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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겔 3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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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겔 37:1~14)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37:6)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골짜기 가운데 가득한 뼈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가득한 뼈는 죽음을 가리킬 뿐입니다. 가능성이나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절망자체이고, 유익함이나 가치성을 찾아 볼 수 없는 무력하고 쓸모없는 현상을 보여 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마른 뼈와 같은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나, 우리는 믿음이나 희망, 또는 꿈의 가능성이나 약속을 잊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생명감을 상실한 것과 같이 모든 의욕이 메말라 죽은 자와 같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자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멋진 역할과 구실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의 목적이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긍지나 가치와 보람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그냥 그대로 주어진 대로 되는대로 적당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일상성의 모습은 아닙니까? 도저히 변화가 없을 것이며 될 수 없다고 단정하면서 살아가는 이미 지쳐버린 모습은 아닙니까? 이러한 질문과 같은 모습이 나의 것이라면 그것이 마른 뼈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뼈들이 살아날 수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엄청나게 큰 군대로 변화되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마른 뼈를 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때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고 하실 때, 에스겔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고 했습니다. 그의 대답은 “오직 하나님만이 그러한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하실 때에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젊은 제사장으로 그의 조국 유대왕국이 철저히 패망하는 것을 보고 겪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유린되고 성전의 거룩한 기물들이 탈취 당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자신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굴욕과 비애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에스겔은 동족 유대인들이 포로들의 집단수용소와 같은 그발 강가의 움막집에서 살면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한숨 짖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역사는 에스겔에게 있어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빼앗아 갔습니다. 회복할 수 없는 절망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나 민족적인 의식,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희망이나 기다림, 꿈을 기대하는 열심 등,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런 마른 뼈들의 모습이 에스겔 자신과 동족 유다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마른 뼈가 가득 찬 죽음의 골짜기가 바로 조국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실 때에 마른 뼈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본 미야자키현 하나카게마을의 ‘하나카게교회’는 ‘조비 마쓰’ 할머니께서 담임목사이십니다. 이 할머니 목사님은 만 90세의 고령임에도 교회를 섬기며 목회하고 계십니다.  
  
조비 목사님은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에 길거리 전도를 하던 구세군의 찬양소리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26세에 가난한 농부의 장남인 세 살 위인 ‘조비 야스모리’와 결혼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결핵의 중병을 앓을 때에는 기도함으로 질병에서 고침 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조비 마쓰 부부는 주일마다 2톤 트럭을 몰고 6시간거리의 미야자키시에 있는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하나카야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교회도 짓고 목회자로 헌신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가업인 농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체계적 신학공부와 전도에 대한 갈증이 커졌습니다. 막내딸이 운영하던 풀빵가게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70세가 되던 해에 선교신학교에 입학했고 6년 뒤에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조비목사는 하나카게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어느 대기업 사장이 300평 대지를 기증했고 어느 건설업체가 나중에 건축비를 받겠다는 조건으로 교회를 건축해주었습니다. 후일 그 건축회사 사장은 세례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교회건축비는 조비 목사님의 삶과 신앙이 신학교 동기생들의 도움으로 책으로 출간되고 선교위성방송CGN TV에서 사연이 소개되면서 일본각지에서 헌금이 들어와 해결되었습니다. 조비 마쓰 목사님은 86세에 고령에 교회를 건축하고 90세의 연령에도 인근 마을 2곳에도 교회를 건축하고자 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고령의 인생가운데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들을 살리시되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시는 역사로 이런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고 대언 하게 하셨습니다. 뼈들이 대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살아났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상실하고 절망 속에 살아가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하는 예언자들에게 들렸습니다. 바벨론 왕궁에서 일하던 다니엘에게도 들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민족에게 대언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다백성들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위하여 ‘남겨진 자들’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역사 속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새롭게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4절에서 “그 안에(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4: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동력이 있어.....” 라고 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지는 데서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1장 37절에서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읽던 중 루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루터는 그의 외적이고 행위적인 마른 뼈의 신앙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신앙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루터가 대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중세기의 죽어있는 교인들이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책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주는 책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살리고 변화시키며 축복된 인생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말씀이 여러분에게 대언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대언되는 설교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언되는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생명의 주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증거가 대언의 말씀으로서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 있는 복음이 되어야 한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님으로 대언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시기를 바랍니다. 


마른 뼈를 살리기 위해서는 대언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기가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에게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  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자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으시고 그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살아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이 생기는 하나님의 숨(breath of God)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숨, 곧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생명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가져야 인간이 살아있는 인간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무슨 기운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세속과 탐욕과 욕망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더럽고 냄새나는 기운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채워야 살아있는 생명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깊은 뜻을 주는 글을 읽어드립니다. ‘마음과 숨’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숨이 깊어지면 마음도 깊어지고 
  숨이 평화로우면 마음도 평화로워집니다. 
  짧은 숨이 길어질 때에 
  즉흥적인 흥분이 사라지고  
  얕은 숨이 깊어질 때에   만물을 대하는 생각의 깊이도 깊어집니다.
  숨은 곧 영의 현상입니다.    인간은 창조주께서 숨(생기, spirit)을 불어 넣어주시므로 
  생령되었기 때문입니다.(창2:7) “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신앙적 표현으로 볼 때에, 성령의 내적 충만을 뜻합니다. 성령께서 인간의 심령에 충만하셔서 내적 증거를 만드셔야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적 체험을 가져야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열매 맺는 살아있는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은 주먹을 움켜쥐고 살아가는 것과 같음을 봅니다. 움켜쥔 주먹 안에는 무엇인가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집착하고, 자기의 것이라면서, 극히 편협한 만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움켜쥔 주먹일 뿐입니다. 움켜쥔 것은 좁고 좁은 주먹안의 작은 것일 뿐입니다. 움켜쥔 그 주먹에는 새로운 것이 들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움켜진 주먹에 새롭고 많은 것들이 들려지기 위해서는 손을 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움켜진 주먹을 편다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 주먹 안에는 깨뜨리기 힘든 ‘나’라는 욕심의 이기심과 편협한 자기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죄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손을 움켜쥐고 펴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것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두 손을 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를 향하여 손을 열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두 손을 움켜쥘 때는 긴장하지만 두 손을 펼 때에 편안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움켜쥠에서의 자유를 맛보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도 때로는 움켜쥔 두 손과 같습니다. 믿음의 두 손을 편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작은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것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펼친 손은 잡을 수 있는 손입니다. 그러므로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향하여 움켜쥐고 있는 믿음의 손을 활짝 펼쳐놓아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들려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살아납니다. 생기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마른 뼈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로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11월 중에 두 가지 큰일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는 ‘알곡거두기 1+1 전도행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출애굽 준비를 위한 심령대부흥회’입니다. 이 두 행사는 마른 뼈를 살리는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마른 뼈를 살리는 역사가 부흥인 것입니다. 
  
부흥이란 말 히브리어의 ‘하야’(ה󰖷󰕗)는 ‘되살아나게 하다’, ‘살게 하다’의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부흥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마른 뼈를 다시 살리는 부흥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로서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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