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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⑫ : 절대 감사 (단 5:30 ~ 단 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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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⑫ : 절대 감사 (단 5:30 ~ 단 6:27)


I. 절대!

유대나라 한 마을에 아버지로부터 진귀한 선물을 물려받은 삼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천리안을 가졌습니다. 세상끝도 볼 수 있는 눈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마법의 양탄자를 물려받았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일순간에 달려갈 수 있는 양탄자였습니다. 셋째 아들은 사과 하나를 물려받았는데 이 사과를 먹으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누구든지 낫게된다는 겁니다.

천리안을 가진 맏아들이 한양을 바라보았더니 임금이 포고문을 내렸는데 임금님의 외동딸 공주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백약이 무효라. 이 딸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은 누구든지 따지지 않고 남편으로 삼고 다음 임금 후사로 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삼형제가 의논하여 양탄자를 타고 한양으로 날아갔습니다. 
막내의 품에 있던 사과를 공주에게 먹였더니 공주의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제 후사를 삼아야 되겠는데 문제는 한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입니다. 
자, 맏아들이 먼저 보았으니 선점은 맏아들이 한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째 아들이 제일 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사과를 먹인 막내아들은 어쩌구요? 임금이 마지막 결단을 합니다. 막내를 공주의 남편으로 삼고 다음 후계로 삼게 된 것입니다. 

첫째, 너는 큰공헌을 했지만 눈은 그대로 남아있지 않느냐? 둘째, 양탄자로 날아왔지만 그 양탄자가 조금도 손상없이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느냐? 막내는 자기가 가진 귀한 선물 모두를 공주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했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막내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다 하는 내용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절대 헌신, 절대 희생, 절대 신앙, 절대 감사라는 내용입니다. 

그동안은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와 표적을 통해서 오늘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해 왔습니다. 구약 기적 소개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절대 신앙」「절대 감사」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본문의 주인공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알려주는 것은 명확합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다니엘서의 문이 열려지면 1장 1절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잃어버리고 이스라엘의 젊은 인재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비극적인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은 불타고 하나님의 성전의 성구들은 약탈당하는 비극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다니엘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할 때 세상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역사가 끝나고, 하나님의 사랑도 이제는 지속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전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서도 주인이시다! 

다니엘 5장 30-31절에 당시의 배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바벨론이 망하고 다리오라는 사람에 의해 “메대”라는 나라가 탄생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제국이 몰락하고 또 다른 제국이 역사의 무대에 떠오르는 모습으로부터 본문이 시작됩니다. 
역사는 변합니다. 사람은 바뀝니다. 체제도 지도자도 바뀝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한 가지 사실만이 영원합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궁 젊은 정치인으로 훈련을 받습니다. 우상의 제물, 부정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유혹 앞에서 이들은 왕이 주는 포도주와 산해진미를 거절합니다. 신앙의 정절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신앙, 절대신앙을 보여줍니다. 

네 젊은이들의 결단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출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다. 명예보다 중요한 것은 깨끗하게 사는 것이다. 황금과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명견을 훈련(명마훈련)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훈련 마지막 코스가 개로 하여금 배가 고프게 만듭니다. 개가 허기진 상태에서 맛있는 먹이를 개에게 줍니다. 이 때 허기진 개가 그것을 바로 받아먹으면 날카로운 칼로 사정없이 개의 목을 쳐버립니다. 그러나 개가 먹이를 먹지 않고 주인을 바라봅니다. 이 때야 비로소 개는 명견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주인의 허락 없이는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않는 개, 주인이 주는 음식만 먹겠다고 결단하는 개만 명견이 되는 것입니다. 


III. 다리오는 누구인가?

오늘 본문 다니엘서 6장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본문 중 하나입니다. 주일학교 초등부시절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얘기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도 사자굴 속에 던져졌으나 하나님이 사자가 입을 닫으시고 다니엘을 보호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모두 아는 이야기라고 안심하는 순간 성경은 당신에게 침묵 할 것입니다. 모두 아는 내용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연구가들은 말합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세요. 당신은 지금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평생 처음 읽는 본문인 것처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건인 것처럼 젊은 청년이 연애편지를 받아든 설레임으로 이 본문을 대하게 될 때에 아마 많은 메시지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성경적, 역사적, 난제가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면서 본문에 혜성같이 등장하는 「다리오」라는 이 인물이 누구인가? 일반적으로 메데와 바사 - 즉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사람은 고레스라는 인물입니다. 그러면 메데와 바사를 세웠다고 말하는 다리오는 누구란 말인가? 일반역사에 비추어 성경의 역사는 거짓말이라고 서툴게 꾸며낸 얘기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몇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1) 본문의 다리오를 고레스와 동일 인물로 보는 것입니다. 
고대엔 유명한 사람에게는 이름이 여러개 있었습니다. 다리오의 다른 이름이 고레스로 보는 것입니다. 아니면 혹 고레스는 왕의 이름이고, 다리오는 왕의 칭호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왕을 바로라고 불럿듯이 메대의 왕을 다리오라고 부른다는 학설입니다. 그래서 고레스 다리오, 다리오라고도 말할 수 있고 고레스라고도 말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문제는 6장 마지막절입니다. (28절)
“이 사람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다리오 왕의 시대와 고레스 왕의 시대가 한 절에 나옵니다. 두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주장하기 어렵습니다. 다리오“와” 고레스 “와” and를 콤마(,)로 보고 있습니다. “이 사람 다니엘이 다니엘 왕의 시대 곧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2) 다리오 왕이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얼마 후에 죽습니다. 
고레스가 나라를 통일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역사의 무대에는 짤막했던 다리오 왕의 시대를 기록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3) 본문의 다리오를 고레스 왕의 휘하에 있던 장군으로 보는 것입니다. 
단5:31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다리오가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로부터 나라 하나를 얻어 다스리게 되었다고 봅니다. 단9:1에도 같은 얘기가 나옵니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다리오는 페르시아 제국의 갈대아 분봉 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는 고레스란 사람인데 고레스란 사람이 이 지역 저 지역 분봉왕을 세워서 다스리게 되었는데 갈대아 지역 분봉왕이 다리오 이기 때문에 여기서 다리오 왕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학설이 맞습니까? 
모르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의 역사와 일반 역사가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역사 한복판에서 일어난 확실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의미론적으로 오늘 우리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기만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만 하면, 하나님이 주관하시기만 하면, 오늘 본문에서 경험되어졌던 살아계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 삶의 현장 한복판에서 경험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IV. 위기가 승리로

다리오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120명의 도지사와 시장을 임명하고 자기 곁에 3명의 총리를 두고 그 중에서도 다니엘을 제1총리 - 국무총리로 삼으려 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기회 때문에 위기를 맞게 됩니다. 다니엘을 시기한 자들이 음모를 꾸밉니다. 포로로 끌려온 다니엘에게 이 나라 국무총리 자리를 내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 정적들이 다니엘을 고발할 조건을 찾아 혈안이 되었습니다. 찾아본 결과 4절에서처럼 다니엘은 3무의 사람이었습니다. ① 아무 근거를 찾지 못했다. 옛 번역에 보면 아무 틈도 얻지 못했다. ② 아무 허물을 찾지 못했다. ③ 아무 그릇됨을 찾지 못했다. 

요즘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그만하면 깨끗하겠구나? 청문회를 해 보면 수도 없는 그릇됨과 허물이 발견되어집니다. 털어서 먼지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몯느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털어도 먼지 하나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틈도 없었고 그릇됨도 없었고 허물도 없었습니다. 

2) 다니엘을 고발할 조건을 찾던 정적들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됩니다.
다니엘은 정확한 시간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을 올무로 하여 못된 법률을 제정키로 왕에게 아부합니다. “왕이여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 왕 외에 그 누구에게도 경배하거나 기도하는 자는 사자 굴에 넣어 왕의 권위를 세우소서” 이 법령이 통과되고 왕의 인장을 찍었습니다.

이 사건의 결론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압니다.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천사가 다니엘과 함께 함으로 사자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임금은 못된 정치인들에게 당했다 싶었습니다. 충신 다니엘을 잃을까 밤새도록 밤잠을 자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이른 새벽에 다니엘이 던져진 사자굴을 찾아옵니다. 
“슬피 소리질러 다니엘아 다니엘아 하나님이 너를 살려 주었느냐?”
“왕이여 만수무강하옵소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막아 주었나이다.”

왕이 심히 기뻐하며 24절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라. 그 처자들과 함께 저자들을 사자굴에 쳐 넣어라. 그들이 굴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입을 벌려서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그 가족들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앞발로 받아서 낼름낼름 삼켜버렸습니다. 그 뼈까지 부서뜨렸더라. 

다니엘의 행동은 이 법령 조서를 왕이 바꾸게 합니다.(26-27절)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나님을 향한 이 놀라운 고백과 선포는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나온 말이 아닙니다. 어떤 신학자의 연구를 통해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방 왕의 입을 통해 고백된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다니엘 한 사람을 통해 만들어진 영향력이 얼마나 크고 신비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V. 절대 신앙

다니엘은 도대체 어떤 사람 이길래 이토록 엄청난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았단 말입니까? 하늘을 울리고 땅을 감동시키는 다니엘의 영향력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란 말입니까? 

1) 다니엘이 어떤 사람인가를 표현하는 본문의 첫 번째 말씀은 3절에 나옵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여기 “마음이 민첩하다”는 말이 판단력이 빠리 빠리하다는 뜻처럼 이해됩니다. 그러나 사실 여기 마음이란 창 1:2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바로 그 “영” “루아흐”입니다. 다니엘은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매력이 넘쳤다는 뜻입니다. 
단 5:11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라고 다니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단4:9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다고 느부갓네살 이방 왕의 입을 통해 말합니다. 한 마디로 다니엘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신앙, 절대신앙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성령이 충만할 때 주어진 하늘의 은사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쓰는 사람이었다. 역사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하여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2) 둘째 다니엘은 절대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10절을 보세요.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그는 이번 법을 어기면 사자굴속에 던져진다는 사실을 알았고, 어인이 찍힌 문서를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죽음보다 기도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기도하는 습관을 타협하지 아니했습니다. 신앙의 장부, 신앙의 영웅이었습니다. 30일 동안만 문을 닫고 기도해도 될 텐데, 마음으로 기도해도 될 텐데, 다니엘은 기도의 자세하나 흐트러뜨리지 아니했습니다. 어떤 생명의 위협조차도 다니엘과 하나님의 영광스런 교제의 시간을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권력도 다니엘의 행복했던 기도시간을 빼앗아 갈 수도 없었고 파괴할 수도 없었습니다. 절대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3) 절대 위기상황 속에서 드린 다니엘의 기도는 절대 감사였습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다니엘은 목숨을 구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원수를 갚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단 6:10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길고 긴 시간동안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알 수 없으나 다니엘서를 기록하는 기자는 한 마디로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였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비극은 이 당연한 감사조차도 잊어버리고 있다는 데에 우리의 불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여유로운 환경을 주었습니까? 그 환경을 감사할 때에 그 환경은 내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아버지 내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내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내 남편이 될 수 있고 내 아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내 조국 땅에서 살아가는 것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이 조국이 바로 나의 조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경배하고 우리가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이 교회를 향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이 교회가 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걸음마다 함께 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열심히 기도를 해도 자기에게 특별한 응답이 없어서 몹시 실망하고 있던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천사의 손에 이끌려서 하늘 보화창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한 창고에 도착했습니다. 창고가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이 창고는 어떤 창고입니까?” 물었더니 “간구창고입니다. 세상에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울며 매달려서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 애원할 때마다 간구하고 기도할 때마다 이 보화 창고를 열고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빈 창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옆 창고로 인도해 가는데 보니까 더 큰 창고가 있었는데 보화가 하늘 천정까지 가득히 쌓여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창고는 무슨 창고입니까?” “감사창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작은 은혜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나누어 주려고 낮게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높은 은혜를 나누어 주려고 쌓아 두었던 보물창고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하도 감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보물이 쌓여져 있습니다” 라고 얘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이 성도는 다시 성전에 엎드려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헤아려 보기 시작했습니다. 일마다 때마다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가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눈물 흘리며 감사했습니다. 하늘 보화가 신령한 은혜가 넘치게 되었더라는 얘기입니다. 

은혜 받기 원하십니까? 축복을 원하십니까? 하늘에 보화가 쌓이길 원하십니까?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 무엇 때문에 하는 감사라 한다면 위험이 따릅니다. 만약 그 무엇 무엇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결국 원망과 불평으로 바뀌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주어진 조건 때문에만 감사한다면 그것은 초보적인 감사의 단계에 불과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상대적인 감사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보고 감사했다면 사람을 보고 실망하게 됩니다. 있다고 감사했으면 없다고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병 나았다고 감사했으면 다시 아프면 원망할 것입니까? 사업이 잘 되었다고 감사하면 그 사업에 실패했을 때 누군가를 원망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차원 높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감사를 배워야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감사,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절대감사였습니다. 

다니엘은 이 조서가 무엇이고 누구 때문이며 자기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전과 같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 걸어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원수에 대한 원망이나 피압박민족으로서의 자학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였습니다. 

억울한 모함을 받고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죽을 줄 뻔히 알고도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기 운명이 얼마나 비참해 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자굴 속에 들어가서 처참한 사자의 밥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절대적인 감사였습니다. 신령한 감사였습니다. 하늘의 사람으로서 땅에 살아가는 이 땅에 사람들의 감사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향한 음모를 퇴치할 만한 힘이나 대책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역사의 흥망성쇠의 열쇠를 움켜쥐시는 분은 전능하신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 이것이 다니엘의 감사였습니다. 감사는 사자의 입을 봉했습니다. 고통의 사자굴로부터 자유함을 허락했습니다. 절대 감사, 절대 신앙의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에게 환란의 사자의 입이 무엇입니까? 사자굴은 무엇입니까? 감사를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환란의 사자의 입으로부터 여러분들이 구원받기를 축복합니다. 사자굴 속에 빠져 신음하고 있습니까? 감사를 회복한다면 하나님께서 진정한 자유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노래했습니다.(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여기 여섯 가지가 없다고 얘기하는데 이 여섯 가지는 필수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무화과는 양식이요 포도는 음료수입니다. 감람나무는 기름이요 밭의 식물은 식량이요 양털은 옷입니다. 소는 밭을 가는 일의 수단이요 양은 제사의 제물이었습니다.

의식주 문제가 막막하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정치 현실을 바라보면 암담하다 할지라도 경제에 미래가 없다 할지라도 사업이 캄캄하게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할지라도 종교가 타락해서 썩어다 할지라도 전능한 하나님이 내 곁에 살아 계신다고 하면 나는 그분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이것이 차원높은 감사입니다. 절대 신앙, 절대 감사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실라와 바울이 갇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 때문에 매를 맞았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다. 손발은 쇠고랑이 채워졌습니다. 얼마나 맞았던지 상처가 터져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 깊은 밤에 하나님 앞에 나와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잠자는 실라를 깨웠겠지요. “이보게 일어나서 찬송하세 기도하세” 실라가 대답합니다. “피투성이 된 몸을 가지고 어떻게 감사하고 찬송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두 사람이 찬송하는 사이에 쇠고랑이 끊어졌습니다. 옥문이 열려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토록 불만과 불평이 많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나 바울과 실라에 비하면 토굴대신 따뜻한 아랫목이 있습니다. 그래도 쌀독에 한 대박 쌀이 남아 있습니다. 깨끗하게 빨면 깨끗하게 입을만한 옷가지가 걸려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족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까? 우리의 발은 착고에 매이는 대신 멋진 구두를 신고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거닐며 땅을 밟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지금은 내 앞에 구름이 가로놓여 있지만 구름 저 건너편에는 나를 기다리는 미소가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 그는 시대의 흐름을 역류하여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있어야 될 그 시간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범인들이 울고 있어야 될 그 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그는 세상의 도전을 회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으로 당당히 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썩어가는 세상 속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난의 현장의 한복판에 서서 절대 신앙, 절대 감사하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고난의 길을 다 피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 때문에 받고 얻고 누렸던 분복만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을 다 버리고 하늘 면류관 쓸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좋은 것들만 감사하다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기철 목사님의 옥중 고백시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주님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다 피하다가 이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 위하여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주님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다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골고다의 길, 영문 밖의 길, 주님 가신 길 내 따르오리다. 

여러분을 움켜쥐고 있는 사자굴의 상황이 무엇입니까? 이빨을 드러내고 금방이라도 삼킬 듯이 찾아온 환란의 사자이빨이 무엇입니까? 

서커스를 보니까 한낮 인간 조련사도 사자를 잘 조련시켜서 함께 가지고 놉니다. 공도 굴리게 하고 불 가운데 뛰어 넘게도 합니다. 인간 조련사 하나가 사자를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사자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막지 못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사자굴에서 건져주시고 여러분을 삼킬 듯 입벌리고 달려드는 사자의 입을 오늘도 막아 주실 것입니다. 원수의 이빨을 꺾어 주실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사자굴은 하나님이 함께 할 때에 하늘 사자의 굴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에게 사자굴은 천사의 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사자굴이 무엇입니까? 절대 신앙, 절대 감사 앞에 천사의 굴로 바뀌어 지는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자굴 속에서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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