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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의 하나님 (행 6:8~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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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하나님 (행 6:8~7:60) 
 
 
본문은 스데반의 체포와 증언과 순교를 다루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스데반의 하나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스데반은 사도들처럼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고(6:8), “지혜와 성령”(10)으로 담대히 변론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과는 달리 회심자들 대신 적대자들을 얻었지요. 헬라파 회당들로부터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11)을 한 사람으로 모함을 받아 폭도들의 돌에 맞아 순교합니다(7:59). 세속의 관점으로 보면 억울하게 희생당한 아까운 인물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베드로를 제외한 11사도의 설교와 활동은 기록하지 않으면서도 스데반에 대해서는 기록합니다. 그만큼 하나님 나라의 진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성도의 삶에는 억울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인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벧전 2:19). 그런데 “이 거룩한 곳”(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억울한 고소를 당했을 때(6:13), 스데반은 슬픔을 참는 정도를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생명의 도를 전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자신이 결코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지 않았음을 변론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동시에 줄기차게 유대교의 형식주의적인 신앙을 비판하면서 하나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증언하는 측면이 훨씬 강합니다. 구약 역사를 관통하면서 대적자들로 하여금 마음이 찔려서 이를 갈면서도 더 이상 할 말 없게 만드는 탁월한 설교였지요(7:54).

스데반의 설교는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새끼줄을 꼬듯이 주제를 언급했습니다. 주제별로 전개된 글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단락 구별이 명확하지 않아서 두서없는 글처럼 장황하고 지루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 하려는 핵심 주제 두 가지를 붙잡고 읽어 가면 내용이 분명해집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은 이 땅의 한 지역에 결코 붙잡아 둘 수 없는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주제입니다. 이 주제를 이스라엘 조상들의 유랑했던 역사와 관련시켜 전개합니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종 지도자요 구원자라는 주제입니다. 이것을 항상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거절하고 율법의 증거를 거역했던 역사와 관련시켜 이야기합니다.

고소된 내용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 것을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한 일로 간주했습니다(6:8, 10). 성전 자체를 하나님처럼 신성하게 여겼지요. 이에 대해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이신 곳은 소위 ‘거룩한 곳’이 아니라 세속 문화의 중심지 “메소포다미아”에서 였다며 설교를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동행하셨던 “하란”과 당시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행하게 하신 가나안 땅도 그 당시로서는 각종 우상을 섬기는 문화가 가득하여 전혀 거룩하지 못한 곳이었습니다(7:2-8). 이스라엘 역사는 시작부터 특별히 거룩하다 할 만한 영광스러운 장소가 없었습니다. 오직 영광의 하나님께서 계셨을 뿐이지요.

요셉 이야기에서는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긴 이방 땅 “애굽”이 6번이나 언급됩니다. 스데반은 바로 그 땅에서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 창세기가 자세히 소개하는 요셉의 고난들은 과감하게 생략하는 대신에 애굽 땅에서도 그와 함께 하신 사실을 드러내어 강조했지요. 창세기에는 기록이 없지만 요셉과 조상들이 묻힌 곳조차도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사마리아 땅 “세겜”이었음을 밝힙니다(9-16). 모두 유대인들이 ‘거룩한 곳’이라 여긴 장소와는 상관없지요. 요셉의 신앙이 훌륭했던 것은 그가 소위 ‘거룩한 곳’에 살았기 때문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의 생애는 40년씩 나누어 설명됩니다. 첫 40년 동안 모세를 양육한 사람은 애굽인인 “바로의 딸”이었습니다. 모세가 배운 것도 “애굽 사람의 학술”이었지요(17-22). 두 번째 40년 동안은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23-29). 마지막 40년은 “신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시작해서 광야에서 생을 마감합니다(30-34). 모세의 삶은 소위 ‘거룩한 땅’은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고 하셨지요. 이 말씀을 통해 거룩한 곳은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면 어디라도 거룩한 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위 거룩하다고 말하는 어떤 지역이나 사람이 만든 어떤 것에 묶여 계신 분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곳에 편재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분을 특정한 장소에 얽어매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광야에서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기뻐한 사건입니다(40-41).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송아지 형상으로 표현했을 뿐이고, 하나님을 마치 금송아지 형상 안에 계신 분 것처럼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러한 형태를 우상 숭배라 부릅니다. 광야에서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42)이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과의 교제를 위해 광야에서 “증거의 장막”을 주셨고 통일 왕국에는 성전을 허락하셨습니다(44-47). 하지만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은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라고 바르게 고백했습니다. 선지자들도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심을 분명히 했습니다(48-50).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유대인들은 성전 자체를 하나님과 동일시할 정도로 지나치게 소중히 여겼지요. 성전이 있는 한 그 땅은 보호를 받을 것이며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오늘날 국가 이스라엘을 ‘성지’라 부르며,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소위 성지를 방문하거나 소위 성전이라는 곳에 있으면 좀 더 경건해지는 것처럼 기대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단상 위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거나 성경을 붙들고 기도하면 좀 더 응답이 잘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이는 고정시켜 둔 우상을 섬기는 이방 풍습과 동일하지요. 이제 성지나 성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장소나 형상에 갇혀 계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영광의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분과 바르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종교적인 목적의 형상이나 화상들은 모두 제거했었지요.

좋은 예배당 자체가 훌륭한 신앙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좋은 설교가 있는 교회에 소속되면 자동적으로 경건해질까요? 아닙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듯이 경외하며 경배하는 자세로 사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분은 예배당 안에만 계시지 않고 삶의 현장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말씀 듣고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세속의 현장에도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눈에 보이는 물질을 떠나면 진정한 신앙이 아닌 양 생각하는 형식중심적인 신앙을 지적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세상에 충만하신 영광의 하나님을 충만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데 있음을 증언했지요.

조상들의 신앙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요셉과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자들로서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런데 조상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팔아버렸고(9),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며 모세를 거절했었습니다(27). 동일한 죄의 패턴이 그 후에도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52).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팔아버린 그 요셉과 “거절하던 그 모세”(35)를 구원자로 세우셨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절했던 예수님을 만민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조상들은 광야에서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행하여” 우상을 만들었습니다(39). 그리고 그 후손들은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37)는 모세의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께 복종치 않고 거절했습니다. 모세를 대단히 존중한다 하면서도 그의 예언을 완전히 무시해버렸습니다. 중요한 핵심을 빼놓고 형식적인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모습이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의 신앙과 똑같지요.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은 아주 강력하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노다”고 책망합니다(51).

“영광의 하나님”(2)으로 시작한 스데반의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55)을 보며 끝납니다. 영광이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가장 확연하게 드러났지요. 스테반은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심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물질 중심의 문화 속에 살면서도 성전과 율법 같은 형식 자체를 우상처럼 높이지 않고, 예수님을 붙들었지요. 스데반의 설교와 죽음은 성도가 성경 말씀을 듣고 그분께서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 참으로 바른 기독교 신앙이 기초임을 보여줍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신앙이 되는 것이지요.

스데반 시대의 성전은 이미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본의를 상실하고 유대인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공간으로 변질 되었습니다. 그 후 성전은 점차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 민족주의자들의 본거지로 사용되다가 AD 70년에 철저히 파괴됩니다. 지금은 그 자리에는 이슬람 회당이 서 있지요.

소중히 여겨야 할 종교적인 공간이나 도구 자체가 신앙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신앙은 특별한 장소에 구애될 수 없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자녀답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야 하겠지요. 항상 신앙의 본질에 충실한 모습이 유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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