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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막 10:4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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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막 10:46~62)


한 소녀가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황제를 찾아와 무릎을 꿇으며 울부짖습니다. "페하, 아버지를 용서해주세요." "네 아버지는 누구며, 너는 누구냐?"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제 이름은 라욜라(La Jolla)입니다. 제 아버지는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계십니다." "소녀여!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네 아버지가 반역죄를 범한 것이 이번이 두 번째로구나." 그때 소녀는 외쳤습니다. 

"폐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탄원하는 것입니다. 폐하! 간청합니다. 제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시어 긍휼을 베풀어주소서." 나폴레옹은 갈등을 느끼다 소녀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내가 네 아버지에게 긍휼을 베풀어주마." 죄인에게는 오직 긍휼이 요구될 뿐입니다. 

오 할레스비(Ole Hallesby)는 '기도(Prayer)' 라는 저서에서 기도가 어려워지는 중요한 이유를 어느 순간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기도의 열정, 마음의 감동과 눈물을 의지하려다 보니 그런 것이 사라지면 기도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그런 순간에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주시는 주님의 이름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부르짖는 모습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는 자신의 불쌍함을 인정하는 겸허한 모습입니다. 자기가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위대한 발견입니다. 가장 어려운 발견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제 잘난 맛에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자존심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 앞에서 자신이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예수 앞에서 불쌍한 존재인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탕자는 자신이 불쌍한 존재임을 발견하면서 위대한 자기 발견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인생을 갈라놓은 곳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치명적인 죄를 발견하는 순간 예수께로 나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순간에 울면서 예수의 품으로 나갔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디매오가 바로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다' 라는 말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시편 103편 13절에는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요엘 2장 18절은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마태복음 14장 14절에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즉 모든 구절이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으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까? 
 
첫째로 온전히 믿어야 

이어령(李御寧) 교수는 지식인의 싱징이라 불리울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신봉하던 무신론자였습니다.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에 대하여 비판하기를 "노아가 진짜 사랑이 있었다면 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다시는 하나님을 위해 양을 잡아주지 말자" 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사랑하는 딸의 불행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혼한 딸이 두 차례나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데다 망막이 손상되어 거의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이어령 교수는 자신의 무능력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력을 회복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정말 네가 주안에서 편안함을 얻었다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나의 무력이 증명된 것이 아니냐. 내가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았구나. 동행하자. 지금 자신은 없지만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이게 해 달라." 결국 그는 딸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으니 이제 그는 무신론자일 리가 만무합니다. 인생의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게 된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본문 47절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가 힘을 다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친 것은 그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한두 번 들은 차원을 넘어서 예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비록 소경이 되어 보지는 못했으나 예수가 메시야임을 온전히 믿은 것입니다. 그는 이사야 35장에 약속된 메시야의 사역을 믿었습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그는 알고 있는 말씀에 기초하고, 들은 예수에 대한 소문을 통해 예수가 메시야인 것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위대한 종교지도자도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신 메시야이십니다. 이 사실을 온전히 믿는 자에게 긍휼이 임합니다. 즉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전한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한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택한 받은 백성에게 긍휼과 불쌍히 여김을 베푸십니다. 예수를 바로 알고 온전히 믿음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환경을 이겨야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강수진(姜秀珍)에게 '캄머탠처린(Kammertanzerin)'이란 작위가 정부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이는 '궁중 무용수' 란 뜻으로 최고의 예술적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주는 명예입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별명은 강철 나비입니다. 강철과 나비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가 한 몸에 녹아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자유롭게 허공을 나는 나비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그녀의 몸놀림은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그녀의 '발' 입니다. 

마치 고목의 옹이진 것처럼 보이는 발은 강철같이 단단합니다. 하늘거리는 나비의 너울거림을 한 몸에 담아내기 위한 쉼 없는 훈련의 결과요, 혹독한 자기 채찍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한 시즌에 수십, 수백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연습에 열중하고 몰두합니다. 가로막는 장애와 힘든 환경을 모두 이겨낸 것입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진하고 깊은 감동은 온갖 장애와 환경을 이겨낸 열매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더는 못한다고,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할 때 예술 인생은 거기서 끝이다." 예술가가 장인이 되려면 환경을 이겨내는 몰입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미완성임을 고백하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훈련해야만 최고의 예술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48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 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라는 태도가 불쌍히 여김을 받게 만든 것입니다. 가로막는 환경에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긴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입니까? 직장입니까? 시간입니까? 주저앉으면 기회가 없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불쌍히 여김의 은혜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긍휼과 불쌍히 여김을 얻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힘든 장애는 사람입니다. 특히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힘들게 하는 환경 앞에서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크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걸음이 멈추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 장애물이 있어도 소리 지르며 이겨야 합니다. 힘들다고, 어렵다고 주저앉으면 불쌍히 여김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저앉을 환경에서도 주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바로 구해야 

캐나다(Canada) 국가는 100년 동안 나무만 팔아도 국민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숲의 나무들이 많습니다. 벌목을 하여 수출을 많이 합니다. 높은 산에서 벌목을 하면 원목을 산아래 강으로 굴러 내립니다. 상류부터 흘러오는 강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목은 강을 타고 하류로 내려갑니다. 하류의 제재소에서는 원목을 걷어 가공을 하여 상품을 만듭니다. 그런데 떠내려가던 수천 개, 수만 개의 원목들이 얽히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서로 뒤얽힌 나무들은 떠내려가지 못하고 서게 됩니다. 

그러나 벌목공들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위치에서 가로막고 있는 원목을 뽑아 내버리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 원목을 킹핀(King pin)이라 부릅니다. 가장 중심에 있는 킹핀만 제거하면 다른 나무들이 잘 떠내려갑니다. 인생도 여러 가지 문제로 얽히고 풀려지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건강 문제, 경제적 문제, 자녀 문제, 직장 문제 등 한 두 개가 아닙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얽힌 문제라도, 힘든 문제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면 풀어집니다. 기도가 킹핀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인생의 킹핀 임을 믿고 하나님 앞에 바로 구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51절입니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바디매오에게 물으시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어쩌면 당연한 것을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믿음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바로 구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중요한 고백입니다. 자신을 볼 수 있게 할 능력이 예수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 고백으로 불쌍히 여김받는 긍휼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축복의 선언을 하십니다. 본문 5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바디매오는 눈만 뜬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눈이 밝아지면 죄악의 생활에서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온전한 회복의 역사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는 불쌍히 여김은 동정심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심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긍휼과 불쌍히 여기심의 은혜를 얻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환경을 이겨냄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바로 구하는 기도의 삶으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통해 삶의 힘든 문제들을 해결함 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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