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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불러 시키는 일 (행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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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불러 시키는 일

감리교를 처음 시작한 웨슬리 목사님은  평상시에 누누이 말씀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감리교회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면 감리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저 버린 하나님 마음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하셨습니다. 

계 1:20에 보면 주님이 촛대를 붙잡고 계시는데, 그 촛대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그런데 그 7교회의 모습을 하나하나 말씀하시면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처음 행위와 처음 마음, 처음 사랑을 가지라고 하시면서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잡고 계신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것입니다. 

복 중의 복은 주의 손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88세에 웨슬리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에 지켜 섰던 이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한 평생에 가장 좋았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웨슬리 목사님은 작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대답하셨습니다.  “내 평생에 가장 좋았던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감리교를 시작한 웨슬리 목사님은 임종하시면서 주님의 손이 함께 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고 기쁨으로  주님의 마지막 부르심을 맞이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는 2 곳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의 교회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따라 모여 기도했더니 행전 2장에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이 기도하던 이들에게 임했습니다.  따르던 주님이 십자가로 사형집행을 당하자 두려워했고 도망갔던 이들이 성령님이 임하자 달라졌습니다.  믿음이 들어가고 말씀이 깨달아지고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지금도 약속하신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모하고 기도하면 그렇게 됩니다. 
 
베드로가 달라졌습니다.  3번씩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가 이제는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3일 만에 다시 사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그 날에 예수님을 믿어 세례를 받은 사람이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에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가 성전 문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려 할 때에, 무엇을 얻을까하여 애처롭게 쳐다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면서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성경은 40년 동안 한 번도 일어서보지 못한 이의 발과 발목에 곧 힘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혈압으로 쓰러졌는데, 한 달 동안 [절대안정]이라고 침대 머리맡에 붙여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더니, 한 달 만에 일어나려고 하니 근육이 가늘어지고 풀려서 일어설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저는 장애로 40년 동안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장애가 풀려도 곧바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한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전하게 되는 것을 보도하는 성경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저는 놀랐습니다.  

매일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를 압니다.  그가 뛰어 서서 걸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왔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고침 받은 것,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성전 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옆에 서 있게 된 것을 보면서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3:16, 개정)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 설교를 듣고 믿은 사람이 5천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행4,4).  예루살렘 교회가 이처럼 부흥하며 능력이 나타난 것은  주님의 손이 촛대를 붙잡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충만한 것이 곧 성령 충만이요,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들이 일어납니다.  

안디옥 교회도 동일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행 11:20-21, 개정)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님의 손이 안디옥 교회를 머무르며 붙잡고 계셨습니다.  부흥의 역사는 계속되어 안디옥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흥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맞보던 예루살렘 교회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많이 모였지만, 그래서 헌금이 많이 들어오고 그랬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점점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행 6:1, 개정)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헌금가지고 자기들끼리 어려운 이들에게 나눈다고 하면서 집안 잔치만 벌이더니 누구는 많이 받고 누구는 적게 받고, 그래서 원망하는 일들이 생겨졌습니다.   

교회의 본연의 사명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묶인 것을 풀어주고 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눅 4:18-19, 개정)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7장에서 스데반이 순교를 당합니다.  그리고 8장 1절과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행 8:1, 개정)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 8:4, 개정)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그래서 그 유명한 말이 생겼습니다.  [맞고 갈래, 그냥 갈래!]

진정 주님의 마음은 한 영혼이라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놓임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주신 것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세상과 부귀영화를 좇는 의미없는 인생을 사는 우리들이 무엇을 하든지 보람있게 복되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불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모세가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높이 올렸습니다. 그리고 처다 보는 자는 다 살게 했습니다.  주님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죄 가운데 빠져 죽어가는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골고다 언덕에 높이 세워졌습니다.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게 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피의 사랑이 강같이 흘러 이 땅을 적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하든지 한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지금도 모든 장애물을 넘어 그 마음을 품고 일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우리 주님의 손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 하면 세상이 이기지 못합니다. 감당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그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세상의 장애물 때문에 십자가 복음을 타협합니다.  고집과 편견, 아집과 자기 생각으로 십자가 복음을 자기 이익으로 약화시키거나 왜곡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성전 문에 앉아 있는 장애인이 왜 성전 문에만 앉아 있었을까요? 당시에는 장애를 가진 이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희생제물도 흠없는 것들이 드려져야 한다며  장애가 있으면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오지만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만 있었습니다.  그 묶여졌던 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풀어졌던 것입니다.  걸으면서 처음으로 한 것이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껏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미국 교회도 그랬습니다. 인종차별하며 자기들 끼리 모였습니다.  백인교회 문 앞에서 흑인 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찾아와서 달래며 물었습니다.  “왜 여기서 울고 있느냐?”  “교회에 들어가고 싶은데,  못 들어오게 해요! 정말 들어가고 싶은데요”  “나도 내 집에 들어가고 싶은데, 들어갈 수가 없구나. 우리 함께 손잡고 길을 걷자꾸나!”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달랐습니다.  비록 예루살렘 교회보다 작았지만, 그 모인 사람들이 주를 섬겨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원어를 보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뜻을 온전히 좇으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서로 더 먹겠다고 싸우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금식하고 절제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높혔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가장 원하시는 일 곧 사람들을 부르고 세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살리고 생명 건지는 일에 가장 좋은 것을 내 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부흥의 주역이었던 사람,  교회에서 가장 크게 일하고 신실하게 섬겼던 두 사람, 바나바와 사울을 세워서 복음을 전하러 파송하라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며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떠나 보냅니다.  [맞고 가지 않고, 그냥 갔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순종하며 따랐습니다. 

주님의 손, 주님의 촛대가 옮겨진 요한계시록의 에베소 교회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 2:4-5, 개정)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성경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은 두 사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순종함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조카는 바나바를 따라 갔습니다.  결국 조카 마가 요한은 얼마가지 않아 밤빌리아 버가에서 포기하고 되돌아 갑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따라 가는 것이 복이지만, 자기 스스로 십자가 복음 놓치면 포기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따라, 복음의 약속 따라 갔지만, 조카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갔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에 이르지만, 눈에 보기 좋은 땅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다가 유황 불과 함께 엎으실 때 아내도 잃어버리고 겨우 몸만 건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말씀 따라 갔고, 복음의 약속 따라 갔던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비록 소년이었지만,  살아 계신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던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겼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했던 12 제자들이 당시의 골리앗 유대교를 이겼습니다.  사람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리라고 했던 바울을 통해서 로마와 유럽이 다 변화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가장 작고 미약했지만,  주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강함이 되어 세상을 이겼습니다. 

(사 60:22)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면 주님께서 승리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이명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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