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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운명을 바꾼 만남 (눅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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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꾼 만남 (눅 23:39~43)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어떤 사람과의 만남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만남도 있습니다. 그 만남은 운명을 바꾸어 놓는 중요한 만남입니다. 영국 수상을 지낸 처칠은 부자 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연못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빠져 죽게 되었을 때 같이 놀던 가난한 집 아이가 그를 건져줍니다. 

처칠의 아버지가 그 아이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의학공부를 시켜 유명한 의사를 만듭니다. 이 둘의 만남은 좋은 만남입니다. 이런 좋은 만남은 인생과 운명과 미래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만남입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처칠이 어느 날 폐렴에 걸려 약이 없어 꼼짝없이 죽어갈 때 그때 물에 빠졌을 때 건져준 친구 의사가 와서 “아직 실험 전에 있는 약이지만 한번 투약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투약하라”고 해서 고침 받은 약이 페니실린이고 그 친구 이름이 페니실린을 개발한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이 둘의 만남은 좋은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좋은 만남은 서로의 인생에 변화를 줍니다. 사람은 살아가는데 이 만남이 참 중요합니다. 성경에 그런 만남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만남도 그 한 예입니다. 엘리야가 선지자 생활을 하다가 이제 역할을 끝날 때가 되어 이제 후계자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엘리사 찾아갑니다. 그때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자 순순히 따라나섰습니다. 그래서 농사꾼 엘리사는 하루아침에 선지자로 발탁을 받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많은 능력을 행한 선지자 입니다. 

그런데 그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는 농사꾼 출신 엘리사가 그 훌륭한 선지자로부터 부름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엘리사는 훌륭하게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하여 마침내는 스승 엘리야보다 갑절의 능력을 행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둑했던 시대에 대 선지자로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이상적인 만남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강도 만난자와 사마리아인의 만남도 좋은 만남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여행하려면 광야를 지나가야 합니다. 그 광야를 지나가려면 강도를 만나기 쉽습니다. 

한 여행객이 여행하다가 혹시나 했는데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다 빼앗기고 매를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 제사장 한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걸음을 재촉하여 빨리 그곳을 빠져나갔습니다. 혹시 강도들이 자기에게도 쫒아올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레위인이 길을 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역시 또 도망가듯 빠져나갔습니다. 혹시 자기도 화를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이 죽게 된 것을 목격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마차에 태워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비를 다 주고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유대인들의 무책임을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 보기를 짐승 보듯이 부정한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가던 유대인이 그것도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 그룹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곤경에 처한 사람보고 회피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그토록 무시당했지만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조해 살려냈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직무유기 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날 이 강도만난 사람이 사마리아인을 만나지 못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이 만남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신학교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연구하여 학점에 반영하겠으니 일주일 후에 연구 과제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5일째 되는 날 이 교수가 학생들에게 긴급 문자를 보내어 “내일 아침 10시까지 과제물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모두 헐레벌떡 과제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교수는 거지차림으로 정문 앞에 서서 학생들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모른 체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모두 낙제점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도 마음이 켕기고 께름칙한 사례가 있습니다. 지방에서 목회할 때 어느 추운 날 한밤중인데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눈을 떠보니 새벽 2시였습니다. 밖에는 눈보라가 치는 바람소리가 음산하게 들리는 밤이었습니다. 급히 인터폰을 들어보니 어느 여인의 떨리는 목소리로 “추워 죽겠으니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새벽 2시인데 그 밤은 아주 추운 겨울밤인데 어느 여인이 추워 떨리는 목소리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합니다. 40세 전후의 여인 목소리로 가냘프고 떨리는 목소리였습니다. 그 순간 말문이 막혔습니다. 지금 시간이 새벽 2시인데 재워줄 방은 없고 또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저는 순간 인터폰을 들고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백 미터 내려가면 교회에  따뜻한 내실이 있으니 거기서 하루 묵으라”고 말하고 끊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을 자려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혹시 주님이 나를 시험하시려는 것은 아닐까, 아닐 거야, 교회로 갔을까.” 그때부터 후회와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집이 좁으면 나가서 그를 데리고 교회로 가서 여기서 자라고 했어야 하는데 별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새벽예배 때까지 뜬 눈으로 새우고 불안한 마음으로 새벽 일찍 예배에 나갔습니다. 가서 찾아보니 없었습니다. 오늘까지 그를 찾지 못했습니다. 미스터리입니다. 나를 시험하신 건 아닌가 하는 별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며칠 동안 뉴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혹시 어디서 얼어 죽은 여인이 없는가.” 그때 그 일이 오늘까지 내 마음에 짐이 되고 있습니다. 왜 오늘까지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가 하면 내가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입니다. 

어느 부부가 자는데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일 내가 너희 집에 갈테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잠을 깬 후 남편이 아내에게 그 꿈 이야기를 하자 부인이 나도 그런 꿈을 꾸었다고 놀라워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준비하고 기다렸습니다. 저녁때가 되니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밖에 거지아이가 떨고 서 있었습니다. 순간 실망하고 귀찮았지만 그 아이에게 식사와 옷과 양말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밤이 늦었는데 또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니 이번에는 노인 거지가 왔습니다. 그래서 옷과 밥을 주어 보냈습니다. 그리고 기다려도 그 밤에 누구도 오지 않아 잠을 자는데 꿈에 예수께서 나타나시더니 “나를 잘 대접해 주어서 고마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언제 오셨습니까”하고 물으니 “아이로, 노인으로 갔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오늘까지 마음이 켕기는 것은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이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른 곳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웃에서, 소외자에게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강도만난자의 비유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이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만남은 운명과 인생과 삶을 바꾸어 놓은 만남입니다. 

또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사람들이 붙잡아 옵니다. 당시는 현장에서 잡힌 간음자는 사회법에 의해서 돌로 쳐 죽일 때입니다. 이 여인은 꼼짝없이 돌에 맞아 죽을 운명에 처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끌고와서 죽일까요 살릴까요 하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죄가 없는 사람이 그 여인을 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사람 두 사람 다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여인 혼자만 남았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세상에는 죄인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신도 죄를 지었지 않느냐”하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무섭게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 여인이 아주 절묘한 순간에 그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 혼자 있었더라면 사람들의 손에 들린 돌에 맞아 그 여인은 그날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만남입니까. 또 어부들과 예수님과의 만남도 있습니다. 어부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닷가의 고기잡이 삶은 초라한 삶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제자들이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도 아니고 대학도 아닌 갈릴리 바다로 가셨습니다. 그곳은 빈약한 사람들이 살고 그 시대의 소외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고기잡이 현장을 찾아와 그들과 만나 대화하셨습니다. 그 대화 후 나를 따르라고 하자 그 어부들은 주저하지 않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날 아침 이 만남은 그 어부들의 운명과 인생과 삶과 목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후 그 제자들은 처음에 실패를 거듭하였지만 후에는 결국 화려한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개인의 삶에서 전도자의 삶으로 변화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생에 목적을 둔 사람들이 하늘의 사명을 부여받은 전도자들이 된 것입니다. 어느 날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그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들의 인생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십자가상에서 강도와 예수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좌우에 매달린 강도 둘과 죽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그들 이름이 누구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외경인 도마복음에 의하면 왼편 강도는 게스타이라는 사람이고 오른편 강도는 데스마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이 두강도가 당시 십자가에서 사형 받을 정도면 그들은 로마 전복을 노린 범행자들일 것이 분명합니다. 당시 로마가 가장 싫어한 것이 사회불안 야기와 봉기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두 강도가 십자가에 달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왼쪽의 강도 게스타이는 예수를 욕했습니다. “왜 말이 없냐, 생전의 기적을 일으켜 내려 보라, 우리도 구원해 보라”고 소리를 지르며 욕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른쪽 강도 데스마이가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는 묵묵히 고통을 이겨가는 예수에게서 거룩하심을 발견하고 그분이 메시야임을 믿게 됩니다. 아주 중요한 안목이 열린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이런 안목이 발휘된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강도에게 “우리는 죄를 지었으니 죽어 마땅하지만 여기 이 분은 선한 일만 했는데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말조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고 당부합니다. 그 말은 이 강도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였다는 말입니다. 이 죄수는 죽음 앞에서 진실해졌습니다. 이 죄수는 죽음 너머의 메시아 왕국을 바라보았습니다. 좌편 죄수와 너무 차이가 있고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강도는 옆의 예수님의 모습에서 신적인 권위를 발견하고 메시야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후의 문제를 주님께 부탁하였고 주님은 쾌히 낙원에 그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이 둘의 만남이 얼마나 축복의 만남입니까. 결국 이 두 죄수는 가장 중요한 시점에 영생과 영벌로 나뉘어졌습니다. 이 오른편 강도는 죽기 몇 분 전에 그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사람이 하루 믿고 천국간 사람이라고 합니다. 인생은 참 오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생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인생의 책임 

하나는 인생에 대한 책임입니다. 사람은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삶 후에는 삶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알곡과 가라지, 열 처녀 비유, 양과 염소,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들이 나옵니다. 모두 인생의 책임을 말하는 비유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생명체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그래서 식물도 다 열매로 책임을 집니다. 생물은 번식으로 책임을 집니다. 인간은 삶 내용으로 책임을 집니다. 이 강도는 삶의 내용으로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거기다 사형수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고백하여 영혼이 구원을 받습니다. 말하자면 막차가 지금 막 떠나려는데 늦게 온 손님이 가까스로 막차를 탄 모양새입니다.    


인생의 변화 

이 만남은 단순히 구원만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변화를 가져옵니다. 조지 휫필드는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청소년 때 비행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8세 때 전도를 받고 옥스퍼드 칼리지에 진학합니다. 거기서 필드는 요한 웨슬레를 만납니다. 이 둘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의 계기가 됩니다. 웨슬레와의 만남은 휫필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휫필드는 웨슬레를 통해서 구도의 길에 들어서고 마침내 그 유명한 전도자가 됩니다. 얼마나 감사한 만남입니까. 좋은 만남은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진정한 복 

궁극적으로 좋은 만남은 그 자체로서 복입니다. 사람들은 복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복 받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런데 무엇이 복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5복 즉 수부귀강령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5복이라는 것이 100% 이생적입니다. 100% 이생적이라는 말은 진정한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노년에도 5복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5복이 남자와 여자가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남녀 모두 건강, 돈,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4,5번째 조건이 남자와 여자가 다릅니다. 남자는 아들과 아내가 있어야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딸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나이 들어 남편이 없어야 복이라고 합니다. 웃지 못 할 오늘의 세태를 비유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알고 사는 것입니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에너지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에너지에 의해서 불이, 동력이, 자전이 이루어지고 식물이 자라고 물이 흐르고 자연계가 돌아갑니다. 사람의 인체에도 에너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이들이 하루 종일 뛰는 것은 에너지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인들은 종일 앉아있습니다.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그렇습니다. 고갈되면 각종 병이 유발됩니다. 병은 에너지 결핍으로 발생됩니다. 에너지가 결핍되면 피가 잘 돌지 않습니다. 그러면 곧 피로감이 찾아오고 기쁨과 행복이 사라지고 그러다가 인생이 소멸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만나면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해 채우시고 그때 내안에서 새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그 에너지가 내게 행복을 주고 힘을 주고 충만함을 이룹니다. 그것이 곧 성령충만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죽는 순간까지 사역하고 일하고 전도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의 열쇠는 하나님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제 1조를 보면 인생의 목적을 묻고 그 해답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묻습니다. 모든 사고의 출발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근본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삶의 원리이고 신앙원리입니다. 이것을 알면 나머지 일은 다 해결되고 저절로 풀리게 됩니다. 그 후에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만난 것이 축복입니다. 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를 보십시오. 얼마나 큰 은혜이고 복입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이런 엄청난 초대는 예수 안에서 들어갈 때만 주어집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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