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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요 5: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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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요 5:39~44)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생명을 얻으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너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는 나를 영접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영접할 것이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구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 공부, 연구

예수님은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징표라는 말일 겁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굳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명시적으로 알리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헤롯의 별궁인 마케루스 산성에 갇혀 있던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주님은 가타부타 말씀하시지 않고 당신이 계신 곳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회복을 가리키십니다.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마11:5) 요한복음은 이것을 좀 더 명료하게 해석해줍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여 준다”(요5:36b). 나의 자기 진술이 아니라, 나의 삶이 곧 나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그런 자명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특히 지도자연하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눈이 뭔가로 가리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을 가린 것은 무엇일까요? 율법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하나님에 대해서는 내가 전문가라는 헛된 자부심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그들이 율법 공부에 열정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율법 공부에 열심을 내는 까닭은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의 열정은 오히려 칭찬받을만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늘 미래에 속한 것이었고, 추상적인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들 눈앞에 있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남루한 한 사내가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구원자라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헛공부를 하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온 몸으로 추구하기보다는, 관념적으로 추구했고, 진리를 체현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학식 있는 사람으로 칭송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학문을 배운다는 뜻의 ‘工夫’라는 단어는 구성이 좀 특이합니다. 장인(artisan) ‘工’에 사내 혹은 일하는 남자를 뜻하는 ‘夫’ 자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왠지 학문하고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조합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는 상당히 심오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공부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그리고 전 존재로 하는 것임을 이 단어는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경 공부도 머리가 아닌 몸으로 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될 때 위선적인 태도가 나옵니다. 옛 사람들은 마음공부는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去人欲), ‘하늘의 뜻과 하나 되기 위해 애쓰는 것’(存天理)이라고 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는 현생인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피엔스 곧 ‘슬기롭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붙일 정도로 우리가 슬기로운지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피엔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뿌리는 ‘sapere’인데 ‘맛보다’라는 뜻입니다. 누가 지혜로운 자입니까? 삶의 진수를 맛보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삶의 진수를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삶의 진수 곧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 성경의 심장

지금 우리는 예수 정신에 투철하게 살고 있는지요? 예수님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삼고 살고 있는지요? 예수 정신의 진미를 맛보며 살고 있는지요? 스스로를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로 인식하면서,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그분을 조금이나마 닮았는지요? 우리도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요4:34b)라고 고백할 수 있는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삶과 희생에 대해 감사하고 경탄하면서도, ‘나를 따르라’는 부름은 못 들은 체하고 삽니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서 우리는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주님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핵심, 곧 심장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모든 존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보았고, 그분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까닭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살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앎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물론 앎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은 힘겹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아버지께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난감해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마11:29)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려면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합니다. 배우는 자에게 꼭 필요한 자질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란 온화하고 유순한 태도를 이르는 말이고, 겸손이란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가리킵니다만, 성경이 말하는 온유와 겸손함은 이런 태도와는 조금 구별됩니다. 

온유함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속에 받아들여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바꿔내는 힘이고, 겸손은 자기 마음속에 일고 있는 온갖 감정적 장애를 넘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가닿으려는 마음의 지향을 뜻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도, 성경을 묵상하는 것도, 예배에 참여하는 것도, 봉사활동에 헌신하는 것도 결국 그 마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마음에 가닿게 될 때 우리는 입장이 분명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우리 뜻을 자꾸 복종시킬 때 우리는 일어선 사람이 됩니다. 구부러진 데 없이 올곧게 선 마음이 正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곧게 선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곧게 선 기둥은 아무리 무거운 것이 얹혀도 지탱해냅니다. 기둥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지붕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교회는 기둥이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다른 것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영광을 주고받는 사람들

세상은 우리에게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커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온통 자기 몸집을 불리려는 이들의 경쟁으로 인해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무한 경쟁’이라는 살벌한 말이 사람들의 의식을 옥죄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은 살만한 세상이 아닙니다. 내가 더 잘 살기 위해 다른 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까지 빼앗아다 쓰는 것이 진짜 발전인가요? 다른 이를 배려하지 않는 삶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삶의 우주적 차원을 잃어버리고 사는 이들이 아닙니까? 온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아닙니까? 물질은 풍족한 데 정신이 빈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짐승이 되어 삽니다. 히브리인들은 우주의 비의에 접하고 사는 사람들의 생의 모습을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19:1-4a)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시36:5-6)

예수님은 당시의 지도자들이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고 책망하십니다. ‘영광’이라는 말을 ‘인정’이라고 한번 바꾸어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삶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누군가의 인정을 구합니다. 인정을 구하는 순간 인정을 바라는 그 대상에게 예속되고 맙니다. 정신적 자유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의 영광 혹은 인정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든든히 선 사람들은 누가 인정해주든 말든 묵묵하게 자기의 길을 갑니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안달하지도 않고, 알아준다고 희희낙락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인정을 구하는 이들의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마치 수술 칼을 들이대듯 그들 삶의 환부를 도려내십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42) 어떤 정상참작도 위로도 합리화를 위한 여지도 주지 않는 단호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둔중한 아픔이 되어 다가옵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합니다. 우리 삶이 우리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난주에도 이용도 목사님의 기도를 통해 비슷한 심정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이제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좀비’(zombie)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아이티의 부두교 의식에서 유래된 살아있는 시체를 이르는 말이라 합니다. 영혼은 없는 데 몸만 있는 존재처럼 위험한 게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외람되지만 저는 오늘의 교회 가운데는 좀비가 없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두리번거릴 것 없습니다. 우리 자신부터 예수의 혼에 지펴 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예수 정신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위로 하늘이 열려 있는지는 지금 이곳에서의 우리 삶에서 드러납니다. 가치관이 혼돈된 시대에 교회는 평화와 희망이 숨 쉬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제 책상 앞에는 안드레이 류블로프의 이콘 <성 삼위일체>가 놓여 있습니다. 탁자를 앞에 두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삼각형을 이루며 앉아 계신 그림입니다. 그 이콘 앞에 “증오와 폭력이 더 이상 우리를 파멸시킬 수 없는 장소에 대한 상징”이라 적어두었습니다. 이 문장은 안드레이 류블로프의 생을 영화로 만들었던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관계를 지배할 때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 누구를 영접하고 사는가

주님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는 나를 영접하지 않는다”고 탄식하듯 말씀하십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그를 향하여 나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를 등진 채 영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자꾸만 그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지금 누구를 향해 기울어져 있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산에 올라갔다가 너럭바위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자기 앞으로 벌레 한 마리가 기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뭇가지를 가지고 벌레를 다른 쪽으로 돌려놓았더니, 벌레는 잠시 어리둥절해져 이리저리 헤매더니 원래의 방향으로 다시 오더랍니다. 몇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지만 벌레는 자기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을 겪으며 그 목사님은 ‘생리’는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를 만나 생리가 바뀐 사람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고후13:8)

무서운 말입니다. 누가 이런 사람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영접한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그리스도인다운 원칙을 지키며 삽니다. 유/불리를 따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고집과는 다른 것입니다. 원칙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광야에서 사탄에게 받았던 예수님의 시험 이야기는 삶의 원칙을 세우기 위한 고투를 보여줍니다.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마음의 가난을 지향하고,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순간들을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신앙생활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공동체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자주 사용하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언제나 그 시대가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새로운 세계, 대안적 세계를 이루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합니다. 

종교전문기자인 조현 기자가 쓴 <<울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 정신에 사로잡혀 살았던 24명의 한국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읽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까닭은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정신으로 변화된 이들 곁에는 마치 향기에 끌리듯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새로운 세상의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풀무학교를 세웠던 밝맑 이찬갑 선생님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인들이 바친 조사 한 대목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연구실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교단에서 진리를 갈파하시는 기라성 같은 박사님들. 그 박사님들 숲 속에서 아무도 흩어진 쇠똥을 주워 보호하는 분 없고, 세상에 낙오되어 말라빠진 삭정이를 줍는 교수 없으며, 민족에 상처를 줄 유리조각을 주워 파묻는 선생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버림받은 쇠똥, 말라비틀어진 삭정이는 어디로 가야 하고 살기 띤 유리조각은 누가 주워 구덩이에 묻겠습니까?”(조현, <<울림>>, 166-7쪽)

이찬갑 선생은 쇠똥 같은 사람들, 말라빠진 삭정이 같은 사람들, 살기 띤 유리조각 같은 사람들 하나하나를 거두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시킨 분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그의 가슴에 불어오자 그는 하늘 군대가 되었고, 그가 접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 하늘의 생기를 나누어주는 이가 되었습니다. 이게 기독교인의 실존이고, 기독교인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복입니다. 깊어가는 이 계절, 사람의 영광을 구하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으로 방향 전환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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