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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른 예배, 살리는 예배, 성공적인 예배 (레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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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예배, 살리는 예배, 성공적인 예배 (레 10:1~7)
 
 
1. 예배 중심의 삶

성도 여러분,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 것 같습니까? 예, 예배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들이 많습니다. 어버이와 자녀의 관계, 왕과 그 백성의 관계, 목자와 양의 관계, 심지어 친구 관계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용어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들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배 받으실 분과 예배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입니까? 『禮拜學』에서는 예배를 “最上의 存在에게 표하는 敬意”라고 정의합니다. 즉 最上, 最高의 존재이신 하나님께 尊敬, 讚揚, 榮光을 드리는 것이 예배이지요. 창조주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실 분이고, 피조물인 인생은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사람의 삶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의 중심은 예배입니다. 성도는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를 통해 영과 육이 새롭게 되는 은혜를 받고, 또 새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 그 어떤 일 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이며, 삶의 근본으로서 예배의 성공은 신앙생활의 성공이며, 예배의 실패는 신앙생활의 실패로 직결됩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는 성도의 복된 생활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살아야 내가 살고, 예배가 살아야 가정이 살고,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예배가 살아야 이 땅이 살아난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고백하며 또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그 예배가 우리에게는 감격적이고 은혜가 넘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러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요소가 있다면,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 하실 수 없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에 나오는 예배 가운데서, 실패한 예배의 대표적인 경우를 살펴봄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예배’, ‘예배의 영광과 축복을 가로막는 예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나답과 아비후의 ‘실패한 예배’

1) 성막과 제사장

출애굽 하여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2개월 만에 시내 산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 산 정상으로 부르신 후, 율법과 제사제도에 관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일종의 誓約書 같은 것이고, 제사제도와 그 제사를 드릴 성막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곧바로 율법을 선포하여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성막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성막 제작이 완료된 것이 출애굽기 4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바로 성막에서 섬길 제사장을 세울 준비가 시작되었고, 그 후 아론과 그의 네 아들들, 즉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등 다섯 부자를 함께 제사장으로 세우는 위임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레8:5~28). 

본인들에 대한 위임식이 끝난 후,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첫 번째 제사를 드렸습니다(레9). 먼저는 자신들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를 드렸습니다(9:15~21). 이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祭祀하자, 하나님은 그들이 드리는 제물을 받아 주셨으며, 그 증거로서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제단 위의 제물을 사른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늘로부터 불이 내렸다고 하지 않고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9:24)”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제물에 불이 붙었는데, 이것은 사람이 붙였거나 혹은 自然的인 發火가 아니었습니다. 이 불은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이 살아 계신다는 것, 자기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신다는 것, 예배드리는 그 자리에 임재 하셨다는 것, 그리고 예배드리는 자들을 기뻐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처음 드리던 제사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스스로를 나타내시자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놀랐든지, 그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들의 얼굴을 가리고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레9:24). 

2) 제사장의 첫 공식적인 제사

이렇게 성막이 만들어지고 거기서 섬길 제사장들이 세워진 후,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다음날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 8일째 되는 날, 즉 아론과 그 아들들이 7일에 걸쳐 위임식을 한 바로 그 다음 날, 나답과 아비후는 성막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으로서 공식적인 사역이 시작되었고, 그 첫 번째 일로서 하루 두 번씩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해야 했습니다. ‘분향한다’는 것은 성막 안에 향을 피우는 것을 말하는데요. 제사장들은 아침과 저녁에 한 번 씩 들어가 성소에서 끊이지 않고 향이 타오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처음 올린 제사 때,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셔서 제물을 태우신 그 불씨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아직 번제단에 남아 있는 불씨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합니까? 1,2절,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성막에 들어가 향을 피우기 위해서는 “향로”, 정확하게 말하면 ‘불씨 그릇’ 혹은 ‘불을 옮기는 그릇’이 있어서 거기다가 불씨를 담아 향에 불을 붙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답와 아비후는 거기에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았고, 그것으로 향을 태우려는 순간, 불이 여호와께로서 나와 그들을 살라 버리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나답과 아비후는 성막 안에서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처음으로 성막에서 공식적인 분향의 예배가 드려지던 날, 제사장들이 그 첫 직무를 이행하던 때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일에 대해 모세는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3). 물론 뒤에 나오는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성막에서 일어난 이 사건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도 됩니다. 

즉 자신의 조카들이고 제사장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분향하다가 죽은 이 일에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6절에서 모세는 이 일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일이라고 했습니다. 즉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을 대단히 화나게 만들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우리에게 이 사건을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 잘못된 예배를 드렸고, 그것이 하나님을 진노케 하여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일을 하셨을까요? 사실 나답과 아비후는 자신들의 직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성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뭐든지 처음은 서툴고 실수를 연발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설사 그들이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정상 참작이 가능하고, 다른 불로 분향하려한 것이 잘못되었다면 야단만 치셔도 되는 데, 굳이 죽이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가지는 의문입니다.

3. 실패한 예배의 이유

1)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유를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1). 제사장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성막이 세워지고 거기서 드린 첫 예배 때 하늘로부터 내린 거룩한 불씨를 잘 간수하여 성막에서 불이 필요한 모든 의식에 그 불씨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나답과 아비후가 성막 안에 향을 피우기 위하여 사용할 불씨는 번제단에서 취해야 했습니다(레 16:12).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바로 이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니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불로 분향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라는 생각도 없이 그냥 쉽게 행동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께서 이르신 방법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드려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들이 자신의 방법으로, 아니면 별 뜻 없이, 혹은 별 생각 없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거부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배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했지 않습니까(요4:23)? 

영이신 하나님과 코드를 맞추어 인간적인 예배가 아닌 영적인 예배로, 내 생각이나 세상의 방식이 아닌 진리의 말씀대로 예배해야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했다는 것은 그들의 예배가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예배, 내 방식의 예배, 자신이 중심이 된 예배, 이도 저도 아닌 별 뜻 없이 드린 예배, 하나님을 이런 예배에 대하여 진노하십니다. 예배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고, 말씀 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원하는 예배, 사람들이 편하게 여기는 예배, 사람들의 기호와 형편과 요구에 맞춘 예배, 그리고 시대와 맞는 예배에 관심을 많이 둡니다. “예배가 傳統的인가, 現代的인가?” “예배가 靜的인가, 活動的인가?” “예배가 흥미진진한가, 따분하기 짝이 없는가?” “예배에 음악과 율동 등 드라마적인 요소가 있는가, 없는가?” 그러나 여러분, 이런 것은 예배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거절하실 예배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요소를 갖추고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성도 여러분, 예배가 여러분에게 편하고 즐거운 예배가 되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감동과 눈물도 있어야 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는 우리가 원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여야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진리의 말씀대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금지된 곳으로, 술에 취해, 그리고 둘이서 …

나답과 아비후가 죽어야 했던 또 다른 이유가 본문 9절에 있습니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나답과 아비후는 술에 취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나답과 아비후는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택함을 받아 제사장이 되어서 어느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성막을 출입하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뻐서 지난밤을 새우면서 축하주를 마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님, 아침 반주로 한잔 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술에 취하지 않고 맑고 깨끗한 몸과 영혼으로 예배했더라면, 그들은 이 치명적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고, 죽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술에 취해 거룩한 직무를 수행할 자격을 잃었습니다. 정신이 혼란하게 되고, 영적인 분별력이 둔하여져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있고 난 다음, 9절부터 11절에 보면, 아론과 그의 살아남은 아들들에게 경고가 주어집니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술은 신체를 약하게 하고, 정신을 혼란시키고, 품행을 저하시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판단력과 분별력, 나아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을 깨닫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는 것은 술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서 이것은 예배자가 술이나 다른 그 무엇에 자신의 영혼을 빼앗기면 그가 드리는 예배는 더 이상 올바른 예배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 예배하면서도 얼마든지 다른 것에 빠질 수 있지 않든가요? 아마 여러분들은 이미 그런 경우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어느 여 성도님이 설교를 듣는 중에 가스 불 위에 빨래를 삶다가 그대로 두고 온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면서 계속 “가스”와 “빨래”를 속으로 되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설교의 내용은 들리지 않고 설교가 다른 때보다 길어진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던 중에, 옆에 있는 교우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아 “아멘”하고 외치자, 자신도 모르게 그만 “빨래”라고 가장 큰 소리로 외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배하면서 사람에 취해 있고, 예배하면서 일에 취해 있고, 예배하면서 예배 마치고 할 일과 갈 곳과 만날 사람에 취해 있다면 그가 드리는 예배는 죽음을 부르는 예배가 될 수 있다고 오늘 본문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예배 시간에는 오직 성령과 말씀과 은혜에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이 외에도 나답과 아비후의 예배가 잘못된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본문의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나답와 아비후는 분향할 때는 들어가서는 안 되는 禁止區域인 지성소로 들어가려한 것으로 보입니다(레16:1,2). 그리고 정해진 시간(아침, 저녁 등불을 켤 때)이 아닐 때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출30:7,8). 또 하나, 분향함에 있어서 두 형제가 함께 들어감으로서 이 역시 제사법을 어겼습니다. 보십시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 분향의 제사를 드리면서도 말씀보다는 자기중심, 자기 생각, 자기 방법대로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죽은 이유였습니다. 

3) 여호와의 임재를 무시함

그런데 여러분,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데에는 좀 더 根本的인 理由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3절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신명기 4장 23,24절,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자신을 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처음 하나님을 만날 때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시내산 아래 도착한 후,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에 정상에서부터 연기가 자욱하게 되는 것 등을 통하여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불이 ‘심판의 불’이라는 좁은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임하심은 마치 불처럼 이 세상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 감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마치 불이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듯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모든 피조물들이 그 하나님의 임재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죠.

토저(A.W.Tozer)는 그의 책 『예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에서 17 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인 파스칼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天才的인 數學者이고 哲學者이며 著述家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어느 날 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일이었습니다. 그때의 감격을 그는 다음처럼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그 내용은 대단히 놀랍습니다. 
“밤 10시에서 12시 반까지 - 불! 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 철학자와 지혜자의 신이 아닌, 복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안정감 - 느낌 - 평안 - 기쁨 - 기쁨의 눈물. 아멘!”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경험한 파스칼의 단 한 마디는 그 하나님이 “불”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막 제단에 있는 불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성막이 자신들이 사는 텐트보다 크고 또 신앙적인 집기들이 많은 곳이라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요,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나답과 아비후는 이것을 몰랐던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접하느냐가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드리느냐에 드러납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마치 불처럼 그가 임하시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스스로, 자신들이 알아서 불에 타듯이 슬슬 길수밖에 없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셔서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대접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4.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도 성공한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교회에 암으로 죽어 가던 한 여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자신이 걸을 수 있는 한 계속 교회에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말을 지켰습니다. 그러던 중 죽음이 임박한 어느 주일, 그녀는 여위고 허약해진 몸으로 천천히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머리카락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고 얼굴빛은 백지장처럼 창백했습니다. 남편이 산소마스크를 비롯한 응급도구를 들고 그녀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자리에 앉았고, 드디어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손을 높이 들고 주를 찬양”이라는 찬양을 부르는 동안, 그녀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양팔을 위로 들어 올렸고, 목사님과 교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는 힘없이 떨리는 팔을 계속 들고 있었고, 눈을 감은 채 미소를 머금고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예배였습니다. 그녀의 예배를 지켜본 성도들은 성도의 삶에서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마지막 숨을 예배하면서 거두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자신들에게도 그 예배가 마지막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며, 예배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른 예배,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요소,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느낌에 따르는 예배, 성령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이끌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예배가 나답과 아비후처럼 잃는 예배, 죽는 예배, 죽이는 예배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중심의 예배, 말씀대로 드리는 예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여러분의 예배가 그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의 육신과 영혼이 살아나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게 되기를 바랍니다. 올바른 예배가 주는 그 풍성함이 여러분의 삶에 넘쳐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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