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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막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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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소중하다,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것을 보고서 그것을 아름답다 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추하고 더럽다 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보고 ‘주님’하는 세리와 죄인들이 있는가 하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는 바리세인과 제사장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目)’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물을 보면서 그 것에서 진실을 볼 줄 아는 눈,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눈이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물의 겉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目)을 우리가 다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에게 큰 복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흔히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이 3명의 제자들 앞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셨던 산 위에서 벌어진 일을 살펴봄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9;1절 처음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 세상을 다 산 뒤에, 죽고 난 다음에 들어가서 행복하게 사는 곳만이 아니라 ‘권능(權能)’이 있는 곳이며, 그 ‘권능의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서 경험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죽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을 죽기 전에 볼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아직 살아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체험해야 되고 그 권능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장) 하신 이 말씀대로 표적이 따르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죽은 뒤에 하나님 앞에 가서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이런 성령의 능력을 분명히 경험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우리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 사람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 눈이 열린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눈이 열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눈을 가진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후에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한 고백은 성령께서 하게 하신 영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도 다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영적인 눈을 가진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 주님께서 이제 다시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으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보도록 하십니다. 한 높은 산에 이들만을 데리고 올라가셨는데 그곳에서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그들 눈앞에 펼쳐지는데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베드로가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었다” 고 합니다.  

이 사건은 환상이나 착각이 아닙니다. 분명한 영적인 경험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권능’과 연관이 있는 일 일가요?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1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고 나서 “엿새 후에”라고 하신 것을 보아 1절과 2절은 서로 연결이 되며, 서로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변화 산의 이 사건에서 하나님나라의 ‘권능’을 엿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나라의 권능과 오늘 성경이 말하는 권능이 같은지, 혹시 좀 다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일단 변화 산 사건의 한 가운데 있는 베드로를 봅시다.  그는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성경은 “그들이 몹시 무서워했다” 고 기록을 합니다.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하는 말은 베드로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입니다.  같은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베드로의 이런 순수함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순수함이나 열정을 잃어버릴 수 가 있습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중에 에베소 교회에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 처음 사랑을 버린 신자가 있습니다. 주님은 회개하고 처음행위를 가지라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엄하게 말씀합니다. 그런면에서 베드로의 이 순수함, 주님을 향한 열정은 우리에게 참 도전이 됩니다. 그런데 성도여러분, 베드로의 이 말은 때에 맞는 말이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말하는 것은 과연 누구에게 좋다는 말입니까?  자기들에게 좋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그 자리에 함께 계신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에게 좋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몹시 무서워했다”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갑자기 변형되어 달라 보이기 때문에 무섭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 예수와 함께 말씀하는 것이 무섭다는 것입니까?  그러니 베드로는 지금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자기가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하고 말을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그분들을 위하는 것입니까?     

3명의 제자들은 지금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 주님과 함께 말씀을 하는데 그 말씀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 와중에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주를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말은 참 봉사하고 헌신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누구를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정말 주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를 위해서 하는 말이 될까요?  그렇다면 왜 초막이어야 하고 그것도 세 개여야 합니까? 그럼 그 자리에 있는 자기들,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야영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또 과연 초막을 셋 지으면 주님과 모세 엘리야 3분이 다 기뻐하시고, 칭찬하실까요?  산에 초막을 짓고 살려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을까요?  초막 셋을 짓고 산 밑에 내려가지 않고 사는 것이 변화 산의 기적의 뜻일까요?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권능을 보는 일일까요?    

생각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구나 하고 우리가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도 그럴 수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한결같이 하는 말이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주를 위한 일이며 교회를 위한 일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데 정말 그런가요? 겨우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면서 그게 최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정말 우리가 하는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고 합니다. 또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그 되고 안 되고 하는 기준이 과연 누가 만든 기준입니까?  내 생각이나 내 느낌대로 되고 안 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말씀을 따라 되고 안 된다는 것입니까?   정말로 주를 위하고 교회를 위한다면 ‘이렇게 해야 되고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들도 종종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말을 누가 하는 것입니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성령을 빙자해서 내가 하는 말입니까?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하는 베드로의 말은 과연 성령님이 주신 말일까요?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말일까요?      

구약에서 에스더라는 한 여인은 ‘죽으면 죽으리라’합니다.  우리가 말을 하려면 에스더처럼 말해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하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습니다. 내 건강도 그렇고 내가 처해 있는 상황도 너무나 안 좋습니다.  그럴 때, ‘내가 주의 일 하다가 죽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것이 정말 주님을 위하는 말이 아닐까요?  본문의 베드로를 통해 우리는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하는 말을 자주 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 변화산 사건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던 두 사람이 왜 하필 모세와 엘리야였던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성경에 보면 공통점이 두 사람 다 호렙산에 올랐던 사람들이며,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때 그들의 상태가 어땠습니까? 먼저 모세는 광야에서 목자로 40년을 지내면서 삭을 대로 삭아 있을 때 내 인생은 이제 다 끝났다 싶었던 바로 그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 나 죽여주소 하던 때에 떡과 마실 것을 주어서 먹고 마시게 하고는 그 힘을 의지해서 40일 동안 광야를 걸어 호렙산까지 이르게 하시고는 그 지쳐있던 엘리야, 나 죽여주십시오 하던 엘리야를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한결같이 절망의 광야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한 때는 큰일을 하겠다고 펄펄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절망 가운데 빠져서 좌절로 가득 차 있었던 사람의 대표자입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만나주셨고, 시들어버린 그들의 꿈을 다시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끔 한 사람들이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권능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셨다는 것은 우리 역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때 누가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살아가게 되면 요단강도 열리는 것이요 여리고도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열리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벌벌 떨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하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마침 구름이 와서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오히려 주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하기 보다는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다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다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보여야 합니다. 내 고집과 내 계획과 내 자아도 사라져야 합니다.  내가 세운 미래의 청사진이 아니라 주님만이 보여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만이 보이면 더 이상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모세와 엘리야는 자기들을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세워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승리할 수 있던 비결이 하나님나라의 권능입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우리 가운데 나타내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가면,  우리가 품지 못할 것이 없고 우리가 감당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언제라도 “주님 나는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능력으로 나를 사로잡으시니 내가 감당하겠나이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의 미래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계획에, 꿈에 하나님의 능력이 없습니다. 다 내가 합니다. 내 노력이나, 내 학력, 내 의지, 내 가정의 부유함이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다는 것이나, 하나님이 주신 비젼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도와주시면 감사한 정도입니다.     

청년들은 서울에 가야 인생의 답이 있는 것처럼 모두 서울로만 가려고 합니다.  물론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또 ‘孟母三遷之敎’라고 했지요.  환경의 중요함은 굳이 다시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서울은 답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왜 하나님에게 죽자 살자 매달리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이 그렇게 멀리 있다고 믿나요? 왜 기도하는 자리에 나오지 않고 매일 해야 하는 큐티(새벽기도)를 끊어 버립니까?  왜 크리스챤끼리 만나던 모임을 없애 버립니까!!!  물론 이유가 있지요. 그러면 다 그만두면 답이 나오나요? 인생문제 이제 다 해결이 되었습니까?   혹시 이렇게 하나님과 상관없고 하나님나라의 권능과는 너무 먼 생활을 하면서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라고 되풀이 하며 착각에 빠져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만이 아닙니다. 살아서 하나님나라의 권능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아니라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죽기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삶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서울이나 대전이 답이 아니라, 자격증이 답이 아니라, 하나님이 답이고 하나님나라의 권능이 내 인생의 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의 계획의 가장 밑바닥에 하나님의 소원이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한 번 뿐인 내 인생,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위해 한번 살아야 겠다고 결심해 보십시오. 

굶어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길을 크게 여십니다. 하나님이 능력과 권능을 체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아,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구나.  아 정말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구나’ 하고 고백하는 삶, 주님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는 귀한 삶을 우리 모두가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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