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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⑭ : 사람찾기 (눅 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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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⑭ : 사람찾기 (눅 5:3~11)


I. 본문의 중요성

엄마, 엄마 하는 애기 → 시골서 올라오신 작은 할머니 
→ 작은 할머니 해 봐? → 잘하고 싶지 않은 사람 누가 있는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사람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사건 가운데 가장 길게 그리고 가장 자세하게 기록된 성경 얘기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만큼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많다는 뜻이요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신 이 사건을 통해 오늘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어느 성경이 귀하지 않으리요 마는 저는 누가복음 5장 오늘 본문을 참 좋아합니다.

오늘 본문은 갈릴리 바다에서 만났던 예수님과 수제자 베드로의 첫사랑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사랑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갈릴리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첫사랑으로 돌아가자는 거지요.

또한 오늘 본문속엔 실패의 밤이 멋진 승리의 아침으로, 빈 그물이 만선으로 바뀌어지는 역전의 드라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묻습니다.
진정 여러분은 하나님께 쓰임 받아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당신의 연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어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실패의 순간을 성공의 기회로 만들고 싶으십니까?
당신이 만난 그 밤을 찬란한 아침으로 바꾸고 싶으십니까?

오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역사가 사람을 낳는가? 아니면 사람이 역사를 낳는가? 이는 오랜세월 사가들의 질문이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역사는 사람을 통해 이루신다고요.

문제는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하필 왜 베드로를 부르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는 혹 그런 일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집에서는 쓰레기통과 밥그릇을 바꿔서 사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밥그릇엔 밥을 담았고 쓰레기통엔 쓰레기를 담았습니다. 준비된 그릇대로 사용한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당대의 과학자요 의사였습니다. 골로새서 4장 14절에서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라고 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답게 주님이 베드로를 찾으신 사건을 분명히 통찰하고 그 관찰한 내용을 그림처럼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찾아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하는 것을 본문은 일목요연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II. 빈 배를 찾아오신다

오늘 본문 3절은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여기 한 배는 고기를 잡지 못한 시몬의 빈 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왕족이나 귀족 정치가를 찾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 마을 갑부를 찾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권력가를 찾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빈 배를 찾아 오셨단 말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바로 실패의 밤중에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늘 자신의 배가 넉넉히 채워지길 원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기 빈 배라는 말은 베드로의 실패한 장면을 말합니다. 하룻길을 걸어도 험한 계곡과 태산 준령을 넘게 되거늘 하물며 사람이 한 평생 살다가 왜 실패의 순간이 없겠습니까? 낮과 밤, 빛과 그림자가 왜 없겠습니까?

어떤이는 건강의 빈 배를 안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사업의 빈 배를 안고 몸부림 할 때가 있고, 때로 사랑의 빈 배를 안고 허탈과 허무에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 빈 배는 인생의 밤을 의미합니다.

그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밤은 우리가 절망하고 낙심해야 할 순간이 아니고 주님이 찾아오시는 기회입니다. 주님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무신론 철학자 니이체는 기독교를 약자의 종교라고 비판했고, 나사렛 예수는 인생의 걸레들만 데리고 다녔다고 혹평했습니다. 사실 일 수 있지요. 그러나 니이체가 몰랐던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약자들을 들어 강한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인생의 걸레쪽지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 면류관을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문제를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크리스챤은 실패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실망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루즈벨트의 말처럼 언제나 문제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문제시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밤이 문제가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 문제더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빈 배를 찾아 오셨고 베드로는 주님께 그 빈 배를 내어 놓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새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이 창조되는 신비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명인사도 영향력 있는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를 사용하시므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 내 인생의 배에 오소서. 우리가정에 오소서. 우리 교회에 오소서. 
우리민족 가운데 오소서. 오 주여 한국교회에 오소서.

이 시간 인생의 빈 배, 영혼의 빈 배로 인하여 괴로워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주님전에 빈 배 저어 나아 오신 분이 계십니까? 실망하지 마시고 주님 만나는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밤은 주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됩니다. 기독교는 만남의 종교요 관계의 종교입니다. 무능한 인간이 전능자를 만났을 때, 추한 죄인이 속죄의 주님을 만났을 때, 연약한 인간이 능력의 주님을 만났을 때, 어리석은 인간이 지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병든 인간이 치료의 광선을 만났을 때, 가난한 자가 부요의 주님을 만났을 때, 인생의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자신의 빈 배에 은금 보화를 가득 담아 주시기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빚도 갚고 가족들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담고 금은 보화를 담아야 할 그 배에 당신이 타셨습니다. 빈 배에 예수님이 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빈 배를 채우기 전에 먼저 영혼의 빈 배, 말씀의 빈 배를 채우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말씀입니다. 영혼의 그릇이 문제입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 말씀을 채워주셨고 말씀을 주신 다음 베드로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얕은 곳에서만 놀지 말아라. 때로 위험부담이 있고 더 수고해야하고 장비를 더 갖추는 수고가 있어도 깊은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부담도 도전도 없이 큰 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좀더 진실해지지 않고 인정만 받으려는 사람, 땀흘리지 않고 열매를 얻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운 것입니다. 꿈과 비전, 소원과 큰 복을 기대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당당히 댓가를 지불하는 사람만이, 위험과 도전을 감당하는 사람만이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III. 하필 왜 베드로를!

그런데 이 시간 나는 주님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주님, 갈릴리 바다에 빈 배가 한 둘이 아니었을텐데, 하필 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까?" 
"예수님 제자가 한 둘이 아니었건만 하필 왜 베드로를 주님의 수제자로 삼으셨습니까?" 

이때 예수님의 대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 한 두 곳이 있습니다.

1. 첫째, 5절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습니다" 즉, 베드로는 끈기와 뚝심,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고기가 잘 잡히는 그물질이야 밤을 새워도 재미가 있지요. 그러나 그물을 던지고 또 던져도 피라미 새끼 한 마리 안잡히는 날, 그물질로 밤을 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꽁치 한 마리, 멸치 한 마리 안 걸려드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맡은 일에 미칠 줄 아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번 맡겨진 일은 끝장을 보고야 마는 끈기가 있었습니다. 한번 시작한 일은 뿌리를 뽑고야 마는 근성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일을 맡을 수 있는 자질이었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신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야 없지 않은가. 쓰러지고 넘어지고 깨져서 마지막 심장 한토막이 남거들랑 그 심장을 부둥켜 안고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맡겨진 고지에 깃발을 꽂고야 마는 사람." 이런 사람을 주님이 찾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영국성공회는 극도로 타락을 했습니다. 교회는 치부에 여념이 없었고 성직자들은 권력에 결탁하므로 영적인 능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중앙본부에서는 바울 성당을 짓는다는 명목 아래 가난한 교회들을 괴롭혔습니다. 이때 댐즈강에서 한 작은 성당을 섬기는 젊은 신부 한 사람이 이 타락에 가담하지 아니하고 신념있게 살았습니다. 때에 의식있는 사람들 속에서 "댐즈로 가자"는 운동이 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교단본부에서 이 젊은 신부를 파면하기 위해 조사단을 보냈습니다. 조사단장이 내려와 하는 말이 "이보게 젊은이 자네 혼자 고집 부린다고 썩어진 영국사회가 하루 아침에 일어날 수 있겠는가. 자네 혼자 뜨겁게 산다고 얼음덩어리가 둥실둥실 떠내려가는 저 댐즈강을 끓게 할 수 있겠는가?"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젊은 신부가 무섭게 눈을 뜨고 대답했습니다. "예, 나혼자 댐즈강을 끓게 할 수야 없겠지요. 그러나 당신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나를 댐즈강 가운데 집어 던졌을 때 나 혼자 만큼은 그 가운데서 이글이글 끓고 있을 것입니다."

옳습니다. 여기 모여 뜨겁게 기도했던 사람들에 의해 영국 성공회에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예수 사랑에 가슴이 끓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교회사랑에 가슴이 뜨거워져 있는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맡겨진 일에 생명을 내걸고 끈기와 열정과 뚝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이 시간 내가 맡은 그 일을 감격해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친히 불로 불로 역사해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은 그곳에 오십니다. 주님은 그 사람을 찾기 때문입니다. 

2. 둘째,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게 된 베드로의 됨됨이를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날 베드로의 사업은 불경기였습니다. 기분 나쁘고 짜증스런 아침이었습니다.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이 즈음에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배를 좀 띄워 주시오. 바다로 갑시다. 깊은 데로 갑시다."

베드로의 마음은 여기 있지만 예수님의 명령은 여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소명과 기분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명과 감정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이 쓰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연구해 보면 예수님께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실 때에 그물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명령대상들도 복수형입니다. 거기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물을 내려 놓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물을 내렸다"고 했을 때에 여기선 또 다시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이것도 단수입니다. 거기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지만 정작 그물을 내리고 순종한 사람은 베드로 혼자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불가능한 명령을 순종한 것입니다.

어떤 주석에 보니까 베드로는 불가능한 순종 4가지의 산맥을 뛰어 넘었다.

첫째, 시간적인 불가능입니다. 아침 햇살이 떠올라 맑은 갈릴리 바다에 그물이 오르고 내림이 거울처럼 보이는 시간이었습니다.

둘째, 경험상 불가능입니다. 바로 조금 전에 그물을 던지고 던져 고기가 뻔히 안잡히던 그 자리에 그물을 내리라는 겁니다.

셋째, 분위기상 불가능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밤을 세워 지칠대로 지쳐있어 또 시행착오를 할 만큼 여유가 없었습니다.

넷째, 명령 대상의 불가능입니다. 베드로 자신은 이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진 어부요, 지금 명령하는 예수님은 직업이 무엇입니까? 목수, 그것도 전직 목수요 현직 실업자입니다. 그러나 순종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열정과 집념이 있고 끈기가 있는 사람의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감정적이기 쉽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기가 쉽상입니다. 그래서는 하나님의 일을 바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열정은 어디까지나 부드러운 열정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집념과 끈기는 말씀에 순종하는 집념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성경을 성경이라고 하고요 카톨릭 신자들은 구약과 신약사이에 외경이라고 하는 것을 믿습니다. 신학교 도서관에 가면 정경도 외경도 아닌데 예수님의 많은 글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치는 없지만 퍽 재미있는, 가끔은 교훈을 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위경이라 이름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곳 저곳 전도를 하러 다니시다가 제자들에게 "얘들아 오늘은 소풍가자." "어디로 갈까요." "감람산으로 가자." 예수님께서 산 밑에 도착하시더니 "얘들아! 너희들 역량껏 큼직큼직한 돌을 하나씩 골라라." 제자들은 묵직묵직한 돌을 하나씩 품에 안았습니다. 그런데 불평 많은 가롯 유다는 바둑알 만한 것 두 개를 손에 들고 공기를 하면서 투덜투덜하면서 불평하면서 올라갔습니다. '소풍 가자고 그러더니 일 시킨다구.' 예수님께서 언덕 위에 올라가시더니 "얘들아 내려 놓아라." 손을 번쩍 드시고 축사하시고 "아멘" 하고 나니까 가지고 온 돌멩이들이 몽땅 다 빵으로 변하고 고기로 변하고 먹을 것으로 변했습니다. "얘들아 점심 먹자. 오늘은 지가 가지고 온 것 지가 먹기다.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서는 안되느니라." 다른 제자들은 배가 부르도록 먹었는데 가롯 유다는 카스테라 부스러기 두 개를 손에 들고 이걸 가지고 점심을 때울 생각을 하니까 기가 차네요.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는 사이에 콧바람에 하나가 날라가 버렸습니다. 아 입에 넣었는데 얼마나 기가 막히게 맛이 있는지 그때부터 예수님만 만나면 "소풍 안 갑니까? 예수님 소풍갑시다." 노래를 부릅니다.

가을녘에 다시 소풍갔습니다. 이번에도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감람산에 도착하더니 예수님께서 "얘들아 오늘은 주먹만한 돌멩이 서 너 개씩 호주머니에 집어 넣어야 하느니라." 다른 제자들은 주먹만한 것을 찾아서 야단법석이 났습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지난 번에 못 먹은 본전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강대상 반쪽 만한걸 어깨에 걸머졌습니다. 이번엔 얼마나 멀리 가는지 골짜기를 넘어 강을 건너갑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따라갔지요. 언덕 위에 오르시더니 "내려놓아라." 손을 번쩍 드리고 축사하시는데 가지고온 돌멩이는 돌멩이 그대로 있고 바위는 바위 그대로 있습니다. "얘들아 위를 쳐다 보아라." 쭉 뻗은 나뭇가지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가지고 온 돌멩이로 따 먹어라. 돌멩이를 빌려 줘서는 안되느니라. 지가 딴 것 지가 먹기다." 다른 제자들은 던지니까 왕창 왕창 쏟아지는데 가롯 유다는 바윗덩어리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땀 뻘뻘 흘리다 왔다는 얘기지요.

있음직한 얘기도 아니고 실제 있었던 일도 아닌 줄도 압니다만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이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 명령을 가감하지 말고 순종하라. 너희는 하나님의 명령을 에누리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순종하라. 말씀 앞에 깨끗이 순종할 때에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영적인 부흥을 보기 원하는 사람들은 내가 말씀대로 순종하다가 망해도 좋다. 말씀 앞에 깨끗이 복종할 때에 이 역사에 커다란 부흥을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3. 셋째, 순종하므로 그물이 에워지도록 고기를 잡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5절에서 "선생님!" 하던 호칭이 8절에서는 "주여!"하고 달라집니다.

기적적으로 고기를 잡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밤새 고기 한 마리 못잡은 것도 이상하고 이 멀건 대낮에 고기를 왕창 잡은 것도 이상하단 말입니다. '아하 이분은 물고기까지도 통솔하시는 분이시구나' 베드로가 그물을 오른쪽에 던지면 예수님이 언덕 위에 서셔서 물고기를 쫓으시는 겁니다.

오른쪽에 있는 물고기를 왼쪽으로 이동 이동, 앞으로 던지면 뒤로 이동 이동. 그리고 깊은데 고기를 잔뜩 모아 놓습니다. 갈길리 바다에 있는 고기들 여기 집합! 10열 종대로, 아래 위로 입체로 집합!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여기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러신 것입니다.

물고기를 통솔하시는 예수님! 파도를 다스리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 그분 앞에 베드로는 주여! (큐리에) 하고 꼬꾸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베드로를 찾으신 세 번째 이유였습니다. 

어부를 부르신 예수님 못난 어부들이 자신의 인생중심에 예수님을 모실 때에 저들을 통해 세계 역사를 뒤집어 놓으실 작정이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황제를 통해 어부를 부르시지 않고 어부를 사용하셔서 황제들을 주님 앞으로 이끄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출발이 예수요, 마침이 예수입니다. 예수 믿고 얻은 것이 예수요 예수 믿고 남은 것이 예수입니다. 앞을 봐도 예수요 뒤를 봐도 예수입니다. 속을 봐도 예수요 뒤집어 놓고 봐도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 그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오 우리의 전부입니다.

유명한 피카소의 작품 중에 도무지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가치있는 '황소머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의 재료는 쓰레기장에서 얻어 온 낡은 자전거라고 합니다. 때문에 피카소는 "쓰레기는 위대한 가능성을 가졌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쓰레기에 누구의 손이 닿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피카소의 손이 닿을 때 스레기장에 버려진 고물 자전거가 놀라운 가치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주님의 손길이 닿으면 인생의 값이 달라집니다. 버려진 인생이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능력이 달라집니다. 


IV. 내려놓기

예수님을 바로 알고나니 자신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전능하신 그분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각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안 베드로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했습니다. 늘 우리는 그분 앞에 무능한 종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가 변화되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태산처럼 쌓여있는 배 위의 고기를 바라보니 그것들 마저 다르게 보였습니다. 

본문 마지막 11절을 보십시오.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주신 축복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주신 복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병에서 나았으면 왜 건강을 주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물질을 받았으면 그것을 주신 이유가 있는 게고. 지위를 받았으면 거기 오르게 하신 목적이 있는 겁니다. 그것 깨닫고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내 생명이 온천하 보다 귀중하지만 이 목숨 역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에만이 그 생명의 존재 가치와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게 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살아가게 되면 자신이 꽤 괜찮은 존재인 줄로 압니다. 그래서 I'm something - 나는 꽤 괜찮은 존재야.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전능하신 그분 앞에 붙들리고 나면, 처음 예수를 믿고 나면, 그분의 사랑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분의 능력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때 고백하는 말이 있습니다. I'm nothing -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자신이 꽤 괜찮은 신앙인이라 생각하고 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던 로이 로버츠(Roy Robert)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탄 전투함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는 동안 동료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하나씩 말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외울 수 있는 구절 하나도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기억해낸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는데 바로 앞 사람이 그 구절을 말해버렸습니다. 순간 그는 정신적 공항에 빠졌고 자신이 발가벗고 서 있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날밤 성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로버츠 너는 가짜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You're a fake, You're Nothing)." 

다음날 아침 7시 55분에 그는 전투 대형을 명령하는 배의 경적 소리를 듣고 깨어났습니다. 360대의 일본 함대의 비행기가 그가 탄 배와 다른 군사 시설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료 승무원과 함께 기관총이 장착된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훈련용 가짜 총탄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일본 비행기를 놀라게 하려고 그 가짜 총탄을 목표물을 향해 맹렬하게 쐈습니다. 그 가짜 총탄을 쏘면서 그는 생각했습니다. '로버츠! 이렇게 그리스도를 향해 가짜 총탄을 발사하는 것이 이제까지 네가 살았던 방법 아니었느냐?' 그는 가짜 총탄을 쏘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신앙생활을 한탄하며, 일본군의 총탄이 배 위로 퍼부어지는 순간에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곳에서 살아남게 되면 앞으로 남은 인생은 주님을 위해 보다 진실하게 살겠습니다." 그후 그는 네비게이터 선교회를 창설한 도슨 트롯트만을 도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 시간 주님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분께 당신의 생을 드리시지 않겠습니까? 

미끼를 들고 고기를 잡던 베드로는 주님의 장엄한 부름앞에 자신이 기꺼이 하나님 나라의 미끼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물을 들고 바다로 나갔던 베드로는 그물을 버려두고 자신이 하나님의 그물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본문에 그물이 많이 나오지요? 제일 먼저 빈 그물이 나옵니다. 실패와 좌절의 그물입니다. 씻어 두었던 그물이 나옵니다. 포기했던 그물입니다. 말씀을 듣고 다시 던지는 그물이 나옵니다. 재도전하는 그물입니다.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투두둑 투두둑 찢어진 그물이 나옵니다. 주님의 풍성을 다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한 믿음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고기를 잡고, 주님의 부름을 받고 버리는 그물이 나옵니다. 주님만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주님만을 따라 살겠습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죽어도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결단하는 그물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의 밤, 갈릴리 바다로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당신은 어떤 어두운 인생 길을 걷고 계십니까? 당신을 찾아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버리시거나 싫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연약합니다. 고백할 때에 천지를 창조했던 강력한 손으로 여러분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주님의 손을 거절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거절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문 열고 나를 맞이하려무나 주님께서 노크 할 때에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쓰실 줄로 믿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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