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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공과 복의 차이 (삿 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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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복의 차이 (삿 61:16)
   

‘늑대와 어린 양’ 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목이 말랐던 어린 양 한 마리가 골짜기에서 물을 마시려는데 늑대가 나타나서 ‘내가 마실 물을 감히 더럽히는 무례한 놈’ 이라고 큰 소리로 꾸짖었습니다. 할 수 없이 어린양은 스무 발짝쯤 아래서 물을 마시겠다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늑대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한다는 소리가 ‘네 이놈, 지난해 나한테 욕을 했지!’였습니다.

어린양은 ‘지난해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는걸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네 형이나 아비, 어쨌든 네 식구가 틀림없어’ 라고 늑대는 억지를 부렸습니다. 그리고는 어린양을 숲 속으로 끌고 가 냉큼 잡아 먹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은 ‘강한 자의 주장이 언제나 정의’ 가 되고 있는 세태를 풍자한 라 퐁테의 우화입니다. 세상은 어느 시대나 강자들이 지배해 왔습니다. 힘 있는 자, 권력 있는 자, 지식 있는 자, 돈 있는 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지배해 왔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부와 여러 종류의 권력의 힘에 의해 종속되어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힘을 찾아 나섰고 힘을 길렀습니다. 

‘3일 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에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쟁에서 현격한 공을 세운 노예를 3일 동안 왕으로 삼았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3일 천하’ 그야말로 짧은 시한부 왕을 말합니다. 이 3일 동안 ‘시한부 왕’은 세상에서 좋다는 옷을 다 입어 보고, 먹고 싶은 음식을 다 먹어 보고,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해 본다고 합니다. 

3일이 지난 후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3일 천하’ 를 호령하던 노예 왕을 잔인하게 죽이면서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힘은 잠깐입니다. 더 강한 자가 나오면 언제나 패배자가 됩니다. 이것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정글법칙의 비극입니다.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동물적인 본능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힘의 논리인 정글법칙의 끝은 허무함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 가운데 힘의 원리가 아닌 다른 원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은혜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세상은 힘의 원리에 지배를 받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성경에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고 대신에 ‘복’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성공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복 받아라’ ‘복 되어라’ 고 말씀하십니다. 성공하는 것이나 복 받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 왜 성경은 ‘복’이라는 말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을까요? 

성공과 복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공했다’ 고 하는 말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표현입니다. ‘내가 주인이고, 내가 모든 것을 이루었고, 그러므로 성공의 결과는 내것이다’ 라는 자기중심의 사고에 근거를 둔 단어입니다. 성공이라는 사고방식 안에는 형식적으로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복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며, 그 분이 나에게 복을 주셨고 나를 통해 일을 이루셨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에 대한 권리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나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은혜에 삶의 기초를 둔 사람은 권리를 주장함 보다 감사를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은혜로 받은 복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며 기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은혜의 정신이 아닌 힘의 정신에 춤을 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은혜의 원리에 지배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와 교회가 세상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다를 바가 없으니 영향력을 잃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힘의 세계에서 자신의 힘의 한계를 온 몸으로 경험하며 참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기드온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기드온이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세워지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드온이 살았던 당시의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사람들에게 점령을 당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으로 도망가서 동굴 등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칠년 동안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침략을 당하며 고통스런 삶을 살았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미디안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쳐들어 와서 모든 곡식을 약탈해 갔습니다. 곡식만이 아니라 모든 가축까지도 하나도 남김없이 빼앗아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의 삶의 자리에서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미디안으로부터 자유함을 주시기 위해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시는 현장에 대한 묘사가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하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기드온이 자기 집의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 이삭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밀을 포도주 틀에 숨어서 타작하는 이유는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들키면 모든 것을 다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기드온을 부르실 때 ‘큰 용사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힘 센 자여’라는 말입니다. 기드온이 사사로 부름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따랐던 것을 보면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가 밀을 타작할 때 포도주 틀에 숨어서 타작했다는 것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의 법칙에서 패배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미디안 사람들의 힘에 눌렸고 패했습니다. 힘의 논리에서 패배자의 모습을 비참했습니다. 기드온은 살아남기 위해 포도주 틀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기드온 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힘의 세계에서 패배한 기드온을 향해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때 기드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에 품고 있던 분노를 하나님 앞에 쏟아 놓습니다. 13절에 보면 기드온의 대답이 나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데 어떻게 이방 민족에게 이렇게 수모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과거에 우리 조상들에게 놀라운 기적을 많이 행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모두 거짓말이고 사기 아닙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런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지 않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시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든지 둘 중에 하나가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입니까?’라고 항변하며 따져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거칠게 항변하는 기드온에게 ‘가서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해 항의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은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동문서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이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큰 용사야, 너는 너에게 주어진 그 힘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나는 너에게 용사가 될 만한 힘과 능력을 주었는데 너는 그 힘을 가지고 너 하나만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만 사용하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은 하면서 비겁하게 포도주 틀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이는 너의 모습은 도대체 무엇이냐? 애굽에서 해방될 때 내가 행했던 기적에 대해서 원망하며 말하는데 너희들 중에 모세처럼 내 편에서 서서 자신을 희생하며 철저하게 헌신하는 사람이 있느냐? 

너 같은 사람도 숨어서 일신상의 안일과 평안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데 내가 누구를 통해서 일하라는 말이냐? 너희 중에 어느 누구도 헌신하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누구를 통해서 구원의 사역을 펼치라는 말이냐? 네가 동족의 아픔을 그렇게 아파한다면 너는 왜 그러고 있느냐? 내가 너에게 준 힘을 가지고 너라도 먼저 일어나라. 그 힘을 가지고 숨어 불평과 원망만 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오라’ 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기드온의 하나님을 향한 항변이 왠지 우리 귀에 익숙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습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겪고 있는 질병의 고통과 경제적인 어려움과 극복하기 힘든 삶의 문제들을 가지고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에 악이 판을 치는 세상을 보면서, 자연 재해와 끝없는 전쟁과 테러로 인해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신 것입니까? 정말로 정의로우신 분이십니까?’ 하고 항변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기드온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가 비극적인 일을 앞에 두고 하늘을 향해 ‘하나님 그 위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라고 항변하며 물을 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아래를 행해서 ‘내 자녀들아 너희는 그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비극과 고통을 하나님께 탓을 돌립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을 조절하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질병의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세상의 성공에 대한 욕심으로 스트레스를 자초했고, 생활 습관을 잘못 가졌습니다. 사회의 악의 구조로 인해 사업의 문제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무절제한 낭비와 끝없는 욕심이 우리의 재정적인 아픔을 가져왔습니다. 세상 즐거움의 유혹에 빠져 가정에 혼란이 왔고, 우리가 품고 있는 미움과 분노로 인해 인간관계가 깨어져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고난을 통해 훈련시키는 일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고난의 자리로 들어가지 말 것을 경고하셨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무시하고 살다가 고난에 빠졌으면서 도리어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에게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말씀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기드온이 원망하고 불평할 때 하나님은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앞에 있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너라도 일어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드온은 눈치가 빠른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바로 깨달았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은 별 볼 일 없는 므낫세 지파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약한 가문이고 그 중에서도 막내라고 핑계를 댑니다. 누군가 나서서 일을 해야 하지만 자신은 아니라고 말하며 뒷걸음질을 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기드온을 포도주 틀에서 이끌어 내어 은혜의 세계로 중심에 서게 하셨습니다. 

집안 꼴이 이게 뭐냐? 고 짜증은 내며 불평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평하고 원망하기에 앞서서 내가 그런 집안 꼴을 바꾸기 위해서 무엇을 직접 헌신적으로 앞섰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 부족한 부분이나 못마땅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족한 부분을 비판하며 원망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채워질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의 부족한 부분만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도리어 상처가 되고 일하는 사람들을 지치게 합니다. 부족한 부분을 위해 헌신함이 없이 원망과 불평과 비판만 있는 곳은 화목할 수가 없고, 능력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눈 먼 복이 굴러 들어와 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복처럼 보이지만 복이 아니라 화입니다. 진정한 복은 자신의 포도주 틀에서 걸어 나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은사와 물질과 건강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봉사하는 가운데 주시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소금과 빛은 자신을 녹이고 자신을 태우는 희생과 헌신이 전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포도주 틀에서 자신만을 위해서 밀을 타작하는 기드온을 포도주 틀 밖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즉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향해 ‘너희 가정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기 위해, 사회와 직장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는 일꾼이 되기 위해 너 개인의 평안과 안주를 위해 들어가 있는 포도주 틀에서 걸어 나오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공의 삶이 아닌 복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복된 자리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를 포도주 틀에서부터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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