니다. 도마는 매사에 부정적이고 질문뿐이요 추진력이 없습니다. 마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무슨 짓이나 할 사람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이 두 사람은 사회 혁명을 노리는 과격한 불온사상에 감염되어 있어 귀하가 생각하는 온건한 집단에는 해로울 것입니다. 귀하가 추천한 열두 명 중 긍정적인 해답을 드릴 유자격자는 한 명뿐입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고 사회 지식도 풍부하며 예민한 실업인의 감각과 판단력이 있습니다. 사교성도 있어 상류 권력층과 접촉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강한 동기와 의욕에 차 있습니다. 따라서 본 경영 상담회사는 유다 한 명만 추천하고 남은 요원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찾아보도록 권고합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 있어서 새 단체인 교회의 터를 닦고 2천년의 세계사를 주름잡은 사람들은 당연히 실격될 수밖에 없는 열한 명이었고 오히려 유능한 사람으로 평가될 가룟 유다는 거꾸로 예수님을 팔아먹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초대교회를 이끌며 복음의 선구자가 되었던 제자들은 비록 자격 부족이었으나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 하나가 그들 자신을 변화시켰고 사회와 세계를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믿음 안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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