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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의 제사를 드리자 (시 1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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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제사를 드리자 (시 122:1~4)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세 자녀를 둔 한 가난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새로운 학기가 되자 이것저것 걱정거리가 많아졌습니다. 그 걱정 중에 하나는 아이들에게 각각 새 운동화를 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웃 동네에 일을 갔다가 쉬는 참에 친절한 주인 부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무심코 자기 아이들에 대한 걱정을 불평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
“두 아들 녀석들은 손수레를 타면서 발로 브레이크를 걸어 신발이 다 떨어졌고, 딸은 줄넘기를 너무 해서 신발이 다 헤어졌는데, 학교 가기 전에 새 운동화를 사주어야 할 일이 걱정거리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주인 부인의 얼굴이 갑자기 이상해졌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진심으로 자기 아이들의 신발 걱정을 하던 아버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에게 혹시 자기가 무슨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헤어진 신발 때문에 걱정을 하셨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어린 딸이 하나 있습니다. 이 아이는 태어난 후 한 걸음도 걸어본 일이 없지요. 만약 우리 아이가 신발을 한 켤레만이라도 닳아 못쓰게 신고 다닐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을 것입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곧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엎드려 자기의 불평을 회개하였습니다. 그 후, 아이들의 다 헤어진 신발을 보니 그렇게 감사하고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가난한 아버지에게 신발을 쉽게 떨어뜨리는 개구쟁이 아이들은 원망거리지만, 어떤 아버지에겐 자신의 아이가 신발 한 켤레라도 닿아서 못쓰게 하였으면 하는 것이 단지 소원 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헤어진 운동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불평하고 걱정하는 것이 사실은 깊이 감사하여야 할 것일 수 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던 것에서 오히려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조건을 보는 것이 신앙의 눈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감사를 위하여 얼마나 열려져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자는 ‘매우 종교적인’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이야기와 거리가 먼 ‘거룩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람들이 갈구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원하는 ‘평화’에의 소망이 있습니다. 또한 모든 일의 ‘형통’을 기도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모든 사람이 갈망하고 있는 이러한 ‘기쁨’과 ‘평화’와 ‘형통’을 위하여 한 사람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올라가고 있습니까? 어디로 올라가자고, 어떤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1절 말씀입니다.
   :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시인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기뻤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자고 하는 것을 기뻐하였으니 자신이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는 것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시인의 발걸음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예루살렘 성문 안에 들어섰습니다(:2). 그는 예루살렘에 대한 찬사를 빼놓지 않습니다. 시인에게 예루살렘은 모든 것이 치밀하게 갖추어진 성읍이었습니다(:3).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신 장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루살렘을 성지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의 종교적 수도인 예루살렘을 우리의 영원한 본향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있을 뿐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영원히 거하시는 곳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재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올라가야 할 곳은 그 어떤 장소가 아니라 그 어떤 상태입니다. 우리는 

I.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올라가야 할 예루살렘은 중동의 이스라엘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은 이 세상 어느 곳이든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누리기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임마누엘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1791년 3월 2일 오전 10시 88년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열흘 전에 마지막 설교를 하고 기력이 쇠해져서 병석에 누웠습니다. 병석에서 무엇을 쓰려고 했는데 펜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비서인 릿치 양이 “선생님 무슨 말을 쓰시려 합니까? 제가 쓰지요” 했습니다. 그 때 웨슬리는 “별로 쓸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 밖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기도하고 찬송해 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 웨슬리는 “아멘”을 크게 했습니다. 임종이 가까운 것을 보고 사람들이 웨슬리 선생이 누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웨슬리 선생은 사람들을 보고 두 손을 들고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고 했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무덤이 된 웨스트민스터 성당에는 요한 웨슬리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들 형제가 한 말 가운데 세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는 요한 웨슬리의 말과 “하나님께서는 그 일꾼을 장례하시나 그 사업을 계속하신다.”는 찰스 웨슬리의 말, 그리고 요한 웨슬리가 임종할 때 남긴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말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사모하고 나아가야 곳도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전으로 나아가려고 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함께 있기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4a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II. 그 이름에 감사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에서 ‘감사하다’[hd:y/야다]는 매우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던지다, 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등등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말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고백’(confession)이라고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그 분이 하신 일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고백은 찬양입니다. 그리고 그 찬양은 대개 감사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왜 예배당에 나왔습니까? 우리도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오늘 이 예배당에 나왔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 믿음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두 여행자의 이야기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던 두 사람이 몇 날 몇 시에 어느 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가려면 말을 타고도 며칠을 가야했고, 거기다가 험한 지역도 지나야만 했습니다. 드디어 두 사람이 약속한 장소에서 만났을 때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여보게 내가 오다가 중간에 겪은 일을 들어보게! 내 말이 길을 오다가 갑자기 뭔가에 깜짝 놀라 뛰는 바람에 내가 말 등에서 땅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지 뭔가. 다행히 아무 데도 다친 곳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다리라도 부러졌더라면 큰일 날 뻔했지 뭔가! 나는 즉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것을 감사드렸다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갑자기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의 말을 들으니 나는 자네보다 훨씬 놀랍고 기적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했다네. 내가 탄 말은 아무 사고 없이 나를 이곳까지 태우고 왔다네. 이 어찌 감사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여태 그것을 모르고 있었네!”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 않은 사람과, 말에서 떨어지지 않은 사람 중에서 누가 더 감사하여야 할까요? 당연히 말에서 떨어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어려움을 겪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비로소 소중한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할 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매우 예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 있던지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임재 속에 머물러 있기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감사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의 입에서 감사의 말이 많이 나오는가요 아니면 불평의 말이 많이 나오는가요?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온천이 솟고 그 바로 옆에 얼음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올랐습니다. 동네 여인들은 빨랫감을 가지고와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구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관광객이 안내하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참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참으로 많겠지요?”
   
그러자 안내원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천만에요. 이 마을 사람들은 불평이 더 많습니다.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는 것은 좋은데 빨래 비누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욕심에 끌려 다니는 동안에는 결코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알지 못합니다. 설혹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하며 찬송하던 사람들도 상황이 조금만 나빠지면 근심하고 염려하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기 십상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속적인 감사함으로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이끄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4절 후반절입니다.
: 4b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전례대로’ 올라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전례[tWd[/에두트]라는 말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이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율법과 동의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지켜야 할 것을 율법으로 정하여 놓고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일도 율법을 정하여 놓고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법으로 정하여 놓고 반드시 지킴으로 감사하도록 하였습니다.


III.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켰습니다.
   
지치기 쉬운 육신을 입고 있고, 상처 받기 쉬운 감정을 가진 인간이 모든 일에 감사하고 언제나 기뻐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기조차 합니다. 감사하기는커녕 도무지 예배의 자리에 나오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법으로 전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였고, 감사절을 지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하고 싶지 않을 때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킴으로 강제로(?) 감사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웃을 일이 있어서 웃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으라고 하는 것은 커다란 곤욕입니다. 그러나 웃을 수 없는 형편이지만 웃으려고 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웃을 일이 없어도 웃으면 웃을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기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정하여 감사하도록 하셨습니다. 찬송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전례를 따라서 감사의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신앙의 신비는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많아지고 불평하면 불평할 일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신비를 가장 잘 알았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을 향하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고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하늘의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는 기쁘기 때문에 기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기뻐하였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미국 프로야구 LA 다저스 팀의 명 투수였던 토미 라소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집안은 매우 곤궁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아버지는 항상 웃으면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야!”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이를 못 마땅히 여긴 라소다는 아버지에게 투덜댔습니다.

“아빠는 채석장에서 트럭을 모는 고된 일을 하셔야 하고, 엄마는 관절염으로 병원에 다니시고, 먹이고 입혀야 할 아이들이 다섯이나 있어 늘 어려운 형편인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니요?”
   
그러자 라소다의 아버지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얘야 알고 싶니? 빈털터리였던 내게 지금은 멋진 아내와 다섯 명의 착한 아이들이 있고, 가꿔야 할 집도 있고, 고물이지만 몰고 다닐 수 있는 차까지 있잖니?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야. 얘야. 네게 웃음이 없다면 내 웃음이라도 빌려가거라.”

이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얘야. 네게 웃음이 없다면 내 웃음이라도 빌려가거라.”

사람들은 없는 웃음을 억지로라도 만들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웃음을 빌려서라도 기뻐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감사를 빌려야 합니다. 앞으로 있을 것을 바라보면서라도 감사하여야 합니다. 성경의 사람들이 감사하며 살았던 것을 배워야 합니다. 힘들지만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감사를 도적맞으면 모든 것을 도적을 맞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평과 원망이 지배하는 곳에는 아무리 많은 것이 있어도 가난한 곳입니다. 우리는 감사를 훈련하여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전례를 따르는, 절기를 지키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분이 적은 글을 옮깁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닦아야 할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 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데다가, 차도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입니다.
․온 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모임을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너무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불만을 토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래도 내게 친구로 가까이 있음이 아니던가요?
   
우리는 감사를 훈련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는 마음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감사는 바로 마음의 밭을 풍성하게 가꾸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기쁨과 평화와 형통을 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감사하기 위하여 올라오라고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영생의 성도들이 이 예배당에 모일 때마다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되 특별히 ‘감사의 노래’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5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19-20)라고.
   
찬양대가 성가로 노래해야 합니다. 예배당에서 모이는 각 부에서, 각 기관에서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각 사람,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어떤 바쁘고 분주한 일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찬양입니다. 범사에 찬양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또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를 짓고 그 곡식을 거두어 하나님께 드리면서 감사를 했는데 우리는 한 해를 살아온 일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주간을 지나시면서 생활 속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감사의 예물’은 이런 감사의 찬양과 감사의 기도에 따라 믿음의 분량의 따라 드리십시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모여올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과, 감사의 기도, 감사의 마음을 드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와 형통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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