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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개혁주의 교회운동 (롬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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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교회운동 (롬 11:36)


개혁주의란 우리에게는 생소하지 아니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듣고 있을 뿐 아니라 부족하지만 개혁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개혁신앙이나 개혁교회라는 말은 있지만 개혁주의라는 말은 하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Reformed를 개혁주의(改革主義)로 번역한 것은 탁월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개혁주의는 쯔빙글리(1484-1531)와 칼빈(1506-1564)의 개혁운동을 루터의 개혁운동과 차별화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칼빈이 성경적 해석과 신학을 체계화했기 때문에 개혁주의를 칼빈주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중세의 영혼을 깨우친 칼빈주의의 사상과 체계를 말합니다. 

하지만, 칼빈주의를 제네바의 개혁자 요한 칼빈에 의한 창작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칼빈은 이 사상체계의 해설가 정도에서 한계를 가집니다. 칼빈주의 사상은 확실히 바울 신학의 부흥이며 어거스틴 신앙의 계승입니다. 그래서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개혁주의를 어거스틴주의(Augustinism)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교회운동은 새로운 교회운동(a new church movement)이 아니라 본래의 교회상을 찾는 데 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뉴톤'이 발견하기 전에도 이 세상에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뉴톤'은 이것을 발견하여 문명사회에 공헌했습니다. 이것을 따르는 자들을 뉴토니즘(Newtonism)이라고 한다고 월버톤은 말했습니다. 월버톤이 말한 Newtonism은 Calvinism과 동일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Calvinism은 개혁주의 교회의 대명사입니다. 

칼빈주의 운동은 신학과 신앙의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옛 것의 쟁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는 바로 성경 그대로 라는 말입니다. 칼빈주의자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절대 주권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은 전 피조 영역에서의 하나님 자신의 지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Ⅰ. 개혁주의는 바른 신앙 운동입니다. 

1) 성경의 재발견에서 시작됩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21절에 『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첫 번째 외침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보다 교황의 권위가 절대시 될 때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가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독자적인 신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멈추어야 된다는 원리로 성경을 해석합니다. 성경의 권위는 독자적인 절대적 권위만이 있을 뿐 종속적인 권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① 신구약 성경 66권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성경의 정경성). 

② 성경이 옛날 선지와 사도들과 그 시대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특히 후대사람 곧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줄 믿습니다(성경의 영원성). 

③ 성경 원본에 전혀 그릇됨이 없음을 믿습니다(성경의 완전성). 

④ 영감의 범위에 있어서도 기계적 영감, 동력적 영감, 언어적 영감, 사상적 영감, 부분적 영감, 도덕적 영감 등을 철저히 배제하고 완전 영감을 믿습니다(성경의 완전 축자영감설). 

⑤ 사본과 사본들의 엄격한 전사를 믿으며 사본과 사본과의 차이는 있어도 원본과 사본과의 차이는 없다고 믿습니다(사본의 권위성).

⑥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이한 최종의 권위임을 믿습니다(성경의 유일성). 

⑦ 성경을 해석하는 무모한 법칙도 오직 성경 그 자체임을 믿습니다(성경의 신임성). 

⑧ 모든 종교적 논쟁을 결정하고 또한 고대의 학자들의 의견과 인간의 교훈과 개인의 정신문제를 감독하고 판단하시는 최고의 심판자는 성령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경 외에 아무 것도 없음을 믿습니다(성경의 절대성). 
성경이 가는 곳에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멈춥니다. 성경은 성경이 해석합니다. 문자적(여자적)해석이나 우의적(풍유적)해석, 경건주의(신비주의)적 해석의 약점을 극복하고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믿어야 합니다. 
여자(문자)나 풍유나 신비가 볼 때 성경에 약점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이 안되는 것, 풍유적인 것이 해석이 안되는 것, 신비적인 것이 이해 안되는 것, 이것은 인간들의 약점이지 성경의 약점은 아닙니다. 성경은 완전 신뢰하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2)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의 재발견입니다. 
종교개혁의 두 번째 외침은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구원은 당시 로마 카톨릭의 주장처럼 인간의 자율성에 기초한 것이나 인간의 행위(Works), 공로(Merits)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게 된다는 것은 종교개혁 신학의 기초입니다. 이 신학은 신인협동설(Synergism)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확신케 해줍니다. 

3) 오직 은혜의 재발견입니다. 
종교개혁의 세 번째 외침은 오직 은혜(Sola Gratia)입니다.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는 다같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공로나 행위나 선행이나 고행 등과 같은 인간의 행위에 기초하지 않고 오직 은혜를 통한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종교개혁을 통해 다시 발견된 보화입니다. 

4) 만인 사제직의 발견입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의 교권자체를 부인한 것이며 사제주의를 극복한 것입니다. 곧, 신부는 하나님께 대하여는 신자의 영혼을 책임지고 신자에게 대하여는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한다는 사제주의의 그릇된 가르침을 극복한 것입니다. 개혁자들은 평신도와 성직자들을 지나치게 분리시키지 않으며 평신도 보다 성직자가 우위에 있어서 특권을 누리려는데 항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계급주의를 타파한 것입니다. 성직자들은 7성례를 동반한 사제주의로 교권을 유지해 왔으나 개혁자들은 이것을 부인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아무 것도 없음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고 했습니다. 

Ⅱ. 개혁주의는 바른 신학 운동입니다. 

1) 원시 기독교의 회복운동입니다. 
그리스도의 본래적인 신앙과 생활에서 이탈한 중세 로마 카톨릭의 형식화된 의식적 생활에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떠나버린 형식적 제도 (Sacramental Sytem), 교회적 율법주의(Ecclesiastical legalism)와 같은 비 복음적인 전통에서 벗어나서 사도적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종교개혁은 어떤 새로운(new) 운동이 아니며 새로운 신학운동(a New Theology)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한 신학은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이미 있어 왔으나 오랜 세월동안 로마 카톨릭의 교권과 미신적인 비 복음적 전통 속에 가리워져 있었던 것을 다시 찾아내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종교개혁은 첫째 영적 갱신운동(Spiritual renewal movement), 혹은 영적 부흥운동(Spiritual revival movement)으로서의 종교개혁이고 둘째는 개혁주의 신학운동으로서의 종교개혁입니다. 

2) 영적 부흥운동입니다. 
종교개혁을 교리적 개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종교개혁은 영적 부흥운동이며 오랜 세월동안 경직된 제도 아래서의 해방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영적인 부흥에 갈급함 때문입니다. 영적인 부흥의 갈급함이 종교개혁을 통하여 구체화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부흥의 측면보다 교리적 요소가 더욱 분명하게 부각된 것은 당시 부패한 로마 카톨릭의 신학적 입장이 성경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리적 개혁이 시급한 와중에서 상대적으로 영적부흥에 대한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 받지 못한 것뿐입니다. 

Ⅲ. 개혁주의 교회의 사명입니다. 

칼빈주의는 구라파의 역사를 개조했습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합중국을 탄생시켰습니다. 칼빈주의 노선을 걸어왔던 국가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축복이 중단되지 아니했습니다. 
신학자 '맥카우리'는 말하기를 "종교 개혁자들은 체계적이었고 책임 완수에 능했고 깨뜨리기 어려운 시기에 깨뜨렸다"고 말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칼빈주의가 오기 전에 어두웠습니다. 사람과 가정과 환경까지 더러웠다고 '방컬'은 말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개혁주의자 요한 낙스에 의해서 새롭게 되었습니다. 칼라일은 말하기를 요한 낙스는 그 나라를 죽음에서 부활시켰다고 극찬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당을 중심하고 개혁주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위그노당 3만명이 학살을 당했는데 이에 대하여 인본주의자 '렉키'는 말하기를 "위그노당은 가장 밝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정직한 자들이었다"고 했습니다. 
화란의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에 오늘의 화란을 탄생시켰습니다. 

칼빈주의는 대륙의 핍박을 피해 오월의 꽃이라고 불리는 May flower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오늘의 요셉의 창고인 미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힘 있는 십자가의 물줄기가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나라에 도착한 칼빈주의는 숱한 수난과 우여곡절 속에 고려파와 고려신학교를 탄생시켰습니다. 장차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에 기초한 우리교회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속단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요긴하게 사용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1) 우리는 칼빈주의 훈련에 익숙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입니다. 우리의 신앙흐름은 창조가 아닌 신앙개혁입니다. 곧 원시 기독교의 회복운동이요, 선지와 사도의 터를 중시하고 이어가는 영적 부흥운동입니다. 

2) 튼튼한 신학을 바탕으로 한 줄기찬 신앙운동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운동입니다. 

3) 지상명령인 선교운동에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힘을 선교에 쏟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오늘의 사명인 동시에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신령한 과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혁주의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입니다.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은 ① 성경 제일주의 ② 하나님 제일주의 ③ 하나님 영광주의로 그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 사상의 실천적 의미에서 볼 때 성경적 신행일치주의입니다. 이것은 순교적 삶에서 그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는 곧 성경중심주의입니다. 계시의존 사색만이 개혁주의자들의 삶의 궤도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인간의 삶을 바르게 인도하는 길잡이가 됩니다(시 119:105).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이나 사상이 성경에 근거했다고 해서 다 개혁주의는 아닙니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과 교황의 오류들을 열거하면서 성경만이 무오하며 신앙과 교리의 기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루터를 개혁주의자라고 부르지 아니합니다. 
메노 사이먼스는 철저하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라고 하면서 천주교 사제직을 버렸습니다. 재세례파에 속한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이나 펠릭스 만쯔(Felix Manz) 같은 사람은 성경의 최고 권위를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재세례파인 그들을 개혁주의자라고 부르지 아니합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학사상과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신학의 원리와 전통입니다. 즉 어떤 신학원리와 전통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하는가에 따라 개혁주의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의 가장 첫 번째 과목 중에 하나가 성경 해석학입니다. 그리고 교의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으로 구분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자주 말하는 것이 평의한 성경구절이라도 우리가 주장하는 교리적 틀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신조, 교리, 헌법은 모두 철저하게 성경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지말라고 했습니다(벧후 1:20).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 『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성경을 주관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객관적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은 바울, 어거스틴, 쯔빙글리, 칼빈 등을 통하여 성경적인 신앙고백서를 제정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앞선 자들을 통하여 섭리하신 신앙전통입니다. 
칼빈 이후에 계속해서 찰스 핫지, 메첸, 반틸,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목사로 이어지는 신앙의 거룩한 물줄기는 우리의 신앙 전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당하게 나누어지는 것은 개혁주의 교회의 특색입니다. 교회설립의 자유, 선교의 자유, 분리의 자유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이해관계나 헤게모니 쟁탈 때문에 나누어지는 것은 분리를 남용하는 죄악입니다. 또한 정당하게 나누어진 것을 앞서 말한 이유 때문에 일치화 운동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독일의 개혁주의자들은 루터란(Lutheran)과 차별화시키기 위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했습니다. 화란의 개혁자들은 알미니안주의와 차별화하기 위해 도르트 신조를 작성했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은 신조를 절대화하는 로마 카톨릭이나 신조 무오설을 주장하는 희랍정교회를 반대합니다. 반대로 신조의 가치를 부정하는 소시니안이나 정숙주의자 퀘이커교도 등이 주장하는 신조 무용설도 반대합니다. 
개혁주의자들은 신조와 신앙고백을 성경과 동일하게 취급하지는 않는다고 이미 앞에서 말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신조와 신앙고백은 상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객관적 성경해석과 신앙생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S.F.C.강령 가운데 있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우리의 생활원리는 곧 개혁주의자들의 생활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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