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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순(筍), 룻 (룻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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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순(筍), 룻 (룻 1:8~18)


지난주일, 이방인의 땅 모압 지방에서 실패한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동기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실패한 ‘나오미’의 회개보다 더 앞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권고하심 때문입니다[하나님의 ‘파카드’(פקד, 권고하심) 때문에 나오미가 ‘슈브’(שׁוב, 뉘우치고, 돌아왔다)했음]. 

그러면 본문 룻 1, 8이하 말씀은 무엇을 말합니까? 나오미의 베들레헴 귀환과정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절반의 실패, 절반의 성공이라 해야 할까요? 혹 실패하였을 때 하나님의 권고하심 때문에, 우리가 회복이 된다하여도 회복 과정에서, 얼마든지 여러 가지 변수가 또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은, 人格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패의 자리에서 회복시킬 때에도, 마치 컴퓨터가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작동되듯이, 기계적으로 다루지 않으신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나오미 가정을 유념해 보십시오. 시어머니 ‘나오미’와 모압 여인인 두 며느리(맏며느리 ‘룻’과 둘째 며느리는 ‘오르바’)가 있습니다. 세 여인은, 지금 모압 지방을 함께 떠나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 에브랏’으로 귀환 중에 있습니다. 물론, 이 세 여인들, 겉으로 보기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 세 여인들 모두, 내면적으로는 권고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각각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임을 봅니다. 
본문을 가만 보면, 문제의 핵심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의 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 여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한 문제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시어머니 나오미의 불완전한 믿음이 너무 너무 아쉽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누구나 다 믿음이 좋은 건 아닙니다. 불완전한 믿음 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믿음을 보면, 참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 속이 다 傷합니다. 나오미가 살아왔던 사사시대 자체가, 믿음이 매우 불완전한 시대라는 걸 감안한다 해도, 참 속상합니다. 그 시대는, 사람마다 자기 所見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나오미’ 역시, 그 시대의 관습, 문화, 신앙습관을 알게 모르게 배우고 물이 든 것이지요. 

백번 양보한다하여도 ‘나오미’의 불완전한 믿음은, 그 중요한 회복의 시기에, 가족의 생사가 걸려 있고, 成敗가 달려 있는 그 중요한 때, 아쉽기 짝이 없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두 며느리들의 운명을 희망과 구원보다는, 자신의 과거 실패와 같이, 또 다른 실패와 죽음의 자리로 내몰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또 다시 자신이 경험했던 실패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경험한 것이, 그것 밖에 없다 하여도, 조금 더 숙고해야 했습니다. 그의 불완전한 믿음 때문에, 며느리들을 또 다시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어찌 될 말입니까?

7, 8말씀 보십시오(새번역). “나오미가 살던 곳을 떠날 때에, 두 며느리도 함께 떠났다. 그들은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섰다.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추측컨대, 지금 세 여인은 유다 땅이 눈앞에 보이는 모압 경계선까지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낯익은 고향 땅 베들레헴 에브랏으로 통하는 大路에 다다르자,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하지요)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님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빈다. 너희가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하고는 나오미가 두 며느리들과 작별하려고 입을 맞추자, 며느리들이 큰 소리로 통곡하였다는 이야깁니다(기가 찹니다).

며느리들에게 각자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입장,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적으로 보자면, 百番 至當한 말씀입니다. 나오미의 입장에서 보자면, 異國 땅 모압 지방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난 10여 년 생활을 돌아보면서, 왜 만류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 나라에 가서 산다한들 그들 역시 타국인 아닙니까? 이방인입니다. 어찌 그 사는 것이 쉽겠습니까? 자신의 과거 전철을 밟을 것이 불을 보듯 한 일인데, 그 고생을 어찌 며느리들에게 두 번 다시 시키고 싶었겠습니까? 차라리, 이쯤해서 떨어져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자 며느리들이 통곡하면서 말합니다(룻 1, 10-13).

아닙니다. 우리도 어머님과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그러나 나오미가 말합니다.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아직 내 뱃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너희의 남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냐?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제발 돌아가거라. 재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 설령, 나에게 어떤 희망이 있다거나, 오늘 밤 내가 남편을 맞아들여 아들들을 낳게 된다거나 하더라도, 너희가 그것들이 클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 그때까지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들 지내겠다는 말이냐? 아서라. 내 딸들아, 너희들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구나.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

그러자, 이번에도 며느리들의 또 다시 소리 높여 목 놓아 웁니다. 한바탕 울기를 다하자, 나오미 가정에 주어진 희망 빛 속에 또다시,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가 덮이고 맙니다. 이게 웬 일입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둘째 며느리 ‘오르바’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는 떠나버립니다. 나오미의 권면과 오르바의 선택, 그냥 이대로 좋습니까? 여러분도, ‘나오미’였다면 그리하셨겠습니까? 여러분도, ‘오르바’였다면 그리하셨겠습니까? 

나오미가 모압에서 그렇게 철저하게 실패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권고하심을 받았다면, 좀 더 深重하게 처신해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비록 빈손 귀환이지만, 두 며느리의 미래와 삶을, 신실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기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실패한 자신의 과거의 삶을 기준삼아서, 두 며느리들의 가나안 땅에서의 새로운 未來를, 왜 부정적으로만 보아야 하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같으셔도 그리하셨겠습니까? ‘불완전한 나오미의 믿음’을 직시하십시다. 

김소월 선생님의 시 중, ‘진달래꽃’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립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이 시에는, 복수심을 건강하게 연소시키는 카타르시스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미운 놈 떡 하다 더 준다”는 말이 있듯이, 떠나가는 님은, 가는 길에 뿌려진 아름 진달래꽃을 보면서, 비록 그것이 복수라는 것을 미쳐 눈치 채지는 못하겠지만, 그 길에는 잔인한 복수심이 깔려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합니다. 이와 같은 김소월 선생의 시정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김소월 선생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란 成長痛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다보니, 그는 늘 슬픔과 한이 많은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울한 기질을 넘어서기가 어렵지 않았겠습니까? 33세에 요절한 그의 작품세계에, 이별이라는 주제가 유독 많은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요?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믿음의 병이 있습니다. 우리 삶의 문제를, 자기 인생의 경험의 범주 안에서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삶의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예수님 안에서, 보지 못합니다. 모압에서 실패한 경험에 근거한 나오미의 불완전한 믿음이, 하나님께서 비춰주시는 희망의 曙光을 가리고 만 것입니다. 밝아오는 하나님의 曙光은, 온전한 빛 아닙니까? 山上垂訓의 예수님 말씀 기억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 해를, 惡人과 善人에게 비추시며, 비를 義로운 자와 不義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 45). 

하나님의 자비, 은총, 구원, 긍휼하심은, 이방 여인인 모압 여인, 두 며느리들에게도,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나오미 자신에게도 동일하십니다. 나오미는 그걸 몰랐던 겁니다. 유다 베들레헴 사람이었던 자신이 모압 지방에서 이방인이었던 것처럼, 모압 여인들인 두 며느리들 역시, 유다 땅에서는 이방인 취급 받을 것만 생각했던 것이지요. 불완전한 믿음의 소치입니다.

나오미의 불완전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천국의 그물로 사용! 

마태복음 13, 47이하의 예수님의 천국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그물이 가득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내버린다. 세상 끝 날에도 이렇게 할 것이다”하셨습니다(마 13, 47-50). 나오미 가정 보십시오. 하나님은 비록, 믿음이 불완전한 나오미였지만, 하나님은 그와 그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고기를 잡아 올리는 그물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나오미의 두 며느리 중,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불행하게도 그만 믿음 없는 시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맙니다. 자신의 실패를 교훈삼아서, 돌아가라고 권면하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는, 통곡하고는 결국 어머니 곁을 떠나버립니다. 성경은, 그때 오르바의 선택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두 번이나 큰 소리로 통곡한 후, 마침내 시어머니에게 입맞추면서 작별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그 떠남의 의미는 결국 무엇입니까? 15 말씀을 보면, “그의 백성(모압)과 그의 신들(그모스, 바알브올)에게로 돌아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나오미가, 어찌 그것을 권면이라고 합니까? 말도 안 됩니다.

결국 이런 이야깁니다. 하나님이 던지신 ‘나오미표 天國 그물’에 두 종류의 고기가 걸려들었는데 하나는 ‘룻’이고 다른 하나는 ‘오르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두 고기 中, ‘오르바’라는 고기는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살펴보니 ‘나쁜 고기’여서 내다버릴 수밖에 없는 고기였다는 겁니다. 반면에 맏며느리 ‘룻’은 좋은 고기였다는 이야깁니다. 너무나 대조적입니다(14절이, 증언합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울었다. 마침내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추면서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그러나 룻은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붙었다(‘달라붙었다’, (히) ‘다바크’인데 ‘붙들고 늘어졌다’).” 

그물 안에 걸려든 고기라고 해서, 다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물 안에 걸려든 고기라할지라도, 나쁜 고기는 다시 버려지고 맙니다. 오르바가 그런 인물입니다. 우리는 ‘오르바’ 같이 하지 말고 ‘룻’과 같이 끝까지 하나님 섬기는 어머니 ‘나오미’를 붙좇는 믿음과 지혜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룻’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조명해보아야….

‘룻’은 비유하지면 쓰레기 더미에서 핀 장미꽃과 같은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나오미 가정이 모압 지방에서 실패하여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을 때, 나오미 가정이라는 그물에 걸려든 고기 룻이라는 모압 여인을 새 역사의 筍으로 택하셨습니다. 좁게 보면, 룻은 다 기울어진 나오미 가정을 회복시키는 새 筍입니다. 넓게 보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하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나라,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일으키는 새 筍입니다. 

모압이라는 나라의 태생이 어떤 지, 아시지요? 소돔 고모라가 멸망할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큰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모압’인데, 그가 모압의 조상입니다. 특히,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귀환할 때, 가나안에 이르는 중요한 길목을 막아섰던 민족입니다(민 21, 22장). 그 사건으로,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정죄 받은 나라, 민족입니다(신 23, 3-6).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북한 김정일 정권과 체제가,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삼은 우리나라와 하나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북한인민이라 하여도,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우리 국민이 되려고 이 땅에 들어온 ‘새터민’들에게는 대한민국국민의 자격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異邦人의 땅에도, 숨겨진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룻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욥이라는 인물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우스 땅 사람입니다. 그러나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열 자녀들이 있었고, 엄청난 재산가요(대기업가), 東方 사람 中에 가장 훌륭한 자”(욥 1, 1-3). 

우스 땅은, ‘에돔 지경’의 땅을 말합니다. 에돔 사람들이 누굽니까? 이삭의 장자요, 야곱의 형이었던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말하자면 욥은, 에서의 혈통에 속한 사람이라는 거지요(애 4, 21; 말 1, 2). 에서는, 혈통적으로는 長子였지만 영적으로 보면 서자취급 받은 인물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異邦人입니다. 에서의 후손인 욥 역시, 이방인 취급 받는 것,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욥’을 가리켜서 어떻게 증언합니까?

욥은 비록, 이방인의 땅에서, 버려진 뿌리에서 돋아난 싹이었지만 영적인 巨木이라는 겁니다. 이방인의 밭에 숨겨져 있던 보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룬,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인물이라는 겁니다. 모압 여인, ‘룻’이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그의 신앙을 보십시오(룻 1, 16-17, 새번역).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비록 나오미 가정은 모압에서 실패하였지만, 그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영적인 巨木, 異邦女人 ‘룻’을 찾아내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온전하게 의뢰하는, 나오미보다 더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십시다. 하나님이 찾아내신 룻과 같은 영적인 거목이 되십시다. 하나님 나라의 ‘새 筍’이 되십시다.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나오미처럼, 불완전한 믿음 때문에, 지나간 과거의 실패에 얽매여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제한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다 하나님 나라의 그물에 걸린 자들입니다. 오르바처럼, 그물에 걸렸다가 다시 버림당하는 나쁜 고기가 되지 않게 하시고, ‘룻’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새 筍과 같은 靈的인 巨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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