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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와 하나님의 마음과 나 (사 5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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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하나님의 마음과 나 (사 59:1~18)
  

감사절 아침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행복하고 감사한가? 감사가 찾아지지 않는다면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가 아니고 죄가 문제다. 교만의 죄가 감사를 밀어냈다. 교만의 죄가 원망과 불평을 만들어 내고 있다. 

오늘 날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의 심각성은 무엇인가?

  
1.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단절시킨다. (사59:2)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상실감으로 인해 공허가 찾아온다.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여 감사는 완전히 상실된다. 존 헨리는 말하길 “감사가 최고의 항암제요, 해독제요, 방부제”라고 했는데 감사가 사라지고 있다. 옛날 중동으로 돈 벌러 간 남편이 매달 한국의 아내에게 돈을 보내 주었다. 땀 흘린 돈을 잘 모아서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잘 돈본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남편이 보내준 돈으로 살림을 하다가 심심하고 따분해서 세상 구경을 나왔다가 제비족 같은 남자를 만나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돈도 잃고 삶이 잘못되어 있었다. 결국 그 때부터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두려워지고 불안하다. 도망가고 싶다. 이처럼 죄는 관계를 끊어버린다. 화목한 관계, 친밀한 관계를 파괴시킨다. 

달콤함으로 탈을 쓴 쓰디쓴 죄는 모든 관계를 망가뜨린다. 죄란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의 관계, 즉 부부 관계, 친구 관계, 목사와 성도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선배와 후배의 관계 등 모든 관계를 망가뜨린다. 

남편에게서 편지가 왔다. 다음 달이면 한국에 귀국할 수 있다는 편지가 왔다. 아내는 다급한 나머지 답장을 썼다. 1년만 더 돈을 벌어서 돌아오라고. 그러나 아내를 보고 싶은 남편은 귀국을 하고 아내를 가출해 버렸다. 이처럼 죄는 관계를 끊어놓고 나와 너 사이를 멀리 멀리 밀어낸다. 거기에 무슨 감사가 깃들일 틈이 있겠는가?
  

2. 죄는 내가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게 만든다. (사59:1)

사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손으로 구원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귀로서 세밀하게 모든 것을 듣는 응답의 하나님이다. 그런데 왜 구원하지 않고 듣지 않으시는가? 그것은 바로 죄가 있을 때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균열시키기에 응답이 미칠 수가 없게 된다.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즉각 들어주셨다. 하나님의 손으로 구원해 주셨다. 사37:17을 보면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라고 기도한대로 앗수르에서 히스기야와 백성을 구원하셨으니 하나님이 능력의 손이 되어 주셨고 응답의 귀가 되어주신 것이다. 그런데 기도가 응답이 안되는 것은 죄 지은 자의 죄의 더러움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를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시므로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자. 사59:3~7을 보면 백성들의 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① 손이 피에,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 졌다.

②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혀는 악독을 낸다.

③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가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다.

④ 허망한 것을 의뢰한다.

⑤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는다.

⑥ 독사의 알을 품고 알을 먹은즉 죽고 알이 터진즉 독사가 나온다. (생각이 악하다.)

⑦ 행위는 죄악의 행위요 무죄한 자로 피를 흘리게 하는 포악한 행동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은 죄악 공화국이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다 죄로 가득한 죄악의 더미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응답한다면 하나님의 의는 박살나고 하나님은 불의의 하나님이 되신다. 거룩한 하나님이 아니고 지저분한 하나님이 되신다. 내 백성일지라도 응답 없음이 정상이다. 응답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선민이 경건해야 하는데 죄 밖에 없다. 그 기도에 하나님이 반응하신단 말인가? 죄는 이렇게 응답을 가로막는 암덩어리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고 마는 인생이 될 때 그 사람은 어떤 인생이 될 것인가? 불평과 원망, 패역으로 치닫는 것이다. 결국 죄는 죄를 더 낳게 만들고 감사가 실종된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의 죄의 저주다. 우찌무라 간조 목사는 말하길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배신이나 죽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과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막힌 귀로,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죄는 감사를 먹어버린다. 
  

3. 죄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의 길을 내가 받지 못하게 한다. (사59:8)

사59: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죄 속에 있을 때 사람인지라 후회도 한다. 그래도 죄 중에 있을 때 정의를 바라고 구원을 바란다. 그래서 평강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무용한 것 뿐이다. 

사59:9下 ~10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라고 하였다.

죄악이 심히 많고 포악과 패역을 말하는 이에게 어찌 평강의 길이 보이겠는가?

사59:11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평강이 주어질 수가 없다. 아! 무섭게 쏘는 죄의 독이여. 죄를 깨뜨리고 죄가 벗겨지고 죄가 소멸되어야 하는데 죄만 가득 가득 쌓여 있다. 평강이 없다면 억만금을 가졌다한들 무엇이 행복한가? 아니 삶의 무엇이 감사할까? 이 일을 살피신 하나님은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신다. 

  
첫째,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사59:15)

정직이 있고 성실이 있고 공의가 있는 사람과 사회를 원하시기에 죄악 세상을 달가워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죄악 공화국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성결 운동의 기수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을 슬퍼하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하나님의 감정을 안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 수 있다. 죄를 떠나 공의와 성실, 정직을 세우며 살고 굽어진 삶을 살지 않음에 감사할 수 있다.

  
둘째,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신다. (사59:16)

사59:16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하나님은 죄악이 만들어낸 사람의 불행을 염려하시고 중재자를 찾으신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끊어버린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보자를 기다리는 것이다. 당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죄의 문제에 대한 중재자는 제사장과 선지자였다. 그런데 그들도 자기의 직무를 다하지 못하고 위선의 앞잡이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죄악도 죄악이지만 구원과 회개, 정결하게 되는 씻음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끊어진 관계 사이에 서서 다리를 놓으려는 중보자의 헌신이다. 어느 단체든지, 아니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정말 중보자가 있음이 그 교회의 희망이다. 중보기도자가 결렬된 곳에 서서 중재하는 한 그 교회는 살아난다. 어떤 죄악이 가득하더라도 중보자가 있으면 희망이 넘친다. 정말 나는 이 말씀을 읽을 때 감사가 넘친다. 우리 교회 안에 중보자들이 있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면 감사하다.
  

셋째, 하나님이 친히 중재자가 되셨다. (사59:16下)

사59:16下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시고 중재자를 찾으셨지만 아무도 없기에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을 살려내시기 위해 행동하셨다. 죄악 공화국을 보면서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이 중재자가 되려고 무장하신 각오와 열심을 보라. 하나님이 무장하신 복장을 보라. ① 공의를 갑옷으로 삼고 ② 구원을 자기 투구로 삼고 ③ 보복을 속옷으로 삼고 ④ 열심을 겉옷으로 삼고 무장하셨다. 그는 급히 흐르는 강물처럼 시온을 구속하기 위해 오신다. 밀려들어오듯 다가오신다. 

하나님은 죄 아래 있는 모든 자를 심판하신다. 행위대로 갚고 원수에게 분노하고 보응하신다. 죄를 그냥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59:18) 하지만 하나님은 중재자로 오셔서 구원하신다.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구속자로 임하신다. 

사59:21의 이 말씀을 읽노라면 하나님 자신이 중보자가 되셔서 하나님 자신이 구원을 가져다 주시고 죄를 떠나 회개하고 바로 서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 이제 우리는 죄에서 떠나야 한다. 그 분은 죄에서 떠난 자에겐 그 분의 영과 그 분의 말이 믿는 성도의 입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언약하신다. 우리를 죄의 파멸에서 구속하시려 친히 구속자가 되신 하나님, 그 보내신 예수가 정말 죄를 다 담당하셨다. 피를 흘리시므로 죄를 다 씻으셨고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 무리의 죄악이 다 그에게로 건너갔다. 우리는 나음을 입게 되고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의롭게 될 수 없는 우리들에게 이젠 죄를 밀어내고 관계를 회복시킨 중보자가 나타나셨다. (딤전2:6) 

“중보자는 한 분이시니 그리스도라.” 그렇다. 할렐루야!

회개하도록, 믿도록, 그 분의 영을 부어주시는 구원의 역사가 중보자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얼마나 놀라운 감사의 사건인가? 만입을 다 가지고 그 은혜 다 갚을 수 없는 감사의 조건들이다. 


게다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우리도 간구와 기도, 도고와 감사를 하는 중보자가 된 것이다. 

고후5:18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도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아 중재자의 신분으로 서 있다. 정말로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사건이다. 

죄악이 아무리 관영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시대처럼 구부러진 것 밖에 없어도 성도란 아름다운 덕을 이 시대에 전하라고 택함 받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이 땅에서 살림을 받은 우리가 중재자 직임을 받은 사명자다. 무엇을 가졌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내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서 있다는 중보자로 서 있다는 신분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버림 받고 죽어야 마땅한 내 신분이 변해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지고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는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평강을 얻지 못한 내가 제사장으로, 중보자로, 사명자로 화목을 위해 서 있다는 것이 감사한 것이다. 이것이 기뻐 뛰며 감사할 내용이다. 당신이 제사장이요, 중보자요, 사명자다. 이것을 온 마음으로 감사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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