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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에 속한 사람 (요 18: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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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속한 사람 (요 18:33~38)


[빌라도가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불러내서 물었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하는 그 말은 당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말하여 준 것이오?” 빌라도가 말하였다. “내가 유대 사람이란 말이오? 당신의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겨주었소.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요.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빌라도가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 로마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 

아직 달력 한 장이 남아 있지만 교회력으로는 오늘이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이 됩니다. 교회력은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기를 한 해의 시작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전통은 이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축일이라 하여 경축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을 영원한 왕으로 모시고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삽니까? 아니면 다른 왕을 모시고 삽니까? 이런 질문은 늘 고통스럽습니다. 삶이 고백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감동합니다. 교우들과 더불어 찬양을 할 때도 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우리는 다른 논리와 태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른 왕을 섬기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일종의 투잡(two job)인가요? 그리스도 왕 축일에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지금 너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느냐?”, “너는 나를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남의 눈치, 세상 눈치를 보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니냐?” “너는 지금 나의 심정, 나의 생각, 나의 뜻보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뜻을 더 받들고 사는 것은 아니냐?” 

오늘 본문은 유대 총독 빌라도와 예수님의 문답을 통해 주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한결같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라는 낯선 존재 앞에서 매우 당혹스러워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살아오는 동안 그는 그런 인물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레바논의 신비주의 시인인 칼릴 지브란은 <<사람의 아들>>이란 책에서 예수님과 처음 대면했을 때 빌라도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팔을 뒷짐지워 노끈으로 꽁꽁 묶인 채 재판정으로 끌려왔었습니다. 나는 단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나를 향해 큰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왔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곧추 버티고 서서 고개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내게 무엇이 일어났던지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갑자기 나는 일어나 단에서 내려가서 그 앞에 엎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바로 가이사가, 바로 로마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 재판정 안에 들어온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심문을 했지만 그는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 속에는 불쌍히 여기는 빛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가 내 통치자요 재판장이기나 한 것처럼.” 

‘내가 지금 거룩한 분 앞에 서 있구나!’ 하는 느낌은 성서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한결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아무런 편견도 없이 사람을 대하는 사람, 세속적인 권위 앞에 주눅 들지도 않고, 오만하게 사람을 내려다보지도 않는 사람, 그저 있음 자체로 우리들 속에 있는 선한 것을 이끌어내는 사람,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권위를 상징하는 빌라도의 화려한 의복은 이 남루한 사나이 앞에서 오히려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겁니다.

• 로마의 평화 vs. 그리스도의 평화

빌라도는 자기 앞에 끌려나온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 이것은 탐문하는 질문입니다. 그는 갈릴리 출신의 이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를 고발하는 이들은 “이 사람이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님께 넘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한 ‘악한 일’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당신이 하는 그 말은 당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말하여 준 것이오?” 하고 되묻고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힘 있는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힘이 정의로 인식되는 세상입니다.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로마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렸습니까? 그것은 네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종교-전쟁-승리-평화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뿐만 아니라 황제까지도 신으로 숭상했습니다. 황제에게는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 ‘주’라는 호칭이 부여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모든 단어가 사실은 황제들에게 적용되던 단어였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했고, 로마의 힘에 압도된 다른 나라들이 반란을 꿈꿀 수조차 없게 된 상황을 가리켜 평화라 했습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소수의 특권층들만의 평화였습니다. 그들의 행복이 다른 이들에게는 고통이자 굴욕이었으니 말입니다. 

로마는 점령한 지역에 로마의 문화를 이식시켰습니다. 그 통로가 된 것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우선은 로마가 제국의 여러 도시들을 연결시키기 위해 만든 도로(via Egnatia)와 항구입니다. 로마는 그 길이 연결된 도시의 입구마다 제국의 위용과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세웠습니다. 또 로마는 제국의 신학을 전파하기 위해서 많은 신전들을 세웠고, 신들과 황제의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가장 특이한 것은 도시마다 원형극장과 크고 화려한 목욕시설을 만들었습니다. 그 시설을 이용하는 이들은 마치 자신이 로마의 일등 시민이라도 된 것 같은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런 흔적들은 지금도 지중해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습니다. 힘에 의한 로마의 지배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세상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제시하시는 진정한 평화의 세상도 몇 가지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앙-비폭력-정의-평화가 그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힘 있는 사람들의 편을 드는 하나님이 아닌, 병든 사람과 귀신 들린 사람 그리고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전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산과 들을 뛰어다니는 사랑의 목자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에게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고, 방탕한 생활 끝에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 달려 나가는 아버지 같은 분이십니다. 

주님은 철저히 비폭력적 평화주의자이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이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셨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의 힘밖에 없음을 아셨기에 원수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더불어 추구했던 세상은 모든 사람이 살 권리를 인정받고 존중받는 의와 공평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삶이 빚어내는 평화가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입니다.

• 예수, 우리 왕

주님은 이런 새로운 세상의 왕이십니다.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시고, 백성들을 희생시키는 왕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왕이십니다. 그는 스스로 연약해짐으로써 사람들을 살리는 사랑의 왕이십니다. 도덕이나 율법의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는 분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들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생의 가능성을 이끌어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왕으로 옹위하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피하여 달아나셨습니다. 

주님은 세속적인 권력이나 영향력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오직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만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셨습니다. 주님에게서 풍겨 나오는 인격의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 어디에서나 생명의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찬송가 436장은 주님을 만나 변화된 사람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여러분은 지금 이런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까? 지난 주중에 EBS에서 하는 <세계테마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은 짐바브웨를 소개했습니다. 기행자가 쇼나족 마을을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낯선 나라에서 온 이 진귀한 손님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들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시종일관 깔깔 웃으며 지냈습니다. 

그 구김살 없이 환한 웃음을 보는 순간 가슴에 막혀 있던 뭔가가 뻥 뚫려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못해도 그들은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었고,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 때문에 행복이 넘쳤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얼굴에 근심 ‘우憂’ 자를 쓰고 사는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집이라야 움막 같고, 음식이라야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빛나는 웃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고 사실 그건 불행한 삶이라고 말씀하시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진짜 행복은 나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을 느낄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사랑의 샘물이 솟구쳐 나올 때 우리는 이미 행복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은 조각난 세상을 하나로 깁는 실이고, 짓눌린 사람들을 해방하여 충만한 생을 누리도록 해주는 묘약입니다. 이런 생을 실천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 진리가 무엇이오?

주님은 빌라도에게 당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밝히십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어쩌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한 초라한 행색의 이 사나이가 평온한 표정으로 ‘진리’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 빌라도는 조금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퉁명스러운 그의 대꾸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그가 대리하는 로마 제국이야말로 세계의 과학과 지식과 기술과 권력이 집중된 나라입니다. 

힘을 숭상하는 그에게는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니 ‘진리가 무엇이냐?’는 그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비웃음입니다. 그는 더 이상 예수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정치판에서 뼈가 자란 그의 관심사는 어떻게든 자기의 커리어를 잘 관리하고, 경제적인 이득을 얻는 것에 쏠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삶의 의미를 묻고,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찾는 일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냐가 아닙니다. 그는 무엇이 제국의 이해에 부합하고, 자기의 야망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가만 생각합니다. 그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노예입니다. 야망을 위해 영혼을 팔았으니 말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과거의 인물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속에서 혹은 우리 곁에서 배회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주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상기하자, 빌라도.” 이런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 속에 있는 빌라도가, 우리 사회 시스템을 지배하는 빌라도가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뜻일 겁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는 이 질문을 하고도 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지만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진리’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주님은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요17:17)라고 아버지께 간구했습니다. 주님은 여기에 덧붙여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특별히 육신이 된 말씀, 곧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의 생을 요약하는 한 마디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일 것이고, 그 핵심은 ‘생명 살림’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그런 주님에게 세상은 십자가를 안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생명의 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게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십자가란 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내 몸도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이 쓰시도록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유한한 삶이 하나님에게 삼켜질 때 우리는 영생을 맛보게 됩니다. 나의 모든 것을 주님의 뜻을 위해 바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일이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바치고 있습니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몫으로 남겨두고, 남은 것을 주님께 드리며 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나를 바치고 산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자주 넘어집니다. 마음의 평화를 잃고 허둥거리기 일쑤이고, 악의를 가진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의 때와 위로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새 사람’이 승리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했던 거짓 왕들을 쫓아내십시오. 그들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삽니다. 말씀에 귀 기울인다는 말은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는 순간, 생명과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교회력으로 한해살이를 마감하는 오늘이 바로 우리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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