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열정으로 살라 (눅 5:17~26)

  • 잡초 잡초
  • 356
  • 0

첨부 1


열정으로 살라 (눅 5:17~26)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모세, 이스라엘의 출애굽 영웅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400년간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하고 있던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가르게 하셨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해맬 때도 모세가 함께 있어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명은 여기까지였습니다.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신 1:37, 4:21, 32:52)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남은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모세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비록 자신은 못 들어가지만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말씀을 전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선택하라고 강권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는 그에게 열정이 있었습니다(신 30:19). 그는 백성들에게 온전히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신30:20a). 또 온전히 사랑하기 위하여 겸손히 배울 것을 명령하였습니다(신30:20a). 그리고 정작 그 자신은 담대히 떠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이것이 ‘내 생애 마지막 한 달’ 캠페인을 통하여 듣고, 읽고, 생각하고, 나눌 주제입니다. 이것은 ‘열정적으로 살라’, ‘온전히 사랑하라’, ‘겸손히 배우라’, ‘담대히 떠나라’입니다. 
   
오늘 함께 생각할 주제는 첫 번째로 ‘열정으로 살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열정으로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무엇을 위하여 왜 열정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가버나움이라(막 2:1)이라는 동네의 한 집에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거기에는 그 동네 주변의 갈릴리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유다의 여러 마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도 앉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로 이미 집 안은 발 디딜 틈도 없었고 집 주변도 사람들로 겹겹이 둘러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 주셨다는(5:13)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였기 때문입니다(5:15). 
   
그 때 집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중풍 들린 사람을 침상에 눕혀가지고 와서 예수님 앞에 데리고 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 앞까지 빽빽하게 들어선 사람들 때문에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소원이 있었습니다. 침상에 들려오는 사람의 절박한 처지보다 대단한 구경거리가 펼쳐질 것이라는 것 때문이라도 자리를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중풍 들린 사람을 메고 온 사람들은 당황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긴 하여야 하겠는데 길이 막혔으니 이런 답답한 노릇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9절 말씀입니다.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온 사람들은  자신이 메고 온 사람을 사람들 때문에 문으로 들어 갈 수 없자,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그 자리를 뚫고, 그 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무리 한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가옥 구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당시 그곳의 지붕은 비가 자주 내리는 지역처럼 비탈진 것도 아니었고, 일부러 생짜로 지붕을 뚫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그 지역의 지붕은 평평하였습니다. 더욱이 집안에서 불을 피워서 음식을 하기때문에 집안에는 하늘이 훤히 보이는 구멍이 나있었습니다. 그 구멍은 연기가 빠져날 갈 정도의 틈을 두고 진흙을 이겨 만든 얇고 커다란 옹기로 덮어 두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기와[kevramo"/케라모스]라고 하였습니다. 환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지붕에 있던 기와를 벗이고 병자를 침상 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실로 기막힌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20절 말씀 전반절입니다.
   :20a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였습니까? 믿음을 보셨습니다.
누구의 믿음을 보셨습니까? ‘그’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그들’의 믿음입니까? 예수님은 그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침상에 누운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침상을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자신들이 메고 온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께 보여서 치료 받게 하기 위하여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고 달아 내리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1. 열정은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집안에 있던 사람들도 나름대로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거기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에게는 무거운 힘, 냉소적인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보자는 심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냉정은 있었으나 사람을 살리는 열정은 없었습니다. 집을 둘러쌓고 있는 수많은 구경꾼들에게는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떠들썩하고 흥분된 힘으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흥분은 있었으나 열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침상을 메고 온 사람들은 그들이 환자의 가족인지 친구인지 아니면 돈을 받고 한 사람들인지 알 수 없으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들어갔습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오자 스페인 국왕은 콜럼버스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족들은 콜럼버스의 업적을 깎아내리려고 하였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였다는 것이 뭐 별거냐고 시비가 붙었습니다. 
   
그 때 콜럼버스는 귀족들에게 달걀을 테이블에 세워볼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족들은 아무도 달걀을 세우질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콜럼버스가 달걀의 한쪽을 조금 깨뜨린 다음 세웠습니다. 귀족들은 그렇게 세우면 누구는 못 세우겠는가 하며 따졌습니다. 그 때 콜럼버스는 ‘달걀을 세우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그 방법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 
   
알고 나면 쉬운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처음 발견하기까지에는 창조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창조성은 열정을 받쳐서 일할 때 발휘됩니다.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나갈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자신의 생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열정을 가짐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창조성을 발휘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야기는 일단락되었습니다. 난데없이 천장을 뚫고 사람이 내려오는 어수선함이 진정되고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을 보면서 듣던 소문을 확인하고 의심에서 벗어난 기쁨이 그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정을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0)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이를 두고 시비를 걸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1)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셨으니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하였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고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하시면서 물으셨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쉽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이 확실히 쉬운 말입니다.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오해될 수 있는 어려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쉬운 말을 두고 어려운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쉬운 말을 포기하고 오히려 어려운 말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쉬운 길을 포기하고 어려운 길을 자처하신 예수님의 삶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고 주리셨음에도 불구하고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말을 거절하셨습니다(마 4:3).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나 남게 하시는 분이 자신을 위해서는 손쉬운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눈 한 번 딱 감고 절하기만 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는데(마 4:8)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 열정은 고통을 견디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열정(pass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고통을 당하다 혹은 견디다’를 뜻하는 파떼오(patheo)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을 고난(The Passion)이라고 부릅니다. 열정은 쉬운 일을 포기하고 어려운 길,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열정이 식은 사람은 쉬운 길을 찾아서 쉽게 가지만 열정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열정 그 자체이신 분이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쉽게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죄의 값을 몸소 치르기 위하여 고통의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인간 예수님으로써는 거절하고 싶으셨기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지만, 끝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순종하셨습니다. 고통스럽지만 그 길을 가는 것이 열정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선택하는 열정이 있으시기를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쉬운 일은 포기하고 어려운 일만 골라서하는 것이 열정입니까? 쉬운 말을 포기하고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것일지라도,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지라도 그것을 열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쉬운 말을 하지 않고 어려운 말을 하신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24절입니다.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예수님께서 “일어나 걸어가라.”는 쉬운 말을 하지 않고 “네 죄가 용서받았다.”는 어려운 말을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친히 속죄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죄가 사하여집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죄가 용서받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아는 사람들이 믿어야 할 사죄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사죄 받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죄를 없이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쉬운 말을 두고 어려운 말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쉬운 말을 할 것이냐 어려운 말을 할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하셨습니다. 고통이 있더라도 목적을 따르는 것이 열정입니다.

3. 열정은 목적을 따르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야 열정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달려가야 할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중도에서 포기합니다. 남들이 달려가니 왜 달려가는지도 모르고 ‘남이 시장에 간다고 무슨 지게 지고 시장에 간다.’는 속담처럼 따라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모르는 일을 끝까지 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야 할 인생의 목적을 모르면서 열심히 살 사람은 없습니다.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할 이유를 모르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는 무엇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목표보다 왜 그 일을 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목적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열정은 식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정의 불을 지피기 위해 연료를 공급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목적의식입니다. 그렇게 하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힘들고 어려워도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하십시오. 그래야 열정이 생깁니다.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이유가 분명하다면 견딜 것입니다.

호주의 시드니 교도소에서 일어났던 실화입니다. 
   
교도소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빵을 배달하는 트럭이 왔습니다. 한 죄수가 빵을 배달하는 트럭에 몸을 숨겨 탈출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계획대로 모범수가 되어 빵을 싣고 나르는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빈 박스 속으로 들어가 숨었고 차가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추워 오기 시작했습니다. 빵을 싣고 다니는 차는 냉동차였기 때문입니다. 몸이 꽁꽁 얼었지만 ‘오늘부터 나는 자유다!’라는 생각 하나로 꾹 참고 견뎠습니다. 드디어 트럭이 멈추었고 문이 열려 재빨리 뛰쳐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뛰어나가 보니 동서남북이 철조망이고, 총을 든 군인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가 탄 트럭은 모든 교도소를 돌며 빵을 배달하는 차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있던 교도소에서 나오기는 하였지만 다른 교도소로 온 것이었습니다. 
   
자유를 위한 분명한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고생 고생하여 일단 그가 머물던 감옥에서는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벗어났다는 것이 또 다른 교도소로 옮겨가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렇게 탈옥하려고 힘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우리가 열정을 쏟아야 할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25절입니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예수님께서 침상을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침상에 누었던 환자를 고쳐 주시자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깔고 누웠던 요를 걷어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의 결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광을 돌린 사람은 이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26절입니다.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거기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doxavzw/독사조]는 것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고 하나님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나타난 결과는 한 마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4. 열정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삶을 위해서 열정을 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회를 위하여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시면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출 20:8-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힘써’[db'[;/아바드]라는 말은 ‘노예가 되다’, ‘종살이’의 뜻도 있습니다. 힘써 일하라는 말은 자신의 일에 참으로 열심히 애써서 일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애쓰고 힘쓰는 것이 단지 조금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아무리 성공을 하고 업적을 쌓을지라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지 못한다면 거품에 불과합니다.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것이 인기라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이유는 우리의 낯을 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빛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때문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삶의 이유가 될 때 열정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내 생애가 딱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고난도 무릅써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의 사람이 가지는 마땅한 태도입니다.
   
“게으름을 치료하는 처방은 단순히 ‘부지런해지자’라는 결심만으로 되지 않는다. 게으름에 가장 적절하고 유일한 처방은 당신 안에 있는 불꽃을 발견하는 것이다.”(매튜 폭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 안에 성령님이 계셔서 이루시려는 것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살아야 할 이유를 불꽃으로 삼아야 합니다.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열정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