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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자리를 내놓아라! (눅 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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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리를 내놓아라! (눅 14:7~11) 
 
 
❚상석이 어디인가?

여러분, 상석(上席)이라는 말 아시지요? 윗자리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유난히 예의범절 따지는 사람들은 이 ‘상석’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상석은 어디일까요? 상석과 그 반대말인 말석(末席)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인 에티켓 상으로는 출입문에서 가장 먼 자리가 상석이고, 출입문이 보이지 않는 자리, 긴 탁자의 경우 오른쪽 제일 앞자리가 상석이라고 합니다. 참고하십시오. 그런데 좀 더 예의범절을 많이 따지는 경우는 훨씬 복잡해진다고 하네요.

①동쪽과 서쪽 중에는 동쪽이 상석 ②중앙과 양 끝 중에는 중앙이 상석 ③북쪽과 남쪽 중에는 북쪽이 상석 ④높은 곳과 낮은 곳 중에는 높은 곳이 상석 ⑤앞쪽과 뒤쪽 중에는 앞쪽이 상석 ⑥편리와 불편 중에는 편리한 곳이 상석 ⑦깊은 안쪽과 얕은 바깥쪽 중에는 깊은 쪽이 상석 ⑧안전한 곳과 위험한 곳 중에는 안전한 곳이 상석 ⑨상석에 가까운 곳이 상석 ⑩남자와 여자는 남자가 상석 등입니다. 정말 복잡하지요? 하지만 그냥 듣고 잊어버리십시오. 제가 지금 말한 기준을 애써 외울 필요도, 열심히 메모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좋은 자리, 편한 자리가 상석이다 하고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하지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상석에 앉으실 때는 좀 먼저 생각을 해보고 앉으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본 교단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당선된 제주영락교회 김정서 목사님 축하연에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목회자들이 참석했는데 제가 제일 먼저 도착했어요. 

둥그런 테이블이 몇 개 차려져 있는데 제가 제일 먼저 가다 보니 다 비어 있어요. 어디 앉을까 고민하다가 제일 바깥 쪽, 그러니까 입구에 제일 가까운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기가 상석입니까? 말석입니까? 말석이에요. 그것도 제일 바깥 쪽 자리면 가장 말석입니다. 제가 여기 앉은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거기 참석한 목사님들 가운데는 제가 제일 후배거든요. 그러니까 알아서 제일 말석에 앉은 겁니다. 참 잘 했지요. 

한참 전의 일입니다. 어느 목회자 모임에 갔다가 그 때도 제일 먼저 도착했는데 나도 모르게 제일 안쪽 자리 상석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모임을 개최한 주빈이 오십니다. 당연히 제 앞에 앉았습니다. 또 조금 있다가 목사님들이 하나 둘씩 오는데 총회장 지내신 어른, 노회장 지내신 어른, 은퇴를 앞둔 대선배 목사님이 오시자 제 자리가 한 칸씩 한 칸씩 옆으로 밀리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저 바깥쪽 테이블까지 밀리게 되었습니다.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후회가 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바깥쪽 말석에 앉을 걸 괜히 상석에 앉았다가 밀려났네” 싶습니다.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지요. 그 후로 저는 모임에 가면 일단 제일 말석에 앉습니다. 그러다가 혹 “이쪽으로 오세요” 하면 상석 쪽으로 가고 아니면 말고요. 이렇게 하면 적어도 상석에서 말석으로 밀려나는 창피는 당할 일이 없습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상석 말석 그렇게 따지냐 하는 분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은 단순히 세상 살아가는 처세술이 아닙니다. 이것은 엄연히 성경에 나온, 아주 영적으로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드리는 것입니다. 그 교훈은 바로 오늘 설교 제목처럼 “네 자리를 내놓아라”입니다. 도대체 어떤 자리를 어떻게 내놓으라는 말인가?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주인 자리를 내놓아라

첫째, “주인 자리를 내놓아라”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이 우리 집에 찾아오셨어요.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문을 열고 모셔 들여야지요. 주님을 모셔 들여서 잘 대접해 드려야지요. 최선을 다해 정성으로 대접해야지요.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 자리를 내드려야 합니다. 식탁에도 상석이 있습니다. 당연히 집주인이 앉는 자리입니다. 가장이 앉는 자리니까 내가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신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도 사극에서 보셨을 겁니다. 방안에 들어가면 주인이 앉는 자리가 있습니다. 문에서 가장 안쪽입니다. 거기에는 방석이 깔려 있고 뒤에는 병풍이 쳐져 있습니다. 여기가 집주인이 앉는 상석입니다. 그런데 집에 손님이 찾아왔는데 나보다 아랫사람이면 그 자리 내줍니까, 안 내줍니까? 안 내주지요. 그냥 주인 자리, 상석에 앉은 채로 그 사람을 만납니다. 하지만 손님이 찾아 왔는데 웃어른이 오셨어요. 어떻게 합디까? 얼른 내 자리를 내 드립니다. 주인 자리를 내드리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셨어요. 당연히 식사 대접하기 전에 내 자리부터 내드려야 합니다. 주인자리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후에 부를 찬송가 534장 가사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그런데 3절 가사가 재미있습니다. 같이 한 번 볼까요?

겸손한 자 찾도다 모시어 들이세 하늘에서 부르네 모시어 들이세

좋은 자리 드리고 주실 은혜 구하세 하늘 나라 세우세 모시어 들이세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일단 모시어 들이고 그 다음에 좋은 자리 내드려야 합니다. 내 자리, 주인 자리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에서 주님이 두드리고 계신 것은 물론 내 집 대문입니다만 본디 이것은 우리의 마음 문을 뜻합니다. 주님이 내 마음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하기 원하면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모셔 들이면 됩니다. 만약 주님을 영접하기를 거부한다면 주님은 내 마음에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일단 내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해 들인다면, 반드시 내 주인 자리를 그분께 내드려야 합니다. 왜요? 주님을 믿고 영접하기 전에는 내 마음의 주인이 나였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분명 나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기로 하고 나면 내 인생의 주인이 바뀝니다. 예수님으로 말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 주님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실제 ‘주님’이라는 말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이 주(主) 자가 주인 주 아닙니까? 영어로도 Lord, 지배자, 소유자,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겠다는 말은 예수님을 내 주인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님 소유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가정의 가장도 내가 아닌 예수님이요, 내 회사, 내 소유, 내 모든 것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각오가 아니고서는 결코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의외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삶의 주인자리를 주님께 드리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다니고 예수는 믿는다고 하는데 가만히 보면 아직도 내 삶의 중심이 예수님이 오셔서 내 주인 자리에 앉으시도록 모시지 못하고 그 주인 자리에 내가 앉아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 자리는 어디일까요? 제일 상석인 주인 자리에는 내가 앉고 그 다음 말석에 예수님을 앉으시라고 합니다. 언제나 내가 먼저고, 내가 우선이고 예수님은 그 다음이라고 합니다. 언제나 내 사정, 내 필요가 먼저고 신앙은 그 다음이라고 합니다. 언제나 내 생각, 내 주장, 내 고집이 우선이고 주님의 뜻은 그 다음이라고 합니다. 이래서는 절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나 자신뿐 아니라 재산도, 물질도, 명예와 권력도, 건강도, 가족이나 자녀도 그 어떤 것도 주님을 대신하여 내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요즘 잘 부르는 복음성가에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라는 가사처럼 예수님 외에 나는 물론이고 그 어떤 것도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려면, 정말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고 제대로 섬기기 원한다면 반드시 나 자신은 물론이요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고는 절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자리 중에 첫 번째로 “주인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정말 날 믿기 원하느냐? 정말 나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제대로 신앙생활 하기 바라느냐? 그렇다면 제일 먼저 네 주인 자리를 나에게 내놓아라. 그 후에야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와 더불어 먹으면서 나와 함께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주인 자리를 안 내놓고는 그 어떤 은혜도, 그 어떤 풍성한 삶도 기대하지 말아라” 하고 말입니다. 이 “주인 자리를 내놓으라”는 주님의 요구를 순종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상석을 내놓아라

둘째는 “상석을 내놓아라”입니다. 상석은 높은 자리라고 했지요? 남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인정받고 대접받으려는 마음을 아예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4장 7절부터 10절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제가 설교 첫머리에 언급한 대로 주님은 우리가 어떤 잔치나 모임 자리에 초청 받아 갔을 때 상석과 말석의 문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혼인잔치에 초청 받아 갔을 때 상석과 말석이 비어 있으면 높은 자리, 상석에 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가 저처럼 저보다 더 높은 분, 귀한 사람이 왔을 때 말석으로 밀려나면 얼마나 창피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한 것처럼 아예 처음부터 말석에 앉으라는 것이지요. 계속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도 있고 혹시나 주인이 와서 “이쪽으로 오세요. 상석으로 올라오세요” 하면 기분 좋게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세요. 이렇게 하면 절대 창피 당할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사회생활의 규범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원리입니다. 이것이 어떤 영적인 원리냐? 바로 7절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7절에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같이 한 번 읽어봅시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또 14장 1절도 읽읍시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 초청을 받아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착해 보니 벌써 바리새인나 서기관 등 많은 사람들이 초청을 받아 먼저 와 있는데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떡하니 상석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앉아 있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 원어에는 “기대어 누워 있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식사를 할 때 식탁 앞에서 비스듬히 기대 누워 식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비스듬히 누워서 소화가 되겠는가 싶지만 당시 풍습이 그랬던 것입니다. 자 한 번 이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예수님이 식사자리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이미 도착한 사람들이 식탁 앞에 비스듬히 누워 있습니다. 그것도 상석을 차지하고 말입니다. 초청자가 바리새인이니까 그 중에는 사회적, 종교적으로 존경 받고 늘 상석에서 대접 받아 버릇 하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많았을 테지요. 

그들이 예수님 오셨다고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일어나 인사하고 예의 갖추었을 리 만무합니다. 물론 예수님께 상석을 양보하는 사람도 없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한 소리’ 하신 것입니다. 자리 양보 안 한다고 기분 나빠서 쓴 소리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이 늘 인정받고 대접 받던 사람들의 극에 달한 교만을 보고 한 소리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잔치 자리 가서 상석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런 뜻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세상을 살 때, 특히 하나님을 믿을 때 스스로 인정받고 대접 받으려고 하지 마라. 그런 사람은 마치 주인이 상석에서 말석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하나님이 교만한 자리에서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시는 그런 창피를 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비유에 나오는 혼인 잔치가 예수님의 혼인 잔치인 천국 잔치요, 이 혼인 잔치에 초청한 주인은 하나님이시오, 그 초청을 받은 사람은 바로 우리들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교만해서 세상에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인정받고 대접받으려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낮은 데로 끌어내리시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먼저 겸손해져서 낮은 자리에 스스로 앉고, 모든 명예와 칭찬을 남에게 다 양보하고, 나는 사라지고 나는 없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잔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이 위로 올라오라고, 상석으로 올라오라고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결론인 11절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얼마 전 노회에서 한 선배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이 목사, 그 아무개 목사 있잖아? 그 친구 안 되겠더구먼.” “왜요?” “아니, 여러 목사님들이 함께 봉고차를 타고 가는데 지가 먼저 봉고차에 쏙 타서 맨 앞자리 차지하고 가잖아 글쎄. 그래서 나하고 선배들이 다 뒷자리에 타고 갔어.” 봉고차도 왜 맨 뒷자리가 불편하잖아요. 안으로 쑥 들어가야 하고 자리도 편치 않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가 봉고차 말석이지요. 그런데 새파란 후배 목사가 어른들 다 계신데 제일 편한 앞자리 상석 차지하고 양보도 안 하더라고 흉보는 것입니다. “거참, 별 것도 아닌 봉고차 자리 하나 가지고 속 좁게 그러시네.” 싶었지만 저는 그 때 참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봉고차 타면 무조건 맨 뒷자리로 가라! 이게 어디 봉고차만의 문제겠습니까? 사람은 참 단순해서 이런 사소한 일 하나 가지고도 그 사람 됨됨이를 판단합니다. 봉고차 자리 하나 때문에 꽤 쓸 만한 친구가 되기도 하고 아주 몹쓸 ‘놈’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알아서 겸손하고, 알아서 양보하고, 알아서 낮아지면 절대 손해 볼 일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담임목사를 하다 보니 점점 저도 모르게 대접 받는 일에 익숙해져 갑니다. 어디를 가도 자동적으로 상석에 앉게 되고 자꾸 대접과 인정만 받으려 합니다. 어디 가서 주인공 대접 못 받으면 괜히 불편하고 불쾌해 지려고 합니다. 정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습니다. 

항상 대접 받는 데만 익숙하다가 주님 앞에 서서 인정 못 받든 불쌍한 목사 될까봐 겁납니다. 이럴 때마다 저는 아주 사소한 일 하나로 저 자신의 자세를 가다듬고는 합니다. 헌신예배나 외부 강사 오셨을 때 강사와 인도, 기도 등 맡은 순서자와 함께 저도 제가 맡은 순서는 없지만 강단에 올라갑니다. 그래서 “목사님 여기 앉으세요. 권사님은 여기 앉으세요” 하고 먼저 자리를 배정해 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예배 시작 전에 저는 아래로 내려오는데 나오면서 계단 밑에 벗어 놓은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 내려올 때 신기 편하게 돌려놓고 나옵니다. 여러분 몰랐지요? 제가 그렇게 한 것을 말입니다. 제가 지금 “왜 내가 한 일을 몰라주냐”고 하는 말 아닙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더 복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굳이 이 사실을 밝히는 것은 의외로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우리의 자세가 드러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봉고차 자리 하나에서 그 사람의 됨됨이가 판단되듯 주님은 우리의 아주 작고 사소해 보이는 행동이나 태도 하나에서 우리의 신앙적 됨됨이와 인격을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앉을 자리

말씀을 맺겠습니다. 얼마 전 아주 멋진 사진을 한 장 보았습니다. 어떤 노신사가 앞치마를 하고 대걸레를 들고 바닥을 부지런히 닦고 있는 사진이었는데 분명히 얼굴을 보면 이런 일 할 분은 아닌데, 아주 점잖고 왠지 품위가 느껴지는 노신사인데 왜 대걸레를 들고 바닥 청소를 할까 궁금해서 거기 붙어 있는 사진 설명을 보니 분당의 모 교회 장로님 한 분이 매 주 마다 교회에 와서 이렇게 앞치마를 두르고 손수 대걸레로 바닥을 청소한다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왠지 좀 품위 있게 생기셨다 했더니 그 장로님은 이름만 들어도 다 알만한 유명한 고위직에 계신 분입니다. 저에게 그 사진 한 장이 참 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부산의 한 교회에 방문했을 때 매주일 그 교회 장로님들이 교회 로비에서 성도들 구두를 닦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혹시 이 말을 듣고 우리 장로님들, 목사님이 지금 우리보고 대걸레질 하고 구두 닦으라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가 교회와 성도를 어떻게 섬길까 그 자세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제가 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목사가 목회한답시고 늘 인정받고 대접 받으려고만 하고, “나 목회하느라 되게 바쁩니다” 하는 핑계로 굳은 일, 남들 안 알아주는 일은 하려 들지 않고, “어떻게 담임목사 체면에 이런 일을 하랴?”고 스스로 정당화하며 살지는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제 뒤통수를 치는 듯 스쳐 갔습니다. 깊이 회개하고 앞으로 제가 먼저 구두를 닦아볼까 합니다. 시편 1편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저나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라 스스로 복 있는 자의 자리에 서지는 않았는지요. 내가 이렇게 복 받은 자요, 내가 이렇게 잘 나고 높은 사람이요 하며 자기도 모르게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특히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는 않았는지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입으로는 섬김을 말하고 사랑과 봉사를 외치지만 정작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스스로 높아지려고, 대접과 인정만 받으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진정한 섬김과 낮아짐을 실천하지 못하고 거창한 섬김과 겸손만 외친 그런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는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시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아무쪼록 우리가 현재 차지하고 있는 자리, 주인의 자리, 높은 자리, 상석 모두 포기하고 거기서 기꺼이 내려오기 바랍니다. 스스로 말석에 앉아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겸손과 섬김을 실천함으로 내 삶이 변화되고, 내 가정, 내 사업과 직장, 무엇보다 우리 교회를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기 바랍니다. 교회의 변화, 체질 개선은 결코 말로나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주 작은 섬김과 낮아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기꺼이 주님께 주인 자리 내드리고 스스로 상석 아닌 말석에 앉아 진심으로 서로를 섬기게 된다면 찬송가 534장 3절에 고백한 것처럼 “좋은 자리 드리고 주실 은혜 구하세 하늘나라 세우세 모시어 들이세” 우리의 삶에, 가정과 교회에 하늘나라를 이루어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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