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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원천의 감사 (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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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의 감사 (살전 5:16~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감사의 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11월은 추수감사의 계절이고 감사절기의 달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가장 좋은 마음이고 복을 받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더 좋은 감사를 불러오고 결국에는 기적을 불러옵니다. 사람들은 감사하기 보다는 불평하고 불만하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삶의 현장을 오염시키고 삶이 삭막해지는 것입니다. 철없고 생각 없는 사람이 늘 불평하고 불만하고 원망하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본문에서는 감사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말은 감사의 삶을 살되 반드시 좋은 일에만 감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좋은 일에만 감사를 합니다. 시간을 좀 두고 살아보면 오늘의 좋은 일이 반드시 내일까지 좋은 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실패와 불행이 내일에 무슨 일로 연결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했습니다. “새옹지마”라는 말은 “득과 실”이라는 말입니다. 한때 득이 후에 해가될 수 있고 지금의 해가 후에는 득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에디슨은 귀머거리였습니다. 그것은 분명 그에게 불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는 그 해로 인하여 발명왕이 됩니다. 

밀턴은 말년에 눈이 어두워지는 불운을 겪었는데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 유명한 실낙원을 쓰는 계기가 됩니다. 작가 스티븐슨은 결핵 말기의 고통 때문에 고생하였지만 그 병으로 인하여 그는 보물섬이라는 명작을 쓰게 됩니다. 파스칼은 청년시절부터 그를 괴롭힌 온 몸의 통증 때문에 팡세를 완성하게 됩니다. 베토벤은 청각장애 때문에 고통을 이기는 동안 명곡들을 작곡해 냅니다. 

헨델은 그 장엄한 메시야곡을 열병으로 2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한 생활을 하는 동안 영감을 얻어 작품을 완성합니다. 조개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몸속에 모래가 들어왔습니다. 속살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겠습니다. 그러나 그 조개는 그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 그 안에서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감사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타납니다. 신앙의 삶은 감사의 삶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래서 감사는 기적을 불러옵니다. 더 좋은 감사를 불러옵니다. 삶을 밝고 따뜻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감사생활이 주는 열매입니다.  

 감사절의 기원을 보면 구약시대의 3대 절기 즉 유월절과 맥추절과 장막절에서 비롯됩니다. 3대 절기의 정신은 “감사”입니다. 지난날에 감사하고 오늘에 감사하고 미래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국가에 감사합니다. 확실히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불러옵니다. 감사는 인생의 깊음과 성숙함을 나타내는 삶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의 원천의 감사를 읽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감사의 사람입니다. 감사도 원천의 감사입니다. 성경에 보면 몇 가지 원천의 감사가 있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음의 감사 

바울은 로마서8장2절에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됨을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감사가 원천의 감사입니다. 죄로부터 해방과 구원받음은 감사 중 최고의 감사의 조건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죄로부터 해방되고 자유함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옥은 사람을 묶어놓고 자유를 유보하기 때문에 감옥입니다. 그 보다 더 큰 감옥은 죄의 삶을 사는 창살 없는 감옥입니다. 죄는 사람을 사정없이 얽어맵니다. 그래서 죄인은 누가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도망하고 피하고 숨습니다. 얼마나 큰 구속입니까. 바울은 그 죄로부터 해방과 자유함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원천의 감사입니다. 

사망에서 승리함의 감사 

고린도전서15장57절에서 바울은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죽음에서 해방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단어조차 어둡고 두려운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암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탄식하고 두려워하고 눈물을 흘리고 몸부림을 칩니다. 마틴 하이덱거는 죽음의 5가지 특징을 말했습니다. 가장 정확한 사건, 아무도 때를 모름, 가장 큰 비극, 단 1회적 사건으로 반복이 없고, 개인적이고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문제를 예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완벽하게 해결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그렇게 부활한다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죽음에서 해방 받은 것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직분 주심의 감사 

디모데전서1장12절을 보면 “내가 주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간서 첫 머리에서는 언제나 “주께로부터 부름 받아 사도된 나 바울”이라고 적었습니다. 사도직에 대해서 바울처럼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사람도 없습니다. 그 직분이 왜 소중하냐 하면 하늘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전 미국대통령 지미 카터는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모든 직함을 내려놓고 교회 교사직만은 고수했다고 전해집니다. 왜냐하면 그 교사직이 하늘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선교사 리빙스턴은 “하나님께 주신 직분을 이루는데 사명을 다할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 직분주신 것에 대해서 늘 감격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직분에 대해서 너무 의미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약함의 감사 

바울은 고린도후서11장30절에서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건강도 감사의 조건입니다. 성공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약함도 감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반드시 건강과 성공만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실패가 내일 어떤 결과가 주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은 너무 눈에 보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섭리의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몸에 병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는 그 병을 가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고쳐주지 않으시고 그대로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로 그는 다시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부족한 자리에서, 병중의 자리에서 감사할 수 있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우리는 너무 넉넉함에 감사하는데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부족해도 불평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넉넉해져도 감사를 모르게 됩니다. 어린아이 수준입니다. “나의 약함을 자랑하노라.” 이것은 원천의 감사입니다.     


범사의 감사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의 감사는 가장 성숙한 감사를 말합니다. “범사”를 영어로 “all things”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en panti”입니다. 우리말로는 “어느 경우에도”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생존하고 있음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음 그 자체가 감사할 일입니다. 살아있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는 것도 복입니다. 내가 200년을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적당할 때 죽을 수 있는 것도 복이고 은총입니다. 죽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또 기쁘고 좋은 일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오는 동안 기쁜 일과 즐거운 일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 아이를 낳고 진학하고 직장을 얻고 건강하게 살아왔고 좋은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고 신앙의 삶을 유지하고 살고 있음은 모두 감사할 조건들입니다. 그런데 한해를 살아오는 동안 이런 감사한 일만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역경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금년 년 초에 경제 한파가 다시 예고되면서 년 초에 우리국민들이 얼마나 당황했습니까. 모두 또 다시 지난날의 어려움을 예상하고 나라가 망하는 줄 알고 걱정하였는데 시간이 지난 오늘 생각해 보니 그것도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경에도 감사할 일입니다. 

지난 봄에 미국 LA지역에 큰 불이 발생하여 2천여 집이 불에 탔습니다. 여러 한인들 집도 불탔습니다. 그런 재앙 속에서도 소망적인 두 사례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흐뭇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노인부부의 집이 다 불났습니다. 그것은 분명 그 노부부에게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부부는 지금 한창 불타고 있는 집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서 “이 재난에서 우리 노부부의 생명을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였다는 소식이 모두에게 알려졌습니다. 말하자면 그 감사가 원천의 감사입니다. 

또 다른 사례는 우리 한인 집이 불에 탔습니다. 그것도 분명내 집에는 큰 재앙입니다. 그때 그 가정의 고교생 아들이 자기 집이 불타고 있음에도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불조심하라고 외치고 다녀 인명피해를 크게 줄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학생이 대학 수능시험을 치를 때 그 사례를 썼는데 그 점이 인정받아 그 학생이 전체 장학생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역경에서의 감사가 결국 이 같은 기적을 일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가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역경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어려움이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그 고난이 더 커집니다. 그리고 낙심도 더 커집니다. 들어보면 그런 애로들이 다 있습니다. 목사님에게 상담 요청자가 10명이나 신청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같은 시간에 모두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일 목사님은 바쁜 일이 생겨 시청에 갔다 올 테니 함께 이야기 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어 시간 후에 와 보니 한사람만 남아 있었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듣더니 모두 자기 처지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집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남아 있느냐”니까 “나는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남아 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괜히 혼자 큰일 난 것처럼 야단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감사는 좋은 조건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한계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미국 LA 엔젤스 야구팀 투수가 짐 아보트(Jim Abbort)인데 그는 출생할 때 오른 손이 없는 기형아로 태어났습니다. 왼손 하나로 야구선수 투수가 되어 시속 94마일(150km)을 던집니다. 서울 올림픽 때 와서 던져 미국팀에 금메달을 안겨준 주역입니다. 인터뷰할 때 그는 “세상은 내일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매일 발생하는 작은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다음 기회의 교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내가 손 하나 없다는데 대해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해 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를 보면 2차 대전 때 헤롤드 럿셀이라는 공수부대원이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고 졸지에 불구자가 되어 좌절 빠져 “나는 이제 쓸모없는 고깃덩어리구나”하고 자책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 차츰 깨닫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잃은 것 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의수를 하고 글을 쓰기 위해서 타이프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삶을 영화화해서 그는 직접 출연하여 마침내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습니다. 상금을 상이용사를 위해 기부하는 그에게 기자가 “당신의 신체적인 조건이 당신을 절망하게 하지 않았는가”고 물을 때 “아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축복이 되었다,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것을 사용할 때 잃은 것의 열배를 보상받게 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참으로 눈물겨운 고백입니다. 

청교도들이 1620년 102명이 무작정 배를 타고 미지의 땅으로 항해하여 마침내 오늘의 미국 땅에 도착합니다. 그해 겨울 102명중 44명이 죽는 큰 불행을 겪습니다. 자유롭게 신앙생활하며 살아보자고 떠났는데 도중에 3/1이 죽었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농사를 지어 첫 곡식을 거둬 음식을 만들어 놓고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 오늘 추수감사의 예배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 조상들은 프리마우스 지역 언덕에서 예배드리고 그 언덕에 세운 비문에 “너희 조상들이 어려움 가운데 성취한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하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오늘은 감사를 잊은 시대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의 교부인 크리소스돔은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없이 살아가는 삶이 저주받은 삶입니다. 내촌감삼은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죽음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배신당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성경을 읽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도록 막힌 귀로, 감사가 없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풍요로운 때를 살면서도 모두 감사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넘치는 시대인데 그 넘치는 의미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삶에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멕시코의 어떤 마을에 냉탕 온탕 나오는 샘이 있는데 그곳에서 아낙네들이 빨래를 합니다. 온탕에서 빨래하고 냉탕에서 헹굽니다. 관광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참 좋겠다”고 하자 “왜요”라고 반문합니다. “냉온탕에서 빨래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하자 “천만에요, 감사하기보다 아쉬워요, 비누물이 나오지 않잖아요”하고 반문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에서 근본이 안 풀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 없이 살면 이렇게 됩니다.  

 본문 말씀에서 감사의 차원 즉 원천의 감사를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뜻입니다. 조건이나 환경이나 성공을 떠나서 그것과 상관없이 어느 때나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원천의 감사입니다. 오늘의 행복이 내일 또 행복으로 열매 맺지 않습니다. 오늘의 불행이 내일 또 다시 불행의 연속으로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감사를 해 보며 살아가십시다.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내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들도 이 원천의 감사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없는 어느 목사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감사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 머리에 머리카락이 없는 것을 흉보지만 생각하면 내 머리가 대머리 된 것이 무척이나 감사하다, 하나는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날마다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셔서 머리가 다 빠질 정도가 되었으니 나는 행운아가 아닌가, 둘째는 머리를 감을 때마다 비누와 샴푸와 물을 상당량 줄일 수 있으니 물자절약해서 얼마나 좋은가, 셋째는 하나님이 날마다 내 머리를 세실 텐데 하나님의 수고를 덜어 드려서 좋지 아니한가.” 

우리들이 눈을 조금만 크게 뜨고 내 주위를 살펴보면 얼마든지 이렇게 성숙한 감사를 외칠 수 있습니다. 이런 감사로 여러분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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