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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 10: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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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 10:32~33)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밝히신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두 번씩이나 반복해 부르신 것입니다. 둘째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이신 당신 자신이 사실상 하나시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시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은 “내가 시인하면 내 아버지도 시인하실 것이고 내가 부인하면 내 아버지도 부인하실 것임”을 암시하며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당신께서는 생각과 뜻과 결정에 있어서 완전히 일치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당신의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는 표현은 마7:21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표현은 마18:19에서도 나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18:35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늘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 하나님을 “너희의 아버지”라고 또한 부르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6:1)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할지를 가르치시면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시고 주님이신 예수님의 아버님이시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라 하신 것입니다. 놀랍기 그지없는 은혜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혼자 기도할 때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들 사이의 형제애를 강조하신 말씀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동등한 자녀라고 하는 평등사상을 가르치는 것으로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가 사랑과 평화와 일치 속에 함께 살아야 함을 깨우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뒤이어서도 “오늘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 하셨으며, “내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가 아니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 하셨고,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가 아니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할 기도이고 하나님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 나 혼자만 먹고 나 혼자만 살며 나 혼자만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있고 우리의 죄가 용서되며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해지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나라백성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공동체에 관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나라백성으로서의 사랑과 공동체의식을 더욱 잘 키워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기도가 아니라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인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시고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빠 아버지시라는 사실이 함축하는 의미의 하나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친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라 하신 것이 하나님의 우리와의 친밀한 관계성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라면, “하늘에 계신”이라고 덧붙여 부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 또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분이심을 밝히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을 한편으로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즉 내재적 하나님, 우리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 계신 인격적 하나님으로 말해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을 무한히 초월해 계시며 우리와는 너무나 다르신 하나님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양면성을 동시에 잘 붙잡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이해가 바로 서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내재성만 너무 강조하고 초월성을 소홀히 하면 우리의 하나님이해가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나 다신교로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초월성만 너무 강조하고 내재성을 소홀히 하면 이신론(理神論, Deism)이나 심지어는 무신론으로 나아갈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말이 함축하는 뜻은 또 무엇입니까? 성경은 무수히 많은 곳에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래서 하나님을 “하늘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하셨고,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을 상도 다 하늘에서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2) 

그런데 우리가 먼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가 늘 쳐다보는 저 하늘 공간 어딘가에 계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우리의 존재방식처럼 공간적인 것으로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이라는 울타리에 둘러싸여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지혜가 뛰어났던 솔로몬은 일찍이 하나님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용납하지 못할 것”(왕상8:27)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고 하나님은 그 지으신 하늘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그가 하늘이라는 어떤 특수한 공간에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시고 그 어떤 존재이든 그의 주권과 지혜와 능력 안에 있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이해 속에서 만물은 하늘 아래 있으며 하늘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종종 “하늘나라”라고도 부르는 하나님의 나라 또한 하늘이라는 공간 어느 구석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나라 또는 하늘나라가 어떤 모습이 될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그 나라는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찬란한 세상일 것이라고 살짝 언급은 해주셨지만 하늘나라의 존재방식이 어떤 것인지는 지금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고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실 때 드러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주님의 오심과 하늘나라에 관해 성경이 언급한 말씀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아, 바로 이 뜻이었구나!”, “과연 말씀대로 다 되는구나!” 하는 우리의 감탄 속에 다 이루어지리라고 믿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나라란 흔히 하늘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온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고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과 공의로 충만한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주기도문 전체의 내용이 말하듯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고, 먹는 문제가 다 해결될 뿐 아니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입기 위한 일상적 염려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만을 구하고, 하나님에 의한 우리의 죄 용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이의 모든 죄 용서가 이루어지고, 시험에 들어 하나님 앞에 죄악을 범하는 일이 사라지는 것,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표시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또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우리가 이루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끝이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또한 하나님은 만유의 주인이시고 통치자시라는 것을 뜻하는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늘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 같이 높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또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늘 높은 곳에 오를수록 사물들이나 일어나는 일들을 넓게 많이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낮은 곳에 있을 때는 감추어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면 다 내려다보이듯이 하나님께는 숨길 것이 없이 다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모든 일을 바르게 처분하실 것임을 확신케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혹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내가 한 일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한다고 해서 억울해하며 불평과 원망을 할 필요가 없게 해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6:1) 말씀하신 후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 하신 것입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18)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렇게 은밀한 중에 모든 것을 보시고 만사를 바르게 판단하시며 처결하시는 지혜와 정의의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또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삶의 관심과 우리의 궁극적 목적이 이 세상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나라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 고향은 하늘나라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나그네임을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나라에 잠시 파견근무 나와 있거나 여행 중에 있는 것과 같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은 우리가 돌아갈 곳이 우리의 아버지가 계신 저 나라라는 것을 일깨워주시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3:20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 가운데 겪는 이런 저런 고통과 불편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차피 이 세상의 삶은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유학생이 좀 넉넉치 못하고 불편한 것 있어도 참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귀국 후의 보다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이처럼 단순히 기도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신앙에 관하여 아주 중요하고 본질적인 가르침을 주는 말씀입니다. 이 기도를 늘 반복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고 올바른 신앙을 실천하며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늘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그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일에 무한히 지혜로우시며 언제나 온전히 의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써 늘 의연하고 당당하며 아름답고 넉넉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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