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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출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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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출 3:1~12)


옛날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대낮에 등불을 들고 아테네의 거리에서 사람을 찾아 다녔다고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에 매여있는 사람은 찾지 않습니다.  실패의 아픈 경험에 매여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로부터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쓴뿌리로부터 자유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내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나를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내 안에 꽈리처럼 틀어 앉아 있는 쓴뿌리를 태워주시옵소서"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감화와 감동을 받으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사탄 마귀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충동질합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분노하게 합니다.  미워하게 합니다.  좌절하게 합니다.  절망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 마귀가 일으키는 충동질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내 성질에 충동질을 일으키는 모든 행위로부터 자유하십시오.

어떻게 해야 육신의 충동질로부터 자유할 수 있을까?  내 심령에 성령으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언제나 사람을 감화 감동시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평안이 가득하게 합니다.  사랑이 철철 넘치게 합니다.  일어나 비전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심령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움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다른 종교들은 한결같이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음을 채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비우는 종교가 아니라 채우는 종교입니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성령으로 채우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붙잡으셔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능력만 붙들면 무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맞게 되는 새 물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스가랴에서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들으십시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이 말씀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으십시오.  성령의 임재하심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열망하십시오.  그래서 복음의 능력을 맛보며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참된 복음은 아는데 있지 않고 누리는데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믿음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아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많이 알아야 믿음이 좋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신학 박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학 박사가 다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까?  이것은 믿음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만약에 아는 것이 믿음이라고 한다면 복음은 능력이 아니라 학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깨달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학문이 됨이라"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성경은 우리가 믿는 복음에 대해서 한결 같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이 아는 것으로 이 땅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골방에 앉아서 열심히 성경을 읽는 것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성경을 몰라서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어쩌면 교회 역사에서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만큼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아는 때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이 과거 그 어느 때의 성도들보다 더 잘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 믿음 생활에 걸림돌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땅을 변화시키는 것은 복음의 지식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능력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능력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을 아는데 만족하지 말고 누리십시오.  이 복음의 능력을 누리십시오.  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면 인생이 바뀌어집니다.  가정이 바뀌어집니다.  세상이 바뀌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여 시간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를 신뢰하십니다.  우리를 소중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역사의 마운드에 다시 세우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앞에 겸손히 순종함으로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을 가리켜서 지도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도자라고 하면, 흔히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사람을 연상합니다.  나라의 정권을 잡은 사람, 회사의 사장, 어느 단체의 기관장.  그러나 지배자와 지도자는 엄연히 다릅니다.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고 싸워 이겨서 얻은 세상의 자리에서는 지배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배자는 다스리고 군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 시대의 불행이 있다고 한다면 지배자는 많으나 참된 지도자가 없다고 하는 데에 있습니다.  지도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입니다.  훌륭한 정치가들은 부러움의 대상은 되고 있으나 존경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가들도 부러움의 대상은 되고 있으나 존경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를 세운 많은 목회자들 또한 부러움의 대상은 되고 있으나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데 오늘 이 시대의 불행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언제나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합니다.  지도자는 자기는 죽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립니다.  지배자의 소리는 한 때 세상을 지배하는 듯 하지만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정치가의 소리도 사라졌고 기업가의 소리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은 오늘도 살아서 한국교회 한 가운데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저들의 소리를 듣고 저들을 양식으로 먹고 삽니다.  수많은 군왕들의 소리는 모두 사라졌으나 우리 민족 한 가운데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소리, 백범 김구 선생의 소리는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배자는 땅이 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하나님이 쓰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이 세운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배자가 아니라 지도자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자신이 쓰임을 받는데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붙들리고 쓰임 받는다."  여기에 나의 행복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내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와 가격은 다른 것입니다.  그의 재산이 얼마냐?  지식이 얼마냐?  월급이 얼마냐? 하는 것은 가격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곧 그 사람의 가치는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어떤 일에 쓰임을 받느냐?  무엇을 위해 사느냐? 에 따라 평가됩니다.  때문에 사람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꼭 필요한 존재,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지배자를 세우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지배자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세를 버리십시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려는 자세를 버리십시오.  무엇보다도 당신이 지배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든지 지배자는 한 사람이면 족합니다.  아니, 없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지배자가 아니라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배자가 아니라 겸손의 왕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사람을 섬기고 시대를 섬기는 지도자가 되십시오.  지배자는 힘도 있어야 하고, 재물도 있어야 합니다.  지배자는 남다른 재능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지배자는 시대와 사람들이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도자는 그런 것 다 없어도 됩니다.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잘 쓰임을 받으면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해야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병든 사람도 당신의 사역에 쓰십니다.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시간이 있어야 쓰임 받는 것 아닙니다.  재주가 많아야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은 쓰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겸손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기를 원한다는 절대적인 헌신과 충성과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지도자는 오고 오는 세대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비전을 자신의 비전으로 품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일까?  그것은 주님의 비전, 목사님의 비전, 교회의 비전을 자신의 비전으로 품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교인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이런 교인은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교인은 행복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에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바라보아야 할 분명한 초점이 있습니다.  함께 땀흘리며 이루어가야 할 분명한 과제가 있습니다.  내 시간과 물질과 은사와 열정을 송두리째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는 공동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비전이고, 주님의 비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붙들고 이 비전, 이 사명을 이룰 수 있다면 내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비전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교회의 비전을 붙잡는 그 사람을 공동체의 가장 자리, 축복의 가장 자리에서 밀어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자손손 천대까지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언제나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사람들의 생명 속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갑니다.  보십시오.  엄청나게 넓은 나일강에 떠내려가는 조그마한 갈대상자.  그 조그마한 운명의 갈대상자에 담겨 방향 없이 떠내려가면서 한없이 울어대는 아이 모세를 상상해 보았습니까?  이 어린아이가 장차 이스라엘 역사의 주인공이 되리라고 누가 과연 예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부모인들 예견했겠습니까?  그의 형제들인들 예견했겠습니까?  이 어린아이의 부모들은 어디로 간들 그저 생명만 붙어 있어 주기를 바랬을 뿐입니다.  거기에 더 이상의 기대도 바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인생의 혼탁한 강물에 떠밀려 가듯 우리의 육안으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의 사건이 우리 속에도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조그마한 운명의 갈대 상자 속에서 모세가 할 수 있고, 또 그가 한 일이라고는 앙앙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혼탁한 강물에 떠밀려가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개입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른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의 무능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됩니다.  아무리 몸부림쳐 보아도 안 되요.  I can do nothing.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I am nothing.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자기 무능을 고백하러 나온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람은 버렸지만 하나님은 건지셨습니다.  부모와 형제는 포기했지만 하나님은 개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형제가, 친구가, 사회가 버렸어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건져주시는 역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무능에 결코 좌절되지 말아야 합니다.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십니다.  무기력한 자에게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성경은 놀랍게도 연약하고 무능한 자들이 일으킨 역사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자기 항복의 선언 이후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철저한 자기 항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의 작업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일을 당하든지 분내지 말고,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며 적개심을 품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의 앞부분에 보면, 모세는 전혀 무방비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질게 때리고 있는 애굽 사람을 보고 그 마음에 분노와 적개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 사람을 때려 죽였습니다.  결국 한 순간의 적개심은 언제나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간 온유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내 안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온갖 분노와 적개심으로부터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보십시오.  논쟁과 이론과 변명장이였던 모세는 결국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애굽의 모래밭에 한 생명을 묻고 겨우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가 도망을 갔던 미디안이라는 광야는 애굽에서는 사막의 끝입니다.  거기까지 모세는 도망을 갔습니다.  그는 갈 수 있는 데까지 도망을 간 것입니다.  갈 데 까지 간 막장인생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 수단과 자기 힘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자기 이론과 논쟁과 변명으로 환경을 뜯어고치려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성취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 때까지도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아니 이것은 모세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모세가 출세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애굽의 군대장관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한 지방을 맡아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애굽왕 바로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는 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애굽의 모든 사람들은 모세가 애굽의 왕이 될 것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삶에 대해서 당당했습니다.  내 힘과 지식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때까지 모세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계획을 창세 전에 이미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미디안 광야에서 실패와 절망과 낙심의 광야 학교에서 자기를 발견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실 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삭막한 사막으로 도망가야만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몸 하나도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군림하는 왕자의 자리에서 미디안의 광야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미디안 촌장의 촌녀에게 들어갔습니다.  처가살이로 자신의 생명을 겨우 연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업도 변변치 못하고, 가진 재산도 없고, 이 산 저 산으로 양을 몰고 다니며 실패와 좌절 속에 희망을 버린지도 오래 전입니다.  그곳에서 실망과 좌절에 빠져서 4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는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굳어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40년 동안 말도 통하지 않는 광야에서 버림받은 존재로 살아간다면 말을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모세는 처음부터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는 애굽의 왕궁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왕자였습니다.  자기 논쟁과 이론과 변명이 탁월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말도 통하지 않는 미디안 사막에 살면서 말을 못하고 살았으니 입이 뻣뻣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고독에 빠져서 40년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 버리워졌습니다.  40년 동안 한번도 하나님은 모세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날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에 양떼나 치며 바람처럼 살다가 끝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렇게 당당하던 왕자의 모습에서 지금은 목동으로 신분이 곤두박질쳐졌습니다.

4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그 안에 있던 처참함과 비통함, 모든 혈기와 교만이 다 빠져나갔습니다.  준수한 체격 조건도, 왕실의 특수 교육도, 애굽의 높은 학문도, 숭고한 자기 관리도 사막의 모래 바람 앞에서 다 무너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 못 마땅한 것은 고사하고, 내가 나를 보더라도 별로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잘난 구석이 없어 보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다 부셔졌을 때, 다 무너졌을 때, 이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모세를 들어서 쓰시겠다고 말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에게 "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꿈을 꾸세요"라고 말하면, "목사님,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오늘 본문의 모세만큼이나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인생 막장까지 내려가서 40년의 모진 세월을 보내고 있는 모세를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네가 지도자가 되어라!"

그런데 이 지엄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세는 정작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여기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말 속에는 몇 가지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내가 누구이기에 라는 말에는 "나는 살인자입니다."라는 고백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 그 옛날 내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번 힘을 써 보다가 살인자라는 오명만 남긴 채 이렇게 도망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실패자입니다.  나는 패배자입니다."  모세의 이 말에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둘째, 내가 누구이기에 라는 말에는 "나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에게 빌붙어 사는 사람, 처가살이로 연명하는 사람, 이미 이방과 세상에 오염된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직업도 변변치 못하고, 가진 재산도 없습니다.  그저 오늘은 이 산, 내일은 저 산으로 양이나 몰고 다니며 실패와 좌절 속에 희망을 버린지 오래 전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셋째, 내가 누구이기에 라는 말속에는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모세는 40세에 왕궁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지금 내 나이 80, 하나님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이 늙은이가 무엇이기에"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고백하고 있는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이 말은 결코 지나친 겸손도 아니고 자기 비하도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자신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모세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못 마땅한 것은 고사하고, 내가 나를 보더라도 별로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잘난 구석이 없어 보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당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당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꿈을 꾸세요!"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에 불을 붙이시고 그곳으로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나무는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석류나무입니다.  사막의 떨기나무는 가시덤불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관상목으로도 쓸 수 없고, 그렇다고 연기도 많이 나서 뗄감으로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떨기나무는 보통 사람의 키보다 낮은 나무요, 수명도 다른 나무에 비해서 훨씬 짧습니다.

아더 핑크라는 유명한 성경 학자는 떨기나무는 사실상 모세 자신의 모습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떨기나무는 모세의 그림자입니다.  사막에 아무렇게나 버림받은 그 흔하고도 흔한 떨기나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보잘 것 없는 떨기나무, 이것이 바로 모세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모세는 한때 오만과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이 떨기나무의 모세는 자기 힘으로 불을 붙이는 혈기에 가득 차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나 한 시간도 채 타지 못하고,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재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사막의 광야에 버리워져 있으면서 자신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떨기나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초라한 떨기나무,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떨기나무에 하나님께서 임하셨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떨기나무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떨기나무 같은 인생이라도 여호와의 불이 임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불이 타는 자는 힘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하늘의 능력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나 혼자 서 있을 때는 무력한 존재였습니다.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할 때 나는 참으로 무능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때에 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됩니다.   인생 여정에서 실패와 절망과 낙심으로 주저앉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불로 임하십니다.

호렙산 중턱 떨기나무에서 일어난 그 불은 나무를 태우는 불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태우는 불이었습니다.  희망도 소망도 싸늘하게 식어진 모세의 마음을 뜨겁게 한 불이었습니다.  죄악을 소멸하고 인간의 삶을 거듭나게 하는 불이었습니다.  사명의 불이요 성령의 불이었습니다.  믿음을 회복하고 사랑을 회복하는 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늘의 불을 받으십시오.  성령의 불을 받으십시오.  우리 모두에게는 성령의 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불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 열방을 향한 불이 있어야 합니다.  조국과 민족을 향한 불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뜨거운 불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태우는 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을 태우기는커녕 연기만 피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할 때 연기를 피우고 다닙니다.  마음속에서 향기를 뿜어내지는 못할지언정 시꺼먼 연기만 피우고 다닙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눈에 눈물만 흐르게 합니다.  목만 케케하게 만듭니다.  짜증만 나게 합니다.  그리고 쉽게 꺼집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떨기나무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십시오.  불이 계속해서 피어오릅니다.  떨기나무는 아름답게 탑니다.  그러나 연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 인생에 연기를 피우지 말고,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성령의 불을 태우십시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좌절과 고난과 수 많은 상처들을 하나님의 불로 태우십시오.  제발 잠깐 있다가 꺼지는 연기를 피우는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꺼지지 않는 불길과 영원토록 찬란한 빛을 발하며 아름답고 거룩하게 불빛을 내는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위대한 날들을 열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날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신을 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불이 타는 자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불투명한 미래이지만 그 심령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면 꿈을 꾸게 될 것입니다.  환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도자의 꿈을 꾸게 될 것입니다.  비전을 향하여 앞으로 당당하게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역사가 지금 우리들 안에서 강하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와의 불 앞에 섰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일반적으로 재판장 앞에서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구원의 역사는 모세가 신을 벗음으로써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신을 신는다는 이야기는 활동의 시작이요, 신을 벗는다는 말은 '네 일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은 출애굽을 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이제 네 인생은 끝났다.  과거를 단절하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입니다.

이력서라는 말은 밟을 이(履), 신발바닥 력(歷)을 써서 자기 신발이 걸어온 경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네 발에 신을 벗어라'는 말은 땅의 이력서를 내려놓고 하늘의 이력서를 다시 쓰라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천국은 땅의 이력서를 가지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 자격이나 공로를 가지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늘의 이력서가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땅의 신발을 벗은 자들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신발을 벗는 곳입니다.  신발을 벗은 자가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다가 지치고 피곤한 심령들, 사람들로 인해서 이리저리 시달리고 찢긴 심령들, 병든 몸을 의지할 곳이 없어 외로움에 지친 심령들, 이곳에 와서 신발을 벗고 쉬십시오.  교회에까지 와서도 자기 신발을 벗지 못하고 목에 힘을 주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신발을 벗고 어린아이처럼 아버지 품에 안겨야 쉼이 있습니다.  신발을 벗지 못해 현관에서 서성거리며 주변을 맴도시는 분들은 지금 이 시간 신발을 벗고 하나님 아버지 집에 풍덩 들어서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자존심이 세면 셀수록 하나님 앞에서 깨뜨려지는 세월이 길어집니다.  교만이 강하고, 기질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 앞에서 쓰임을 받는 세월은 길어집니다.  모세는 4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야곱도 2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 세월이 길면 길수록 자기 자신과 가정이 그만큼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이론과 변명과 교만과 자존심들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주 앞에서 세상의 신발을 벗으십시오.

모세가 신발을 벗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민족의 지도자로 쓰임을 받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다 지난 80에 모세를 불렀지만 그러나 그때부터 40년 동안 강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를 통해서 홍해를 갈라지게 하십니다.  마른 바위에 물이 나오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세워주십니다.  그때로부터 모세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모세와 함께 가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예배를 마치면 여러분의 집으로 다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 가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과 함께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모두가 다 직장에 갈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 가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가 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험한 인생 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를 부르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의 부르심이 나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있었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세밀한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나도 내 인생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멋지게 한번은 쓰임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큰 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하나님의 불로 태우십시오.

 한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이 소중한 인생을 밋밋하게 의미 없이 왔다가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내 삶을 하나님이 주신 불을 태우며 뜨겁게 살다가 가시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당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지도자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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