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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경 바디매오의 인생역전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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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바디매오의 인생역전 (막 10:46~52)
 

유대인의 삼대 절기 중 하나인 유월절을 며칠 앞둔 때였습니다. 절기가 되면, 유대에 사는 성인 남자들은 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키게 되어 있었으므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 여리고의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려고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먼 거리도 주로 걸어서 다녔습니다. 길을 가다가 해가 지면 주막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 이번 예루살렘 행은 예전과는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33)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막 1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번에 예수님께서 왕위에 등극하시는 줄로 알고는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과 제자들은 여리고에 당도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여리고를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라 이름하는 세리장을 만나서 그의 집에 하루를 유숙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뉘 것을 강탈한 것이 있으면 사 배 갚아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신 시점에도 방황하는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증언하는 대로, 그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또 한 사람을 만나 새 삶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때가 몇 시쯤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라고 한 것을 보면 늦어도 정오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30킬로를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평지가 아닌 경사로를 걸어서 가려면 족히 한나절은 걸릴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해지기 전에 예루살렘에 당도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허다한 무리가 함께 밀물처럼 여리고 거리를 지나가는 마당에, 유독 혼자서 길가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디매오였는데, 소경에다 거지였습니다. 그는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갈 형편이 못되었나 봅니다. 그 대신, 사람들이 붐비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했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바디매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마침 그 때 바디매오는 누군가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바디매오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는 즉시로 소리 질러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보고 꾸짖었습니다. “잠잠하라!” “왜 시끄럽게 고함을 치고 그러느냐?”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쳤습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경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즉시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서셔서 “저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소경을 부르며 말하기를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그 말을 듣고서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났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지만 팔을 내밀고 더듬으면서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하시니, 소경이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하여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자연인은 누구나 영적인 소경입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의 실상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합니다.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들이 겁 없이 악을 행하는 것은 그들의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주 삼라만상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이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 앞에 절하며 섬깁니다. 육신의 눈은 밝아서 사물을 밝히 보고 분별하지만 마음눈이 소경이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캄캄절벽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세계만 보는 것이지, 신령한 영적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 만드신 만물에 나타내 보이셨지만 마음눈이 소경이 되어서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아무 것도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바쳐야 할 영광을 우상들에게 바칩니다. 해와 별과 달과 같은 자연물을 숭배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영웅이나 조상의 혼령을 숭배하는 자들도 있으며, 또는 자기도취에 빠져서 자신을 섬기는 자들도 있습니다. 

과학을 만능으로 아는 생각 역시 과학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입니다. 돈이면 무엇이나 다 되는 줄로 아는 것은 황금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또는 무슨 사상이나 이념을 신처럼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음눈이 소경된 자들은 우상 앞에서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합니다(사 2:9). 

마음눈이 소경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신에 하찮은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 이르기를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세상 사람들은 한 평생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그런가하면, 힘을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정치권력을 쥔 사람들, 금력을 쥔 사람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마음눈이 밝아진 성도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8)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고 하셨습니다. 

마음눈이 소경된 사람들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할 줄 모르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자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마음눈을 뜬 성도들은 상천하지에 두려워해야 할 분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잘 알기 때문에 담대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음눈이 소경인 사람들은 영적 세계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이 세계는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감지할 수 있는 물질계가 전부가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 세계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보면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세계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세계는 분명히 존재하며, 거듭난 성도들에게 그 문이 열려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던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셨습니다. 하나는 거듭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전자는 성령으로 난 사람이고, 후자는 육으로 난 사람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늘의 일을 말해 주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가며 하늘의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눈이 소경된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어느 부자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그 해 많은 소출을 거둔 부자는 창고가 좁아서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자,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그의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둘 계획을 세웠습니다. 또 그는 자기 영혼에게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부자의 계획을 아시고 그의 영혼을 불러 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매일 같이 거리에 나가 앉아서 구걸해서 그날그날을 연명하기에 급급하였고, 주님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영농을 해서 큰돈을 벌어서 편안하고 넉넉한 가운데서 인생을 즐기면서 살았다는 것이 다를 뿐이지, 둘 다 이 땅에서 잘 살고자 하는 인생의 목적은 같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자를 보시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차원 높은 영의 세계를 볼 수 없으니 어리석은 삶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 소경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은 우리에게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다고 증언합니다. 바디매오는 그 때까지 예수님을 만나 뵌 적이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가 누구신지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그 같은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가 비록 앞을 못 보는 소경으로서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였지만, 나사렛 예수에 관하여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지체하지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10장 17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려면 먼저 예수님에 대하여 들어야 합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일단 예수님에 대하여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인지, 그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믿은 우리가 불신 이웃에게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시간에도 수십만 명의 선교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부지런히 전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복음이 너무 흔해서 귀한 줄을 모르고,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말해 주면 “또 그 이야기냐?“고 반문합니다. 

그릇된 선입견을 가진 사람에게 복음은 흘러간 옛 노래처럼 들릴 것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절대로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역경과 시련의 방망이로 인생들의 교만을 깨뜨리십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절망 중에서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어령 교수는 한국 지식인의 싱징이라고 할 만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는 인간의 이성을 신봉하던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에 대하여 비판하기를 “노아가 진짜 사랑이 있었다면 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다시는 하나님을 위해 양을 잡아주지 말자.” 고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사랑하는 딸의 불행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결혼한 딸이 두 차례나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데다 망막이 손상되어 거의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이어령 교수는 자기의 무능력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력을 회복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그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정말 네가 주 안에서 편안함을 얻었다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나의 무력이 증명된 것이 아니냐. 내가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았구나. 동행하자. 지금 자신은 없지만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이게 해 달라.”

드디어 그는 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으니 이제 그는 무신론자일 리가 만무합니다. 이처럼 인생의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바디매오가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 즉시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 것은 그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한두 번 들은 차원을 넘어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보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구세주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사무엘하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몸에서 날 자식을 일컬어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자손으로 날 사람 중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을 자가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사야서 35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시대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1)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4)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특히,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라고 한 예언은 소경 바디매오에게 다윗의 자손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대망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지 않는 가족과 이웃에게 자주 자주 예수님에 대하여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개의치 마시고 전하십시오. 전도는 우리가 말을 잘해서 성과를 거두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듣는 자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보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고 외쳤을 때, 예수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저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바디매오를 단지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우리의 지식이나 능력이나 배경을 보시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오직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 속에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십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면 주님의 긍휼을 받게 되지만, 믿음이 없다면 주님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행하시는 권능을 보고 놀랐으나, 곧 마음을 바꾸어서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가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이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이 중풍병에 걸린 자기 하인을 위해 주님께 나아와 간구했을 때, 주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백부장은 대답하기를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시고 백부장에게 이르시기를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주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매오를 부르신 것은 그의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시자 바디매오는 대답하기를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소경이 보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그 같이 구하지 못합니다. 바디매오는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할 수 있거든 보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고, 확신에 찬 어조로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이 시간, 성도님들께서 하나님을 예배하러 교회에 나오신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세상 재미를 바라기 때문에 교회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비록 겨자씨 한 알처럼 작을지라도 멸시치 않으시고 그 믿음을 귀히 여기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작은 믿음이지만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고 기도할 때 위대한 응답을 주십니다. 

네 번째로, 은혜 받은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52절에 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 눈을 보게 되었을 때, 다시 구걸하는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주님께 나아올 때 거지의 표시인 겉옷을 내어버렸습니다. 

간혹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은혜를 맛보고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알게 되고 나서 다시금 믿음을 배반하고 옛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해서 믿음을 저버리는 신자들을 보는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교회에 인도함을 받고 세례를 받아 입교인이 되고 직분도 받았지만, 주님께 대한 믿음이 식어져서 믿는 둥 마는 둥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신자들은 영적으로 볼 때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성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표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좇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계시록 14장 4절에 보면, 천상에서 새 노래를 부를 자의 자격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하셨습니다. 

방금 전까지 바디매오는 소경에다 거지였지만, 이제 주님을 만나 눈을 보게 되고나서는 당당하게 주님의 뒤를 좇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그 길이 구원의 길이요 영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하직하는 그 순간까지 변함없이 믿어야 받을 수 있지, 중도에서 주님을 배반하고 믿음을 저버리면 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라톤 선수가 결승점까지 완주해야지, 중간에서 그만 두면 탈락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막 13:13)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좇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또한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거지 소경 바디매오는 소망 없는 삶을 살았으나 주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어 주님을 좇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사회에는 로또에 당첨되어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또는 성실하게 일해서 인생역전을 달성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은 그럭저럭 한 세상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인생역전을 이룩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결국은 매 한 가지입니다.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생역전을 이룩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입니다. 그런즉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역전을 경험한 사람답게 영의 눈을 밝게 떠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그 날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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