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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다운 기독교인의 삶 (막 11:25, 빌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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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기독교인의 삶 (막 11:25, 빌 4:5)


가을은 떨어지는 낙엽 때문에 쓸쓸함을 느끼게도 하지만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추수의 계절이라는 면에서 왠지 마음 가득 풍요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지난 주일 추수감사절에 강단에 올려진 여러 가지 과일을 보면서 가을의 풍요로움을 보았습니다. 
이 시대는 물질적으로는 참으로 풍요로움을 누리는 시대입니다. 어디를 가나 풍성합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도 마음과 마음이 서로 멀어져서 인생의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을에 진정한 풍요로움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고 부요하게 하는 진정한 풍요로움은 무엇일까요?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진정한 마음의 풍요로움과 영적인 풍요로움을 찾는 것이 신앙생활일것입니다. 진정한 영적 여유와 풍요로움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용서와 관용에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용서와 관용이 바로 우리를 진정으로 풍요롭게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다운 기독교인의 풍요로운 삶인 용서와 관용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용서와 관용 

각박한 우리 삶에 진정한 풍요로움은 용서와 관용에 있습니다. 
용서가 죄를 사해 주는 것이라면 관용은 받아주고 품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와 관용의 삶을 살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막 11:25절에 보면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라고 하셨고 빌 4:5절에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단지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죄를 용서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주고 받아 주는 것이 관용입니다. 
특히 관용이란 말은 자기 안에 자기와 다른 사람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르지만 받아주는 것, 틀리지만 품어주는 것, 잘 맞지 않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끌어안아 주는 것, 이것이 관용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와 관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은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당할 수 있는 모든 손해는 다 당하고 살았습니다. 법적으로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재산을 몰수 당하기도 하고, 자녀들이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기도 하고, 때로는 살고 있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정처 없이 유랑생활을 해야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심지어 끌려가서 남모르게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자기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향해 적의를 품거나 분노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용서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태도를 관용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나와 마음이 잘 안 맞는 사람을 품는 그런 정도의 사치스러운 관용이 아니라, 나를 정말 괴롭히고 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사람을 품는 넓은 마음을 일컬어 관용이라고 했습니다. 
빌 4: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이와 같은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라고 명령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말씀 앞에서 얼마나 주눅이 드는지 모릅니다. 조금만 마음이 틀어져도 품지 못하는 형편에 나를 핍박하는 원수를 품어주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위해 축복을 해줄 만큼 넓은 가슴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 앞에서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관용의 본질은 긍휼, 곧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려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밑바닥에 있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긍휼은 함께 살아가는 생활방식이다.'라고 했습니다. 혼자 살려면 긍휼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어우러져 살려면, 서로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긍휼이 여기는 것은 큰 복이라고 마 5: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 임이요."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내가 남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법대로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이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사람들에게 용서하고 관용하고 있습니까? 
뜻이 잘 맞지 않는 자들을 얼마나 품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마음을 넓히고 있습니까? 심지어 해를 끼치는 자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면서 품어줍니까? 그렇게 할수만 있다면 여러분의 삶이 훨씬 밝고 건강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관용하는 일을 잘못합니다. 일본은 2001년 한 해 동안에 11,391명이 다른 사람을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우리나라는 597,570명이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사람들이 일본인들보다 보다 53배나 많습니다. 인구 비례로 치면 126배나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더불어 사이좋게 화목하게 행복하게 살아야 할 우리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지고 극한 대립 현상을 보이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 같은 마음을 가집시다. 피해자인 그가 오히려 가해자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남아프리카의 '바벰바' 족은 마을에서 잘못하여 범죄한 사람을 특이한 방법으로 다루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죄지은 사람을 모든 주민이 모인 한 가운데 세워놓고 평소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앉아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저마다 개인적으로 그 사람에 대하여 겪은 일들을 아주 세세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때 그의 잘못한 것은 말하지 않고 그가 평소에 잘한 것만 이야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가 이웃에게 베푼 친절한 행동, 아주 사소한 선행, 인내심 있게 마을 일에 동참한 것 등을 아주 자세하고도 길게 늘어놓습니다. 

이런 의식은 며칠 동안 계속 되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순번이 다 돌아가면 한바탕 즐거운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러는 동안 잘못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더 깊이 뉘우치게 되고 비록 잘못했지만 이웃에게 환영을 받으며 다시 종족의 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고 합니다. 참 아름다운 풍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 용서와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

기독교는 관용과 용서가 핵심이 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용서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고난 받으신 이유도 용서와 관용을 위함이었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용서를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실천해야할 덕목 중에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용서와 관용입니다. 하지만 실천하기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이 또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 흔 번이라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라고 하셨지만 이해관계가 얽혀져서 있을 때 자신에게 잘못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을 무조건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누군가를 무조건 용서를 실천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잘못의 가능성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실수가 있고 잘못이 있고 허물이 있을 수 있다는 잘못의 가능성 때문에 누군가에게 관용해야 하고 누군가를 용서해야 합니다. 자신도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식한다면 우린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비판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있다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자기도 언제 그런 잘못을 범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용서받음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용서 받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이 없이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거나 용서를 베풀 수 없습니다. 용서 받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을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용서에 근거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받음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한 자신을 자신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감히 내가 무엇인데 하나님이 용서하신 나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롬 8:1-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용서의 법칙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이 말씀에 대하여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을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용서 받음에 근거하여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관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실수하고 잘못한 형제의 허물에 대하여 관용하지 못하고 그를 용서하지 않는 다면 자신이 이미 주님께로부터 받은 관용과 용서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와 관용을 입은 죄인은 그 은혜에 감격하여 또 누군가를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셋째는 참된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한 때 전쟁 포로였던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고 합니다. “당신은 당신을 포로로 잡아가두었던 그 사람을 용서 했소?” “용서라뇨? 어떻게 그 작자를 용서 할 수 있겠소?”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그의 포로인 셈이군. 안 그렇소?”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용서는 결국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관용하지 않고 미움을 마음 안에 가지고 있는 이상 그 미움이나 원망이 자신을 찌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입힌 상처보다 더 큰 상채기를 내게 됩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최대한 빨리 용서와 관용으로 그 연결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3. 믿음과 실천의 균형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과 실천입니다. 
미국에는 아미쉬라고 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이들은 1700년경에 스위스와 독일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온 재 세례파 개신교 교도들입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현대 문명을 거부한 채 전기나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여전히 18세기식 생활 양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2006년 10월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니켈마인스라는 아미쉬 공동체안에 있는 작은 학교에 신이 자기를 버렸다는 망상에 빠진 한 우유 배달원이 침입해 수업 중이던 여학생들에게 총을 난사했습니다. 

5명이 목숨을 잃고 5명은 중상을 입은 이 충격적인 사건은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놨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미국 사람들을 진정 놀라게 한 것은 자식을 잃은 피해자 가족들이 보여준 용서와 관용의 태도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식을 잃은 슬픔에도 현장에서 자살한 범인의 가족을 찾아 위로하며 용서의 뜻을 전했습니다. 범인의 장례식 조문객 가운데 절반이 피해자 가족들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미국 사회가 더욱 놀랐습니다. 이들은 성경에 있는 용서와 관용의 도를 실천한 것입니다. 

오래전 어느 강가에 노를 저어 배로 사람을 건너 주는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 젊은이가 배에 탔습니다. 젊은이가 배에 올라앉고 보니 한쪽 노에는 믿음 또 한쪽 노에는 실천이라는 글씨가 써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그 뜻을 물었습니다.
노인은 웃으면서 젊은이에게 한쪽 노를 내어주며 “자 믿음이라는 한쪽 노만 저어보게..” 라고 말했습니다. 젊은이는 믿음이라는 한쪽 노를 들고 믿음..믿음 ..외치며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어찌 되었을 까요?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계속 제자리를 맴돌기만 했습니다. 
한참 노를 젔던 젊은이가 “할아버지..!! 계속 제자리를 맹돌기만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실천이라고 쓰인 노를 주며 저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이는 이번에는 실천이라는 노를 손에 잡고 실천 실천 하고 노를 저었습니다. 이번에는 배가 반대편으로 돌기만 할뿐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노인은 말했습니다. 
“젊은이, 아무리 옳은 일이라 믿는다 해도 그뿐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실천이 없다면 말이야.. 믿음이 있으면 실천을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네..” 
그리고 이제는 믿음과 실천이라는 두개의 노를 동시에 저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힘을 다해 “믿음” “실천” “믿음” “실천” 외치며 노를 저었더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용서 받았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늘 제자리만 맴돌 뿐입니다.
용서 받음을 믿는 다면 이제는 용서를 실천 해야 합니다. 용서 받았다고 믿으면 용서 받은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늘 죄인인 것처럼 사는 거, 그분이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용서할 수 있는데 용서하지 않는 것 또한 실천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았음을 믿는 다면 분명히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실천이고 진정한 용서받은 사람의 삶이니까요.

용서와 관용이 없는 마음은 스스로 마음의 감옥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의 감옥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용서와 관용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스스로 그 굴레에 매여 잇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미움의 감옥...시기의 감옥...질투의 감옥...용서하지 못하는 원망의 감옥.. 그러니 용서한다는 건 곧 자신을 자유롭게 행방시키는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고 용서 받은 사람다운 삶을 삽시다.

향 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일지라도 독을 묻히지 않고 향을 묻힙니다. 
미움으로 가득한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것은 용서와 관용 밖에 없습니다. 서로 원망하며 서로 물고 뜯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다른이에게 상처를 입혀서 자신이 입은 상처를 보상 받으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차라리 향나무처럼 내가 아프더라도 오히려 내 속에 있는 예수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내가 아프더라도 오히려 내 안에 있는 예수의 향기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가 진정한 풍요로움을 누리는 사람이고 그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내가 그냥 용서하고 관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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