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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하는 자의 믿음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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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자의 믿음 (막 10:46~52)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사람이란 동물과 다른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는 3가지 절대 요건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의미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의미와 그 중요성,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꼭 가져야 된다고 합니다. 삶의 의미도 없이 살아가는 것은 동물과 같은 것이요, 존재의 의미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나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 있는 존재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내가 알 수 없는 나에 대한 의미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그랬습니다.“자기가 자기를 안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알려진 바에 의해서 자기를 아는 것이다.”여러분도 오늘 예배에 나올 때 한번이라도 거울을 더 보고 얼굴에 찍어 바르고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알게 모르게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서부터 좋은 인상을 받고자 하는 겁니다. 좀 더 나은 의미를 부여하고자함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생에 필요한 의미를 생각하며 사는 일들입니다. 

둘째는 안정성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1차원적인 먹고 입고 생활하는 의식주의 안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하고 정신적 차원에서의 안정이 필요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평안한 마음을 원하지 불안정한 마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은 화평에 목말라하며 살아갑니다. 깊이 생각해 보세요. 원수 맺고는 살수 없는 게 인간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건 인간다운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소속의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하자면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막연한 성공에 대한 목적보다는 가정이 뭔지를 아는 것이 더 먼저입니다.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정말 인간다운 삶이 무엇이냐를 놓고 볼 때 사실은 돈을 얼마 더 받느냐 못 받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갈 직장이 있다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닙니까? 

정말 인간다운 삶이란 끈끈한 정을 가지고 가정이라고 하는 연대 속에 살고 친구와 더불어 직장과 더불어 나라와 더불어 민족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운데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행복이 우리가 소원하는 것들이고 바라는 행복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가치는 역시 소유나 지식이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믿음과 소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내 소원이 무엇입니까? 지금 나는 무엇을 믿고 사는 겁니까? 그리고 내 간절한 내 마지막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나 자신의 모습이요, 내 앞에 있는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유명한 실화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한 살인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나라의 공훈이 있는 아주 훌륭한 정치가인 형이 있었습니다. 동생이 허무하게 생을 마치게 되는 것이 너무 마음 아파서 체면불구하고 대통령을 찾아가서 동생을 자기에게 맡겨주면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겠노라고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대통령은 그 형님의 인품과 나라를 위한 공훈을 생각하고 사면을 허락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동생의 사면장을 받아가지고 한 걸음에 동생이 갇혀 있는 곳에 찾아가서 동생에게 말했습니다.“만일에 나라가 너를 사면해준다면 너는 무엇을 하고 싶으냐?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더니 동생은 거침없이 말합니다.“나는 이 감옥을 나가는 순간 나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를 먼저 죽일 것이고 같이 결의를 한 배심원들을 차례차례 죽일 것입니다.”이렇게 말하는 동생을 보고 형은 아무 말 없이 감옥 문을 나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사면장을 찢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이 처지에 놓였어도 아직 그 소원이 잘못됐습니다. 그런고로 어쩌면 살아야할 이유가 없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각장애인이요, 거지인[바디매오]가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사람의 처지를 보면서 세상이 던지는 시쳇말은 기구한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생을 끝낼 사람인지도 모를 버려진 자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이 사람이 무얼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현실적으로 아무 소원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무엇을 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봐야 옳겠지요. 다만 한 가지 누구라도 많은 구걸거리를 주었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하루하루가 한 푼 보다는 두 푼에 기뻐하고 적은 금액보다는 많은 금액에 즐거워하는 단순히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삶이 전부일 뿐입니다.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이것이 통상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실망하며 사는 사람이나 더군다나 거지인 사람에게는 있을법한 삶의 내용 전부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이 사람에게는 원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이 말은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에게 믿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 원하는 바와 믿음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가장 나약해지기 쉬운 때는 자기가 처한 상황이 좋지 않을 때입니다. 어려운 환경은 누구에게나 한번 이상씩은 오는데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자기와의 싸움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저께 인터넷뉴스를 보니까 우리나라의[김다울]이라는 유명한 여자모델이 파리에서 자살한 것으로 추정 된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나이는 이제 20세이 선정한<주목 해야 할 모델 탑 10> 중 5위를 기록했고 세계모델 랭킹47위인 그녀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했는지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모델 생활을 하며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겪은 남모를 어려움이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조금만 희망을 가지고 살았더라면...’하는 바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누구나 힘들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가지고 현실을 이기는 사람이 있고 순간의 큰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패배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이 시대처럼“세상이 어렵다, 인생사가 고달프다.”하는 인생들에게 엄청난 해답을 주는 귀중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사람은 희망과 믿음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환경이 어렵다. 먹고 살기가 만만하지 않다.”할지라도 바른 소원이 있고 바른 믿음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기회는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바디매오]가 왜 주님께 그 믿음을 인정받고 있는지 봅니다.“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외치는 말속에 그의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한 푼 적선 하십시오.”,“그냥 지나가지 말고 얼마라도 주고가세요.”라고 하는 일반적인 소원이 아닙니다. 지금 그가 예수님께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늘 했던 것과는 다릅니다. 자, 예수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그때에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나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앞을 볼 수 없는 불안함속에 자기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겉옷, 잔뜩 웅크린 자신의 보호막이었던 이것마저도 이제는 버린다는 것입니다. 더는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맹인이요, 거지인 과거로 돌아갈 일이 없다는 판단입니다. 대단한 결단이지요. 지금 이 순간 오로지 달려 나아가 엎드릴 주님만 믿을 뿐이라는 신앙적 행동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아마도 예수님은 이 결단을[바디매오]의 믿음으로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 그리고 이제 나아온[바디매오]에게 51절에 예수님께서“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의 질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내가 너에게 얼마를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니 어쩌면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묻는 것이 더 합당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너에게 얼마의 돈이 필요하냐?”고 묻지 않으시고“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이 말은 이미 예수님께서[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입니다.‘정말 돈이 필요해서 돈에 목매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 보다 더 근원적이고 영광을 돌리는 일이 필요한 사람이다.’라고 판단하셨다고 봐야합니다. 그리고 이제[바디매오]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봅니다. 만약에 여기서“네, 돈 한 푼이요.”라고 대답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럴 마음도 없었거니와 그러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대답하며 살아왔을지 모르지만 지금 예수님 앞에서는 아닙니다. 뭐라고 합니까? 

51절에“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우리 번역이 좀 부드럽게 되어 있습니다만 영어성경을 직역하면“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강력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강력하게 원한다는 말은 그 결과를 믿는다는 것의 적극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바디매오]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한 치의 의심도 없고, 결과는 오직 예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 예수님이 더는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52절에 곧바로“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십니다. 예수님 역시도 잠시 머뭇거림도 없으십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을‘좀 더 시험해봐야겠다.’거나‘며칠만 더 두고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그의 믿음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바렌]은<자기실현의 길>이라는 책에서 자기실현을 위해서는 적어도 몇 가지가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먼저는 신축성이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무엇에든지 요지부동하는 마음으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 중이 이런 사람이 있지요.“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것만은 안 된다.”정말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면 당연히 이렇게 지켜야지요. 그런데 대부분이 자기 고집입니다. 목숨걸만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자기 자존심일 때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에 목숨을 건다는 것이 때로는 무모하기도 하고 때로는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괜한 고집만 부려서 안 될 때는 부리지 말아야합니다. 도전해오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때에 따라서 신축성 있게 대할 수 있어야 자기를 실현할 수 있고, 그 다음에는 자발성이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할 줄 아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내 인생을 남이 대신해서 살아 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에든지 자발성이 필요합니다.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에는 자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억지로 하는 일을 통해서는 자기를 실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일속에 자신이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중요한데 창조성이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창조성이란 종래의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것이 아닌 아주 특별한 소원, 특별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남과는 다른 나만의 특별한 믿음이 있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단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바디매오]처럼 결단하는 믿음,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나를 전적으로 맡기는 이런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세상이 고달프고 또 모든 것이 부조리하지만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원하는 바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셨다면 내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내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어야 한단 말입니까?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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