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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말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사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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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사 6:1~5) 


1. 겁 없는 세대

여러분, 우리 시대가 ‘겁 없는 시대’, ‘겁을 상실한 시대’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고등학생들이 길 가던 초등학생들을 걷어차서 넘어뜨리고는 “낄낄” 웃으면서 도망하는 행동이나 그것을 버젓이 인터넷에 올리는 시대입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학생이 여 선생님의 어깨를 감싸고는 “누나 사귀자!”라고 외치자 그 선생님이 이것을 뿌리쳤는데, 그것을 동영상으로 찍고 있던 친구가 한 번 더해보라고 권하니까, 다시 그 행동을 반복하고, 그리고 그것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면허 없이 친구들과 함께 운전하던 17살짜리 고등학생이 면허증 제시를 요구하던 경찰관을 매달고 100 미터를 逆走行 하다가 다른 사람의 승용차를 들이받았습니다. 15살짜리와 13살짜리 소녀들이 자신들을 경찰에 신고한 14살짜리 친구를 아파트 난간에서 떠밀어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12살과 10살 된 자매 둘이서 이웃집 아기를 유괴하고 20만 달러라는 거액의 몸값을 요구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인근 모 초등학교 학생이 전도하는 우리 교회 주일학교 교사에게 “그 입 닥치세요!”라고 해서 당사자 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정말 겁을 상실한 아이들 아닙니까? 참, 이 세대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어디 아이들만의 모습입니까? 사실 겁 없이 덤벼드는 모습은 어른들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어른들이 그렇게 사니까 아이들도 보고 배운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는 ‘겁’, 즉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어른에 대한 두려움, 권위에 대한 두려움, 조직이나 사회나 국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 두려움이 사회의 질서가 되고 예의가 되어서 더 살기 좋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겁을 상실한 것, 즉 두려움을 잃어버린 것은 결국 국가와 사회와 가정과 개인을 망가뜨리는 일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 세대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겁”, 즉 “두려움”과 그로 말미암은 권위와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바로 “신에 대한 畏敬心”, 즉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두려움의 첫 출발점이 되는 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사람과 사람 사이, 사회, 그리고 국가적인 기강까지 무너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겁내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한 사람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시대적인 요구입니다. 

그런 면에서 먼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이 겁나는 분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십니까? 

2.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

1) 두려움, 경외

‘智慧의 詩’인 <잠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혜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잠언 기자는 사람이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明哲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삶의 기본이자 신앙의 기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잠언이 말하는 이 “경외”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경 원어로 이 말은 “야레”에서 온 것으로 ‘두려워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좀 더 구체적인 예가 신명기 2장 25절에 나옵니다.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즉 “경외”라는 말은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 ‘떨다’, ‘근심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경외”라는 말은 자연이나 그 어떤 다른 것으로 인한 공포심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존재와 그 인격에 대한 두려움, 즉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겁을 집어먹고, 하나님을 무서워하여 그 앞에서 벌벌 떨고, 하나님 앞에 선 그 자체만으로 걱정하고 근심하는 감정과 행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아니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바로 이러한 의미의 경외심, 즉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두려움과 떨림과 걱정이 있으신지요?

오늘 본문은 바로 이 하나님을 두려워함, 즉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것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두려워함

웃시아 왕은 솔로몬에 버금가는 유능하고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울어져 가는 때에 웃시아 왕은 민족의 희망이요 등불이었지요. 그러나 그의 末年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던 병이자, 하나님의 가장 큰 심판으로 여겨지던 문둥병에 걸려 버렸습니다. 그것도 傳染이나 다른 경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웃시아 왕이 제사장과 레위인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제멋대로 제사를 지내려 했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부강해지니까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그 명령을 무시하고서 겁 없이 그런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병에 걸려 문 밖 출입을 못하고 남은 生을 골방에 갇혀 지내다가 죽었습니다. 웃시아 왕 초기에는 이스라엘에 신앙의 회복이 일어나고, 나라도 부강해져서 모두가 꿈과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범죄와 비참한 죽음으로 백성들에게 남겨 준 것은 좌절과 절망이었습니다. 백성들의 꿈과 기대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어느 누구도 쉽게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식어 가면서 변질되었습니다. 또한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예배를 사모함이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거대한 대제국이 무섭도록 커 가면서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었고, 어제의 원수였던 애굽이 오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뒤바뀌고 혼란스럽고 불안한 시대였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보다 세상적인 돌파구를 찾는데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가장 답답하고 우울했던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였습니다. 자신의 親族으로 신뢰했던 웃시야 왕의 씁쓸한 마지막 모습,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변해가는 상황, 그 가운데서 우왕좌왕하는 백성들…. 그때 선지자가 찾은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으로 들어가 기도함으로서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찾고자 했습니다. 혼란스럽고 불안한 때에 성전으로 들어가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본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마음과 영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이사야가 본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이것은 自然, 人間, 하늘과 땅의 모든 세력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이 땅의 왕으로서 자기 權座에 앉아있던 왕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寶座에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항상 앉아 계십니다. 역사가 정치 지도자의 손에 있거나, 이 세상나라를 주관하는 것은 사람인 것 같았으나, 역사의 主人은 하나님이시고, 온 세상의 주인 역시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목격한 하나님과 그 자리에서 일어난 일들을 계속 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하나님의 입으신 옷이 그 방에 가득 찼습니다. 이것은 현재 이사야가 서 있는 성전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저 하늘 끝에 계시거나, 땅 끝에 계시거나, 바다 건너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에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이상의 것을 말해 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성전(לכיהה)은 예루살렘에 있는 지상의 聖殿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위대하고 거룩한 Hall, 하늘의 宮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입으신 옷이 성전에 가득 찼다는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에 충만하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지상과 천상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하늘의 신령한 존재들인 천사들의 경배를 받고 계셨습니다. “스랍들”, 즉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 하나님 곁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정확한 이름은 םיפרשׂ(세라핌)으로서, 그 뜻은 ‘불태우는 자’, 즉 ‘거룩하지 않은 것들은 다 태워 버리는 불의 존재들’이란 뜻으로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스랍들은 홀 안을 꽉 채운 하나님의 옷 위를 배회하면서, 여호와께서 앉아 계신 보좌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여섯 날개 중에서 두 날개로는 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갑자기 빛이 비취면 눈을 감거나 가리듯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本能的인 行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자신들의 발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발을 가린다는 것은 자신의 수치를 가린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尊前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보는 순간, 그 앞에서 환히 드러나는 자신들의 본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고 죄스러워 본능적으로 발을 가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가 없는 존재인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본능적으로 자신을 가릴 수밖에 없었던 그 경외심이 오늘 여러분에게도 있는지요?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거룩에 압도되었다면, 오늘 우리는 얼마나 무례한지요!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고,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고,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무례한 존재들입니까? 

스랍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행동을 취하면서 그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편을 나누어 찬양을 주고 받으면서 하나님의 거룩을 노래했습니다. 한쪽에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노래하면, 다른 한 쪽에서는 그것을 받아서 “그 영광이 온 땅에 充滿하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신비하고 장엄하고 압도적인 장면입니까!

이렇게 스랍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이사야가 서 있는 문지방의 支柱가 흔들렸습니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말이죠. 이사야가 영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저편의 세계와 그 가운데 있는 천사들, 그리고 이사야가 서 있는 이 땅에서까지,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느끼고서 감동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 앞에서 감동을 받지 않거나 감화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땅과 하늘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면서 경외심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여러분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본래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께서 이 본능을 인간에게 주신 것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앞서 말쓰드린 대로 권위와 질서 가운데 조화로운 삶을 살도록 주셨지요. 그리고 이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자기 선을 넘지 않고 제 분수를 지키게 하려는 의도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후부터는 이 두려움의 본능이 변질되었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는 것이죠. 다른 사람의 말도 두려워합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소위 ‘여론’이라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고나 질병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거듭거듭 말씀합니다. “내가 …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4,5).”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까지 보십니다. 사람은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만 살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배후에 숨어 있는 동기까지 보십니다. 사람은 겉만 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하게 행한 것도 다 보십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3) 자신의 죄인 됨을 인하여 두려워함

하늘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천사들의 찬양하는 것을 목격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천사들의 찬양과 어우러지면서 생명 없는 것들까지도 진동하는 것을 보았던 이사야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이사야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사야가 한 첫 반응은 절망이었고 두려움이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5)!” 여기서 “화로다”라는 말은 ‘절망으로 인한 탄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망하게 되었다”는 말은 ‘이미 죽은 상태’, ‘시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5)!”라는 말의 뜻은 ‘비록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이제 곧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나는 영락없이 죽었다. 이것으로 내 인생은 끝이다.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 그렇다면 여러분, 이사야가 이렇게 절망하면서 탄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➊ 당시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한 스랍들의 입술에서 찬양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찬양에 장단을 맞추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것도 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뻘쭘하게 서 있는 존재는 유일하게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그가 깨달은 것은 자신이 산 자의 세계를 떠나서 死者의 世界, 즉 죽은 자들의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인간이 죽지 않고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출애굽기 33장 20절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설사 지금은 살아있을지라도 이제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신이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사야는 탄식한 것입니다.

➋ 그리고 또 하나 선지자가 절망적으로 탄식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5절,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는 마가복음 12장 34절 말씀처럼, 입술로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과 전인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이 의식 무의식 중에 입으로 나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본능 저 깊숙한 곳, 의식의 밑바닥, 잠재되어 있고 숨어 있는 의식과 본능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사야는 그것을 “부정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더럽다, 불결하다는 뜻입니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선지자가 외친 말은 사람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어떤 실수를 저지른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생이라는 存在 自體가 아예 不淨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남 앞에서는 ‘쨉’도 안 되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수로 셀 수 있는 것, 수준의 차이, 연륜의 차이가 아닙니다. 아예 인생 자체가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사야의 외침입니다. 

이사야는 그 불안하고 혼돈된 시대에서 그래도 바르게 거룩하게 살려고 몸부림친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로서 사람들에게 模範이 되려고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꽤 괜찮은 사람, 의로운 사람, 깨끗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도 이사야는 자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발견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더럽고 불결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이, 우리의 행동이나 말이 또한 얼마나 부정합니까? 여러분, 입을 통하여 나오지 않는 것은 그렇다 쳐도, 우리의 입을 통하여 쏟아져 나오는 악만 해도 엄청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우리 시대 사람들이 저지르는 모든 부정과 함께 하여, 그것에 同調하고, 함께 즐기고, 때로는 침묵하고 그냥 보아주면서 살아왔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죄를 바라보고 분개하고 애통하여 울기를 중단했습니다. 죄라고 지적하고 고치려 하기보다는 피하고만 살아왔습니다. 異邦神殿을 보고서 아름다운 建築術이라며 감탄했습니다. 이 부정한 사람들 속에 살면서 아무런 問題意識이나 고민 없이 살아온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를 언제 어떻게 지었느냐?’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죄인이라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즉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해주시는 그 은혜(요일1:9)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의 고통을 받아야 할텐데, 그 놀라운 은혜로 아직도 살아있고, 또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 모습, 은혜 아니면 설 수 없는 죄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두려움이고 경외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느낌은 어떻습니까? 선지자가 느꼈던 이런 절망감이 여러분 속에도 있으십니까? 이제부터 여러분에게도 죄인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 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눈에 안 보이면 없다고 착각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지요. 설사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기가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실 줄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항상 여호와 앞이라는 것, 소위 “코람데오 의식”을 늘 가지는 것이죠.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나의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신다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보디발의 아내가 젊은피가 끓는 요셉을 유혹했지 않습니까? 아무도 없는 데서,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유혹했습니다. 다른 젊은이 같으면 쉽게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이 악을 행할 수 있습니까?’ 하면서 도망쳤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보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이 요셉과 같게 되기를 바랍니다. 創造主시며, 萬王의 王이시오, 우리의 삶을 決算하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 바로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겁내고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바르고 정직하고 의롭게 그리고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것, 이것이 여러분의 삶의 태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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