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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라 (행 1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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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라 (행 15:12~29)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코 부족하지 않은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결코 불황을 겪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잠재적인 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다 구원받아야 될 대상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교회로 초청하려고 할 때 선뜻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첫 번째 이유는 담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당사자들의 반발, 또 저항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평양감사도 싫으면 그만이라고 교회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느끼게 되고 주저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이유는 이들이 오더라도 뭔가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적응을 하고 교회를 잘 다니고 있지만 새로운 사람의 경우에는 넘어야 될 장벽이 너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필요해요. 그러나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는 넘어야 될 장애물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별로 장애물이 없더라도 기독교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물을 마시려면 컵에 담아서 마십니다. 컵을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컵이 없으면 물을 담아 마실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가 교회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건 아니에요. 기독교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전하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그릇에 담아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그릇에 담아서 우리가 모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릇이 내용물을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할 때가 많아요. 사람들이 예수님은 좋아하지만 기독교는 좋아하지 않고 교회를 싫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은 예수님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고 또 교회를 통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그러므로 그릇이 그릇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에게 돌아오려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상의 상품을 주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견줄만한 것은 없습니다. 주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최상의 상품을 세상에 팔아야 될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사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이 문화적인 장벽입니다. 교회의 문화적인 장벽이 높습니다. 미국에 백만 명이 넘는 한인 교포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은 거의 미국인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공부하고 영어를 완벽하게 하는 2세들도 미국인 교회보다는 한국인 교회를 가고 싶어 합니다. 직장과 학교는 미국인들과 같이 다닙니다. 그러나 교회만큼은 같은 한국 사람끼리 다니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동질성을 통하여 영적인 것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에요. 선교학자인 도날드 맥가브란 박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올 때 문화적인 장벽을 넘으면서 오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소위 동질성 단위의 원리를 발표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콜럼비아 대학을 다닐 때 굳이 교회만큼은 할렘에 있는 흑인교회를 다니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장차 백인 ․ 흑인 ․ 히스패닉 ․ 동양 사람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대통령이 될 사람이라도 신앙만큼은 같은 흑인끼리 공유하는 정서와 문화 속에서 예수님을 알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화를 초월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담는 그릇은 문화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쉬운 예로 젊은이들은 찬양을 부를 때 서서 부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야 박수치기도 좋고 율동하기도 좋고 더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중년은 찬양을 부를 때 한 곡 이상을 서서 부르면 다리가 아프고 불편하고 어색해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장년은 찬양을 앉아서 부르는 것을 선호합니다. 

서서 부르든 앉아서 부르든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서서 부르는 것이 더 경건한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문화적인 차이인 것입니다. 또 찬양을 부를 때 박수를 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도 문화적인 차이입니다. 제가 국내에 와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을 위한 전도선교모임 집회를 가봤더니 그들은 박수치면서 찬양 부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박수를 치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들이 알아서 칩니다. 그러나 저희 교인들에 대해서는 저는 포기했습니다. 어느 것이 더 경건한 것이냐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이건 문화적인 차이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교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고 목회자의 입장, 공급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올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가능한 한 문화적인 장벽을 낮추는 것입니다. 미국 뉴욕시를 가면 리디머 교회라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가장 유수한 미국인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시는 팀 켈러 목사님이 교회를 창립할 때 창립 멤버들에게 이렇게 제안했다고 합니다. 

‘우리를 위한 교회를 만들지 말고 불신자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자!’ 아주 중요한 정신입니다. 그 정신이 리디머 교회를 지금의 그 유수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미 잘 믿는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면 이미 잘 믿는 사람들에게는 좋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불신자들에게는 거의 무의미한 단체가 돼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결코 적응하기 어렵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들과는 상관이 없는 단체가 돼버린다면 이 세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명에 있어서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최상의 상품을 세상에 파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실패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먼저 수요자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에서 공급자의 입장으로 생각을 전환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교회에 요구하고 내가 교회에서 받고자 하고 내가 교회에 원하는 것을 생각하는 차원에서 이제는 내가 어떻게 하면 불신자들을 돕고 내가 어떻게 하면 더 교회문턱을 낮추고 섬길 수 있느냐 하는 섬김을 받고자 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더 잘 섬길 수 있느냐 하는 입장으로 생각이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우선입니다. 그래야 문화적인 장벽을 어떻게 낮출 것이냐를 생각할 수도 있고 왜 그것을 생각해야 되는지를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섬김을 받는 자에서 섬기는 자로의 변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문화적인 장벽을 낮출 수 있을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처음 교회에 나왔을 때를 기억하면 됩니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어색하고 불편하고 아는 사람들이 없을 때, 처음 교회생활을 했을 때를 생각하고 불신자가 바로 그 사람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몇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첫째는 우리끼리만 쓰는 언어를 최소화해야 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끼리만 쓰는 은어, 전문용어들이 있습니다. 우리끼리만 통하는 교회에서만 쓰는 언어가 있어요. 

밖에서는 쓰지 않는 언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실을 평범한 언어로 말하면 됩니다. 평범한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에게 강림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오셨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또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보혈로 씻었다, 언제 우리가 보혈로 씻습니까. 피로 씻는 행위가 있습니까.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용어이지요. 우리는 그걸 이해하지만 안 믿는 사람은 아주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많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과장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처럼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숫자를 과장하고 자기 경험을 과장하고 감정을 과장합니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이고 감정을 고조시키면 그게 성령충만 인줄 압니다. ‘믿~씁니다!’ 하고 목소리를 높이면 믿음이 생기는 줄 아는데 그건 침이 튀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성령이 역사하시려면 사람이 좀 더 차분해져야 됩니다. 사람이 흥분하면 성령이 역사하는 게 아니고 사람의 감정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읽은 어느 신앙서적을 보니까 저자가 부흥회를 갔다가 부흥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성도들 중에 음란으로부터 건짐 받은 사람이 있다.’ 그 말을 저자가 듣고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했다고 합니다. 과연 일순간에 음란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게 가능할까. 그건 과장입니다. 적어도 남자의 경험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건 일평생 노력하는 것이지, 일순간에 어떤 경험으로 이제는 더 이상 여자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진다? 그건 기적이 아니고 장애입니다. 

그건 기적이 아니고 신체적인 장애입니다. 이건 과장입니다. 인간의 삶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그런 식으로 일순간에 욕심이 없어지고 더 이상 문제가 없고 그러면 성령으로 동행하고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 돼버리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겸손해야 됩니다. 우리의 실제 모습 이상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를 과대포장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가 불신자보다 깨끗하면 얼마나 더 깨끗하고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고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불신자에게 어필하는 것은 의로운 그리스도인의 모습보다는 정직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게 더 어필합니다. 거기에서 참된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믿고 확신하는 것에 대하여 강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니고 사람의 도움을 받고 사람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내 친절함을 보여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보여주려고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 해야 됩니다. 내 친절함으로 그 사람이 은혜 받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보여줄 때 그 사람이 회심하고 변화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서 주저해서는 안되고 내가 믿고 확신하는 것이 더 분명할수록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불분명하지만 유일하게 분명하고 확실한 것을 제시할 수 있는 데는 교회뿐입니다. 

그리고 불신자와 초신자에게도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만, 교회만 문턱을 낮추면 되는 게 아니고 처음 믿으려는 사람에게도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교회가 아무리 문턱을 낮추어도 당사자들도 마음을 열어야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배려해주기만을 바라고 자기는 변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건 미련한 것뿐만이 아니고 예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차원이지요. 

한국전쟁 시 맥아더 장군이 UN군 총사령관이었습니다.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이 맥아더를 만나서 의논을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맥아더는 전쟁을 지휘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미국 본토까지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이 장군을 만나기 위하여 비행기를 타고 웨이크 섬까지 날아왔습니다. 여기에서 이 두 사람이 만났어요.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장군을 만나기 위하여 웨이크 섬까지 날아왔으니까. 

대단한 배려를 한 것이지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계신 곳까지 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중간 지점까지 와주셨어요. 그 중간지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까지 와주셨어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까지 가야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있는 데까지 가야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최소한의 요구사항이고 우리는 이것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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