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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은혜를 입은 자의 마땅한 감사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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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입은 자의 마땅한 감사 (눅 17:11~19)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정신적 질환의 공통적이고 근본적인 증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만>과 <원망>입니다. 수 만 가지의 정신적 질환 속에 살아갑니다만 그 대부분의 원인은 불만과 원망이라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에든지 불만스러워하며 그래서 불만스러워하다가 보면 그게 병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망하다가 하다가 보니까 어느 샌가 내가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중병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불만과 원망 이걸 이겨야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먼저 불만이라는 것은 어디로부터 오느냐 하면 자기 스스로 자기의 가치를 결정하려는 병적 심리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가 만족스럽지 못해서 그게 문제입니다. 흔히 우리가 경험하는 열등의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대부분의 열등의식은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의존한 자기인식에서 출발합니다. 

가령 내가 실제로 키가 작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아 유익한 면을 생각해 보면 참 많습니다. 택시 탈 때 편하죠, 땅바닥에 떨어진 물건 주울 때 편하죠, 옷 입을 때 편하죠, 양말 벗을 때 편하죠.... 키가 작아서 얼마나 유익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기 보다는 언제나 키가 작기 때문에 겪는 손해를 더 크게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불만이라는 것이 이렇게 지나친 자기 열등의식에서 비롯되는 불행입니다.

그 다음 또 하나의 불행적 증상은 원망입니다. 원망이란 책임전가적인 심리작용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잘못되면 스스로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고 항상 남에게 그 책임을 넘기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이건 억지입니다. 

얼마나 억지냐 하면 보세요. 내가 못사는 것은 남이 잘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실패한 것도 다른 사람이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건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증상입니다. 왜 나의 불행이 남의 행복 때문이라는 것입니까? 남이 내가 행복해야 할 것까지 다 빼앗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원망스럽다는 것인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불만>이 자기중심적 충족의 부족함에서 시작한다면 <원망>은 타인 중심적인 비교의식에서 출발 되는 것입니다. 쉬운 얘기로 <불만>은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절망하는 것이요, <원망>은 남의 사진을 보면서 느끼는 비교의식입니다. 결국 불만과 원망이 있다는 것은 나도 문제지만 남도 문젯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불만과 원망의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고는 어떤 여건에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 불만과 타인에 대한 원망이 있는 곳에 감사가 있을 수 없고 감사가 없는 곳에 행복이란 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생각은 늘 있어도 생각대로 안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끔씩은 그 안 되는 일에 매여서 되게 하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여간 안쓰럽지 않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나이를 먹은 뒤에 지나간 청년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때처럼 행복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건 불행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 흉내 내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쭈글쭈글한 얼굴이 보기 싫다고 아무리 <보톡스>를 맞고 <메이크업 베이스>를 하고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콤펙트>를 하고 <눈썹>을 그리고 <마스카라>를 하고 빨간 <루즈>를 발라 봐도 기분은 날지 모르지만 실상이 그렇지는 않거든요. 

자칫하면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늙어가는 것은 지극히 정상인데 이걸 막겠다고 하는 것은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해보겠노라고 안간힘을 쓰는데 이게 불행입니다. 

또 한 가지 안 되는 일을 부여잡고 미련을 두는 것이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일생동안 한탄하는 여자들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을 보니까 그런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 하는데 특히 남편이 속 썩일 때 같은 남자였더라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것입니다. 매일 맞고 살다보니까 악이 바쳤어요. 그래서 내가 남자였다면 저걸 그냥 콱...하고 실컷 패주었으면 속이 시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자로 태어나서 그리 못하는 게 불만입니다. 되지 않을 이런 고민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늙어가는 게 인간이라면 “내가 이렇게 곱게 늙어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할 것이요, 남자로 혹은 여자로 태어나서 “좋은 아내 만나고 좋은 남편 만나서 지금까지 잘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할 것입니다. 감사해야 할 자가 감사하지 않으면 자연히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감사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 감사란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요, 겸손에서 오는 것이며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이란 얼마나 감사하느냐에 있습니다. 믿음이 어느 정도냐, 인격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느 경우에, 어느 정도로 감사하느냐로 가름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문둥병자인 한 사마리아 사람이 나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이 사람이 주님의 은혜로 병에서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둥병자가 열 사람이었는데 모두가 고침을 받았지만 이 한사람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하고 다른 아홉 명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안타까운 말씀이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요? 이 더럽고 냄새나는 몸과 옷, 이 얼굴로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할 수 있겠는가? 씻고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만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감사에는 특별한 예의를 갖출 것도 없습니다. 먼저 고마운 마음이 생기면 “감사합니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감사하는 이 사람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너희 몸을 제사장들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시니 그 말씀을 순종하여 가다가 도중에 나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몸이 나은 것을 깨닫는 즉시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감사를 드립니다. 깨달음의 감사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즉각적이어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은혜 안에 살고, 은혜 안에 죽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감사도 모릅니다. 아는 사람, 나은 것을 알고, 나은 것을 보고, 깊이 깨닫는 그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되 특별히 즉시 감사해야합니다. 깨닫는 즉시 감사부터 해야 하는 것이요, 모든 것보다 최우선으로 감사부터 해야 됩니다. 

좀 더 큰일이 주어지면 그때 몰아서 감사 하겠다 이건 아닙니다. 나에게 이루어진 일이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감사란 <즉각적>이고 <종말론적> 이어야합니다. 과거 생각, 미래 생각 다해 보고 이모조모 따져보고 언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받은 은혜는 오늘 감사할 것입니다. 내일로 미루어 감사를 유보할 일이 아닙니다. 즉시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누리는 은혜만으로도 충분한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더 큰 조건이 있어야만 감사하겠다는 것은 올바른 감사가 아닙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지금이 아니면 감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최상의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지금까지 모든 것에 풍성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그 깨달은바 은혜에 감사하며 드리는 절기입니다. 돌아보면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어렵다 해도 굶어 죽지 않게 하심이 은혜요, 내 손에 무언가 들려져 있음이 무한한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깨달음이 있다면 지금 감사할 것입니다. 최상의 것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은혜를 깨달은 자의 마땅한 삶은 감사하는 삶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삶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이 따로 세워지지 않은 것은 감사를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알아서 하십시오. 감사를 안 한다고 법에 위반 되고 구속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죄는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십니다. <은혜를 입은 자의 마땅한 감사>가 넘치는 추수감사주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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