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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행 2: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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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행 2:37~47)


여러분 친구 영화 혹시 보신지 모르겠어요. 친구 영화 보면 꼬맹이 둘이서 하는 그런 대화가 나옵니다. ‘야, 조오련 선수하고 물개하고 수영 시합하면 누가 이길까?’ 그런 대화가 나오지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조오련 선수는 우리 국민들 가슴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는 분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나라가 이제 못 살던 나라에서 잘 살기 위해서 몸부림칠 때 많이 지쳐있던 70년대에 우리에게 참 희망을 주었습니다. 도전이라는 게 뭘까? 그 도전 앞에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과제들이 극복되어지는가 하는 그 샘플들도 많이 보여주었고 또 우리나라가 세계에 나가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때 이 조오련 선수는 우리의 자긍심을 많이 높여주었습니다. 

1970년도 아시안 게임에서 400m, 1500m 수영 금메달을 따게 되었는데 이것이 한국 스포츠 역사상 처음으로 2관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아시안 게임인 1974년도에는 동일 종목에서 400m, 1500m 수영 금메달을 따면서 또 우리나라 이름을 해외에 많이 알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로 2연패의 기록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한 사람이 우리나라 기록의 50차례를 갈아치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한해협을 횡단하고 도버해협을 횡단하고 한강 줄기 육백육십 리 입니까, 그것도 횡단하고 독도를 서른 세 바퀴 돌고, 그에게 있어서 끊임없이 다가온 문제를 도전하며 극복해 나가는 그 모습은 지치도록 힘든 우리 한국 사람들 마음속에 참 많은 용기와 이미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오련 선수가 자기에게 주어진 대한해협이나 도버나 어떤 주어진 어떤 그 난관을 풀어서 나갈 때에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있다고 그래요. 

우리가 흔히들 생각하면 한류와 난류가 어렵고 상어가 힘들고 그리고 그 고독하게 헤엄쳐가는 바로 그런 것들이 힘들다고 얘기하지만 이 조오련 선수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살찌는 거라고 그래요 살찌는 것, 이상하지요 처음 들어보시지요. 자기가 운동하는데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살이 쪄야 하는데 이 살이 찌게 되면 이 살은 영양분을 그 살에서 공급 받아서 장거리를 갈 때 그렇게 쓰게 되고 이것이 보온 효과를 가져와서 모의 체온을 유지시켜줄 뿐만 아니라 냉수 대와 해파리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주는 그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살을 찌우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의 원인이 밖에 있다고 그렇게 얘기하고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자기 안에 그 문제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많이 발견하게 되는데 뜻밖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환경의 우선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내 안에 문제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 교회의 위기라고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위기하면 여러분께서 익명성을 가지고 ‘아, 목사와 장로지!’ 그게 아니라 교회는 여러분 자신 자신의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뭐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는 분은 사실 교회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거예요. 자기가 교회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가 뭘 해야 된다’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하셔야 되는 거에요 예? 

이제는 여러분이 교회가 이러지 말고 목사가 해야 된다 이렇게 하면 제가 제 말로 알아들을게요.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가 지금 위기이다 할 때는 여러분이 위기요 내가 위기요 교회가 공동체가 위기다 이렇게 받아들이셔야 돼요. 그런데 이 위기가 어디서부터 왔을까?  사람들은 이야기할 때, 교회의 위치가 엉망이다, 교회의 기능이 지금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교회의 이미지가 별로다,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별로 좋게 생각 안 한다, 제가 어는 사람들한테 물어봤더니 요즘 청년들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했더니 옛날에 우리가이완용 생각하듯이 한다는 거예요. 뜻밖에 얘기를 들었어요. 왜 이렇게 교회가 이런 문제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교회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현상이 우리 삶에 있어서도 실패한 사람이 많지만 가정도 문제가 생기고 사회도 부패해지고 그리고 희망도 없어지고 여러가지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뭘 교회 때문에 역사가 달라지느냐 그러지만 양심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많은 분들 또 사회 현상을 통해서 여러가지 연관성을 찾는 분들은 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교회의 기능을 하지 못했을 때 이런 문제들이 나타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2009년도 OECD 국가별 통계에서 보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현상을 보이는데 이러다가 2030년 가면 일본하고 거의 같은 수준의 고령화가 되어서 한국사회가 늙어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유야 많겠지만 다시 돌아보면 이 젊은 사람들이 얘기를 안 낳는다는 거거든요. 얘기를 안 낳은 이유는 아이를 기를 수 있는 그런 정책의 문제도 있지만 편하게 살고 싶은 거예요. 자녀 하나 기른다는 것 정말 힘들 더라고요. 제가 하나 기르는데 얼마나 힘든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그러니까 둘 키우는 분이 이러더라고요. 둘은 얼마나 힘든 줄 압니까? 이러더라고요. 둘 키우는 분이 그러니까 셋 키우는 분은 웃더라고요 옆에 서서!  웃으면서 니네들이 얘를 키울 줄 알아? 하하하 하하하 이런 표정으로---- 

이거 참 자녀들이 어렵더라고요. 태풍 같은 사춘기 지나야지요, 대학교 보내야지요. 돈 다 들어가지요, 하여튼 그러니까 이제는 좀 편하게 살자!  그런 생각이 들어오면서 자녀를 더 이상 낳지 않게 되지요. 이거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그 말씀과 더불어서 우리에게 문화혁명 문화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일에 우리가 그 사명을 잘 순종하지 않는 부분도 있잖아요. 아무튼 저 출산으로 우리나라가 그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잘 살 수 있다면 왜 자녀를 낳지 않겠어요, 그렇지요?  

그 다음에 세계에서 최고의 자살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여성들의 자살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자살률이 1위인데도 여성들의 자살률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1998년 이후에 자살률이 매년 99%씩 증가해서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0년 연속 자살률 1위를 지금 아주 잘 지키고 있고요, 2007년에는 하루에 40명 정도씩 평균적으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이혼율도 세계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특별한 연령대의 구분도 없어요. 뭐 이유도 없어요, 경제적인 이유 뭐 통계학자들이 만들어 내긴 내지만 그러나 연령대나 특별한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왜 이렇게 행복하기 위해서 시작된 가정이 깨어져 가면서 살 수 없는 그런 세상이 되어있을까? 그리고 사 교육비는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고요, 술 소비량은 2등입니다. 그런데 위스키 같은 독한 술 소비량은 세계 1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술을 드셨든 안 드셨든 WHO에서 평가하는 국민 한 명당 작년에 우리가 먹은 술은 소주가 72병 맥주 107병 와인 2병을 먹었다는 거예요.  술 드실 때는 반찬을 잘 먹어야 속 안 버립니다. 예! 이렇게 우리가 술을 잘 먹고 사는 나라인데 왜 술을 먹을까요? 속상한 일이 있으니까 먹겠지요 그렇지요? 

여러분 이 통계를 한번 종합해보세요. 종합해보면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라는 거예요? 살기 어려운 나라라는 거예요.  살고 싶은 생각이 별로 안 드는 나라라는 거예요. 이 나라에 살만한 가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 되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왜 우리에게 심각한 통계가 되는가 하면 우리가 믿는 이 성경책, 우리가 믿는 이 하나님, 이 하나님과 이 말씀 안에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의미를 분명히 주는 내용이 있고요, 생명 같은 소망이 있고 소망 같은 생명이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주저앉지 않는 힘을 주는 에너지가 이 말씀 속에 있고요, 절망과 낙담 가운데서 다시 일어설 수 있고 그리고 비참한 가운데서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이 말씀 안에 있단 말이에요.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내 자신이 세상 속에 삶의 의미를 주지도 못하고 희망도 주지 못하고 생명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도 죽을 지경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맡겨주신 이 세상도 이토록 어려워져 가고 있다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내용을 바라보면 초대교회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구원을 얻는 자의 숫자가 더해갔다 하는 말인데 이것이 교회 나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렇게만 생각하지 말고요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고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되겠다 하는 것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야 참 소망이 뭐구나! 정말 이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그렇게 결단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기록에 의하면 성경에도 나옵니다. 

대제사장 같은 사람들도 돌아서서 허다한 숫자가 예수를 믿는다고 그랬어요. 10 05이거 보면서 참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무엇을 회복하고 이것을 어디서부터 문제를 찾아야 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명을 받은 사명자이기도 하지만 심판이 반드시 있습니다 여러분!  죽어봐야 알겠지요 예? 그런데 그때 가서 아하 있었구나 하고 끝장나면 안되잖아요. 우리는 보험도 넣는 판인데, 한번 보험 넣는 심정으로 여러분 정말 내게 심판이 있다면 나는 오늘 어떨까?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심판의 기준은 사람들의 칭찬도 아니고 나의 성공여부도 아닙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그 하나님이 심판 자 이신데 그 심판의 기준은 이 성경책에 나와있단 말이에요. 

한번 그렇게 한번 생각해보세요. 보험 넣듯이 정말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번만 생각해본다면 오늘 말씀이 여러분에게 그냥 쉽게는 안 들릴 것입니다. 구경하듯이 나를 감동시켜봐, 이렇게는 안 들릴 것입니다. 그건 저 생각이고 그건 네 생각이고, 이런 생각으로 안 들릴 거에요. 함께 진지하게 우리가 고민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이 초대교회가 이런 영향력을 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이렇게 바라볼 때 중요하게 나오는 단어가 회개라는 단어입니다. 이 회개라는 단어는 메타노이아 라는 단어인데 내가 가던 방향에서 돌아서서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돌이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후회하고 반성은 내가 그냥 잘못했구나, 내가 이거 참 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지만 회개는 반성과 후회와 더불어서 그 반대의 삶을 내가 실제적으로 사는 거예요. 그렇게 사니까 뭐가 달라져요, 우선순위가 바뀌지요, 삶의 습관이 바뀌지요, 나의 삶에 있어서 삶의 자세가 바뀌어지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 믿고 복음이 나에게 왔는데 나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나요? 인생을 대하는 내 삶의 태도가 바뀌었나요? 이거 안 바뀌면 영향력 우리에게 없습니다.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구원은 하나님께 있으니까 제가 어떻게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정말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변화시키고 우리 민족을 치료하고 이웃에게 정말 살아있는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내 속에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이 구체적인 나의 자아관이나 세계를 보는 눈이나 습관이나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변화가 없으면 안 되는데 리차드 포스트가 얘기한 것처럼 돈 쓰는 것과 섹스와 파워, 힘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역사에 여러분, 하나님 원하시는 일에 여러분 주인공으로 쓰임 받을 수 없다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상급이 없다는 얘기도 되겠지요. 오늘 이 사람들이 회개했다 할 때 이 회개가 그냥 회개가 아닙니다. 

여러분께서는 여러분 자신이 살아가는 삶이나 생각과 행동을 언제 가장 많이 바꾸세요? 된통 얻어 맞았을 때 그렇지요. 아!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구나! 내가 이만큼 고생했구나! 이 만큼 내가 배신을 당하는 구나! 이 만큼 잃어버리는 구나! 야, 인생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 충격과 아픔과 괴로움과 좌절이 주어졌을 때 그때 바꾼단 말이에요. 이렇게 바꾸는 것은 그냥 행동의 바꿈이지 존재의 변화는 아닙니다. 

오늘 이 초대교회의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압니까?  제가 이 사도행전 보면서 베드로가 하나님 앞에 이런 말씀 하잖아요.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면서 그 안에 율법에 먹지 말라는 벌레가 있었거든요. 이거 먹으라 그러니까 하나님 못 먹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했던 대답이 아주 인상 깊은 게 있어요. “한번도 내가 먹어 본적이 없다” 고 그랬어요. 

여러분 한번도 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삶이 여러분에게 있어요. 저는 한번도 술을 안 먹어봤다, 이제 그 얘기 못합니다. 저는 담배 진짜 한번도 안 피웠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할머니 피우던 담뱃대 꼬마들 둘러 앉아서 한번씩 빠꿈빠꿈 했던 그 기억이 나는 거예요. 예, 하하하 하하하 그것 때문에 한번도 라는 표현 못해요 여러분! 한번도 나는 음욕을 품어 본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게 우리 삶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는 “한번도” 그런 사람들이 무서운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율법과 진리에서 살면서 내 인생이 정말 바르게 산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이 회개할 게 뭐가 있겠어요. 이런 사람의 특징은 네가 회개해야 된다, 네가 달라져야 된다, 네가 변해야 된다, 이 기준의 잣대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나는 사는 게 괜찮아, 나는 잘했어, 네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왜 바르게 사는 사람은! 그래서 바르게 사는 사람, 성공한 사람, 남에게 칭찬받는 사람, 자기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 회개하기 힘듭니다. 예수 믿기 힘듭니다, “나만큼만 살아보라고 해?”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 회개가 이루어졌던 것은 진리의 빛이 그들 속에 다가온 것입니다. 그들에게 죄라는 것이 뭘까, 죄를 여러가지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이르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못한 일을 그 일을 위하여 내 습관과 내 말과 내 행동과 내 뜻과 내 계획과 내 인생의 모든 목적이 거기에 되어있는 것을 죄로 그들이 받아드리기 시작한 거예요.  언제, 성령에 그들이 도움을 받아서 내가 내 인생의 기준이 아니고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나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내 밑 바닥까지 다 보여주시면서 나를 보여줄 때에 “아 이게 내 모습이 이게 아니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내가 입지 않고는 이게 정말 복된 삶이 아니구나!” 거기에서 그들이 회개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중에 내가 이만큼 살아서 사람들에게 성공했다, 또 사람들이 나를 칭찬한다, 인격적으로 존경하고 귀하게 여긴다, 내가 갖고 있는 소유물이 내가 이만큼 돈을 벌어서 난 잘 살고 있다. 나처럼 양심적으로 살아보라고 해, 하는 분들은 이거 회개하기 힘들어요. 구해야 될 것이 “하나님 성령의 빛을 보여주셔서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셔서 진정한 나의 존재를 보여주십시오.”  진정한 자기 존재를 보여주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리의 빛이 내게 오기 시작하면 우리가 근심하는 그 근심이 생기고 우리 삶에 질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 질문을 뭐라고 그러느냐? 창조적인 질문이라고 그럽니다. 구원에 이르는 근심이라고 얘기합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서게 되니까 그들의 삶이 얼마나 추하고 얼마나 죄악 되고 하나님 기뻐하시지 못하는 삶이라는 걸 알게 될 때 그들이 근심이 생겼어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까?” 그때 베드로를 통해서 주어진 답이 회개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예요? 이 말은, 회개하라는 얘기는 네가 살아가는 인생의 기준을 바꾸라는 거예요. 지금 네가 옳다고 생각하고 네가 맞는다고 생각하고 내가 정말 바르다고 생각하는 그 기준자체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웃으시고 기분 좋고 화나고 속상한 기준이 여러분 속에 이미 기준의 틀이 있단 말이에요. 그 기준의 틀을 바꾸어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그 기준으로 성령께서 비추어주시는 그 삶의 기준으로 나를 보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삶에 결단코 회개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이 사람들 속에 비추어진 하나님 말씀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를 보게 된 것입니다. “내 마음의 벽” 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그로스 탐슨 박사님은 저와 여러분이 갖고 있는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뭐 좋은 사람이든 성공한 사람이든 저와 여러분이 오늘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좋아하고 하는 이 모든 인생의 기준을 만든 그 바닥 속에는 뭐가 있느냐? 거기에는 거짓 선지자, 부모, 교육자, 동료, 정부, 대중매체, 교회와 교회지도자들, 자기 마음, 종교, 환경 또 인생을 살면서 경험한 폭풍우 즉 상실과 고통 당한 경험으로 구성된 기준 예를 들면 건강, 이혼, 마약, 태만, 죽음, 경제적인 문제, 술, 직업 그리고 궁극적인 거짓말쟁이는 사탄이 우리 속에 우리의 삶을 우리의 기준을 주장한다는 거예요. 

저기 그림을 한번 보세요. 그런데 저게 삐딱삐딱하게 돼있어요. 예, 삐딱삐딱하게 돼있어요. 부모가 우리에게 진리 가르쳐줍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가르쳐준 진리 중에 부모님은 사랑으로 했지만 잘못된 인생기준 많습니다. 제가 어릴 때 할머니한테 들은 것이 여자는 무조건 두들겨 패야 된다고, 명태와 조선 여자는 때리면 부드러워진다, 이 철학 가지고 있었어요. 실제 효자들은 이 말씀 믿고요 집에서 가정 폭력의 원인이 됐어요. 

그 다음에 여기에 대응하는 또 다른 이론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멸치와 남자는 볶을수록 고소하다. 이런 논리가 나와서 그래서 이제 싸움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요즘 잘못되고 어려움 당하는 사람 목사님들 영향도 많습니다. 잘못된 종교집단의 영향도 많습니다. 선생님들도 잘못 가르쳐준 것이 있어요. 저는 뭐 종교를 매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교육의 본질적인 것과 인간의 본질적인 것을 왜곡시키며 가르치는 그것이 그들의 삶의 이론이 되어서 청년이 되어도 그 껍질을 벗지 못하는 것을 많이 봐요. 

여러분 정부가 우리에게 얼마나 거짓말 많이 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가치관이 되며 그 틀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판단한다는 거예요. 그것이 진리라고 받아들이고 그걸 가지고 인생은 이렇구나,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되는 구나 또 그것 가지고 살아보니까 되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이 본 것처럼 저렇게 바르게 돼있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떤 경우이냐?  회개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고난과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회개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제는 맞고 또 맞고 상처가 나고 피가 나고 멍이 들어도 회개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셨지요. 절망과 어둠과 멸망의 역사를 걸어가는데 거기에서 돌아설 줄 모르는 거예요, 왜? 자기가 뭘 회개해야 될지 모르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이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모스서 7장 7절부터 8절까지 보니까 “또 내게 보이신 것은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 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이 다림줄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 건축하는 분들이 벽을 쌓을 때 벽을 바로 쌓았는지 바로 되었는지 그것을 밑에 추를 달아서 이렇게 반듯하게 되었는지를 확인해보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잣대를 통해서 볼 때 우리 인생은 위태로운 거예요. 오늘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면서 회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내가 맞는다고 생각하고 내 경험으로 사는 이것을 내려놓고 다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내가 하나님 말씀 평가하지 말고요,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이 본문이 나에게 무엇 때문에 무슨 말씀하시는지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이거는 선택과목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 방향을 잡으면 열심히 산만큼 되돌아 가야 됩니다.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하면 어려워지는 거예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말씀 가운데 그 말씀이 기준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면서 들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도 이제 목회를 하면서 정치를 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왜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있는데 이게 따라 주지 않을 때는 힘으로 밀어 붙여서라도 이 계획을 꼭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왜, 지금까지 반대한 것 많아도 제가 설득하면서, 설득하면서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이만큼 온 것이 사실 적지 않거든요 여러분!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리더에게 다 가지고 있는 독특한 보는 관점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받아주지 않고 인정하지 않을 때 공동체가 함께 손해 보겠다 할 때는 그건 할 수 없잖아요. 밀어붙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제 사람을 만들어서 해야 그것이 가능하거든요. 사람 만든다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 안 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얘기합니다. 너를 정말 좋아 죽는 사람을 몇 사람 만들고 철저하게 격리시킬 사람을 격리시키고 그렇게 하라고 그러는데,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세상의 논리는 그래도, 제가 제 기준이 정확하다고는 저는 자신 못하겠어요. 

제가 이렇게는 말씀드릴 수가 있을 거예요. “이 일을 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말씀하시는지 그 말씀 앞에 귀를 기울입시다. 함께 기도하십시다.” 제가 이렇게는 얘기하는데 ‘내 말이 이것입니다.’ 이렇게 설득은 못하겠어요. 

여러분께서는 어떠세요?  세상은 나를 따라오라 하는 사람을 좋아하잖아요. 저도 처음에 와서는 그렇게 했지만 지금 저도 연륜이 조금 들어가면서 생각할 때, “이건 아니다 이건 교주이지 아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보면 자기 생각을 하나님 말씀 이상으로 설득시켜서 자기 방법으로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도 그거 분별하셔야 돼요. “이게 정말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이루는 말씀이냐” 따라가세요. 그러나 자기 논리와 생각을 주장할 때는 분별하셔야 돼요. 최고 리더인 담임목사도 그렇게 안 하는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현실적으로 힘들지요.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 음성 앞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것이 제가 우리 교인들을 향해서 해야 될 도리이고 또 세상이 그리 간다 할지라도 정치논리로서 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기준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어야 살아나고, 남다르게 한국교회 가장 청년들이 많은 이들에게 정말 줄 수 있는 게 뭐냐 이거에요 줄 수 있는 게! 여러분 그런 생각하면 제 자신과 싸우게 됩니다. 저도 그만한 능력은 되거든요. 그러나 그 유혹 앞에서 하나님 주님 말씀 앞에 다시 섭니다. 다시 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말씀 앞에 다시 돌아가야 됩니다. 

말씀을 그냥 읽어야 되지만 여러분 QT철저하게 하시면서 말씀을 보셔야 돼요. 성경공부 개강했는데 여러분들 등록 안 한 분들 많더군요 명단 보니까! 이게 우선순위입니다 여러분!  선택과목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매일매일 바라보면서 그 말씀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뜻이 뭔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그 하나님의 기준을 여러분이 사모하고 구하여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난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주장했던 그 많은 것이 오히려 나와 가족들에게 더 힘들었던 그런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 많았다면 지금 나의 삶의 기준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여러분 사셔야 되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꾸준히 밀고 나가는 사람을 뭐라고 그래요, 예 정말 안타까운 사람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 드립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십시다. 예, 정말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뭔가? 지금 총회나 노회나 이렇게 보면서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 내세우는데 다 좋다고 그래요. 그렇지만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 뭐라고 하시는지 우리가 다시금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는 삶이 될 때 달라집니다. 

요즘 훌륭한 목사의 기준이 뭔지 압니까? 장로님들에게 잘하고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목사가 훌륭한 목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있었던 미국 장로교회는 목사를 초빙할 때 우리가 원하는 목사가 뭐냐를 여론 조사를 해요, 그게 뭡니까 내가 내 기준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다 찾아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 그러니까 미국교회가 엉망 아니에요. 다 매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교회가 엉망인 이유가 자기 보기에 좋은 사람 찾는다고요. 요즘 좋은 장로님 어떤 장로님이세요? 담임목사 잘 섬기고 교인들 잘 보살피는 장로님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은 담임목사님 목회 방침에 잘 따르고 순종하고 또 타 교회에 나가서 교회 명예 회손하지 않고 --- 그런데 여러분 맞죠!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있단 말이에요. “나의 왕 되신 내가 섬기는 그 하나님 이 말씀 속에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삽니다” 이 고백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세워주셨기 때문에 목사로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 뭔지 장로로서 순종하는 삶이 뭔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순종하는 삶이 뭔지, 이 신앙고백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목사이기 때문에 그 여러분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한번 살아보십시오. 얼마나 힘든지 모습니다. 내가 장로이기 때문에 봉사해야 되고 여러분 이거 힘듭니다. 그것이 아니라, 내가 뭐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되고, 정말 힘듭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나의 왕 되신 그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고 그것이 나의 힘이 되고 나의 생명이 되고 나의 소망이 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삽니다. 그 고백을 우리가 함께 드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굉장히 파워풀 합니다 여러분! 그 고백이 우리 속에 살아진 것을 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베드로, 저는 자주 묵상합니다. 베드로가 왜 이렇게 비참하게 됐는가? 여러분 요즘 미래학자나 경영학자나 그리고 현실에서 성공한 CEO 이런 것을 연구하는 사람에 의하면 베드로는 완벽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나라는 식민지입니다. 피해의식이 가득한 이 제자들, 혁명 한번 해보겠다고 하는 그 사람들 12명을 제자로 모아서 리더십을 발휘했다면 이거 대단한 사람입니다. 신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 신념이 여러분 가족 앞에 여러분의 직장 앞에 돈 앞에 주저앉잖아요.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자기 신념을 위해서 이름 없는 청년도 따라가고 자기 신념을 위해서 가족도 버리고 자기 신념을 위해서 직장도 버린 거예요. 이런 사람 있나요? 별로 없어요. 이적과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에요. 확실한 증거를 붙들고 있는 사람이에요. 자기의 신앙고백이 얼마큼 분명한지 로마 병정이 왔는데도 적어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목숨 내놓고 칼 들고 설친 사람이에요.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적과 기적을 통해서 자기가 섬기는 무명의 선생님을 일약 전국의 스타로 만들 수 있는 그런 프로모션에도 능한 사람이에요. CEO 중에는 탁월한 CEO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복음 21장에 그는 모든 것 다 잃어버렸어요. 큰 것도 아니에요. 계집아이의 그 말 한마디 앞에 여지없이 곤두박질쳐버린 거예요. 작은 것 앞에 여지없이 무너져버린 그 베드로, 왜 이렇게 됐을까 할 때 주님이 오셔서 그에게 깨우쳐 주는 게 뭡니까? “베드로야 배 옳은 편에 그물을 던져 봐라” 이것은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처음 베드로를 만났을 때, 제가 여러 번 말씀 드리지요, 처음 베드로를 만났을 때 “베드로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봐라” 전문가인 베드로는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밤새도록 던져 봐서 경험이 있어요. 통계적으로 안돼, 자기는 전문가야! 그가 순종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면 말씀에 의지하였어요. 

그리고 오늘 요한복음 21장에 밤새도록 고기를 잡아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하신 그 곳에서 주님께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뭘까요? “베드로야 너 최선 다하고 열심히 살아서 스스로 네가 왜 실패했는지 너도 모를 거야, 네가 실패한 이유가 하나 있다면 네 인생 기준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이야 --- 말씀에 의지해서 네 경험도 내려놓고 말씀에 의지해서 네가 생각하는 지식도 내려놓고 네 인간관계도 다 내려놓고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했을 때 거기에는 정말 생명이 열매가 얻고자 하는 것이 얻어졌지만 네가 옳다고 생각해서 판단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너를 칭찬해주고 네가 명성도 얻고 모든 것 이뤄놓은 것 같지만 그 결국의 마지막은 패배하는 것 밖에 없다” 는 거예요. 

여러분 저는 이거 믿습니다. 저는 그 바닥까지 가봤습니다. 말씀이 얼마큼 우리의 삶에 기준이 되는지, 저는 많은 유혹도 받아봤습니다. 말씀대로 살 때 후회함이 없습니다. 지금 그나마 제가 요만큼 이라도 사는 것은 그 유혹과 그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말씀을 따라가려고 발버둥치고 그렇게 하려고 했던 그 이유 때문이라고 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한 것은 아니지요 성령께서 도우셔서 그렇게 하셨지요. 그러나 우리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만 보면 말씀을 따라가고 내 경험과 환경을 따라가지 않았던 거기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와 자신과 자신의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 마십시오. 저 사람 때문에, 이 사회가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살아왔던 삶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 뭘까? 진리 되신 하나님 말씀, 역사를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뭘 원하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심판의 기준을 뭘까? 거기에 여러분의 인생의 초점을 맞추어서 사시면 진리는 변치 않거든요, 우리 삶에 결코 후회함이 없다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37절 보니까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마음에 찔려야 질문이 나와요 여러분!  마음에 안 찔리면 질문도 안 나와요. 거룩한 의문이 우리 속에 생겨지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례를 받으라는 거예요. 세례라는 것은 뭡니까? “내가 정말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이 고백을 사람들한테 선포하는 거에요.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이제는 내 기준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따라 살겠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내 삶의 우선순위와 내 삶의 습관과 내 삶의 태도를 바꾸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성령께서 도와주시고 그 성령께서 도와주신 삶은 뭡니까?  이전과는 생각이 다르고 삶이 달라요 열매가 달라요, 그래서 재 생산의 삶을 살게 됩니다. 증인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돼요, 말씀 보세요, 말씀 연구하세요. 목사라고 장로라고 권사라고 말씀 기준 안 따라가면 똑같습니다. 장로 되었다고 목사 되었다고 집사 되었다고 권사 되었다고 이 말씀의 법칙에서 절대 예외가 없습니다. 안 지키면 죽습니다. 안 지키면 멸망합니다. 똑 같습니다. 어린아이라도 이 말씀 지키면 삽니다. 인간이 만든 기준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뭔가? 

여러분 적어도 고민 좀 하시면 좋겠어요. 예, 우리가 난 예수 잘 믿으니까 하는 분들 정말 고민 좀 해보세요 보험 들듯이, 제가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정말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은 나에게 뭘 말씀하실까? 어제 밤에 발리에 있는 선교사님 부부가 오셔서, 그 분은 학원이 잘 되고 그래도 잘 섬기는 장로님인데 발리에 가서 정말 헌신적으로 뛰셨어요. 언어도 알 때가 아직 안되었는데 벌써 유치원 초등학교 세우면서 아마 우리 장로님들 가시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 어떻게 하시게 됐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 제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선다고 했는데 전부다 한 게 세상 일이지 하나님 앞에 한 게 아무것도 없더라는 거예요. 어느 날 장로님이 그냥 목사님하고 결정하셔서 불모지에 그냥 툭 던져놓는데 정말 죽기보다 가기 싫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는 하나님 앞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면 뭘 보실까 할 때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면서, 내 삶을 헛된 인생으로 살지 말아야 되겠구나, 나와 세상만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결단을 하나님 앞에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노라고 ---- 

여러분 선교지만 나가서 그런 게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밥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밥한다 할 때 밥맛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반찬이 달라져요. 자매들 왜 자꾸 고개 숙이세요. 남편 삥땅이 없어집니다. 하하하 하하하하 ---우리 삶이 달라지지요, 하나님께서 나의 작은 힘이 바뀌어도 주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내 인생 살겠습니다. 전에는 내 행복을 위해서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께서 나를 보내신 그 사명을 위해서 살 때 행복은 덤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영국 에딘버러에 가면 Covenanters Prison 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자막에 나오지요. 에딘버러에서 공부하신 분에게서 내가 도움을 받았는데 우리 영국에서 공부하신 오목사님이 이 자료를 찾아주셨어요. 그런데 이 감옥에 유래가 다음과 같습니다. 1625년 경에 로마교황의 교회를 노예로 삼으려고 하고, 왕의 노예로 교회를 삼으려고 하는 그 음모가 일어났을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그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의논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프리야스 교회라는 곳에 에딘버러에 있는 프리야스라는 교회가 있는 곳에 50여명이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모여서 “정말 우리가 믿는 게 뭘까? 믿는다는 게 뭘까? 지금까지 정말 우리가 잘 믿어왔는가? 지금 세상에 굴림 하는 왕을 섬기라고 하는데 정말 왕은 누구인가?” 다시 이들이 고백한 거예요. “우리의 왕은 예수그리스도 이다. 인간이 우리의 왕이 될 수 없고 우리를 통치할 수 없다. 정말 우리가 믿는 이 복음 예수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세주가 되시고 나의 힘이 되시고 나의 왕이시다” 

이 고백을 하는 분들 50여명이 교회를 나온 거예요. 왜, 그때는 교회 재산과 모든 것이 나라 것이니까 전부다 내침을 받은 거예요. 이 분들이 광야에서 이슬을 맞으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 스코틀랜드 지역이 산과 들과 이렇게 있기 때문에 저 산을 보면서 들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것도 이제 보기 싫지요, 그러니까 이들을 죽이기 시작한 거예요. 단두대에 세웠는데 심지어는 아이를 안고 엄마가 ‘얘야 조금 뒤면 우리 만날 거야” 그러면서 얘를 검은 보자기를 씌워서 먼저 죽게 한 다음에 부모가 죽는 이렇게 죽어가는 거예요. 50명이 시작했는데 18,000명이 그렇게 죽어간 것입니다. 여러분 그 단두대 앞에 섰을 때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이 내 사랑하는 자녀를 죽이면서 까지도 이 복음이 그만큼 나에게 정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인가? 그 고민 안 했겠어요. 

그래 이분들을 언약도 라고 합니다. 언약도 라는 의미는 뭐냐하면 우리가 주님과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믿음의 정조를 지켜야 된다. 정말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왕이라면 내가 종으로서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주님 안에 소망이 있고 그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주님 안에 구원이 있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나는 살아야 된다. 그렇게 해서 그 언약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해서 “언약도” 라고 합니다. 이 분들이 많아지니까 감옥을 짓게 됐는데 비참하게 죽게 하기 위해서 한쪽 벽만 있고 위에도 창살 옆에도 창살이에요. 비가오면 비 맞고, 눈 오면 눈 맞고 바람 불면 다 맞고 먹을 것은 사람들이 던져 주는 음식 먹고 물 마시고 28년 간을 그렇게 받으면서도 이 믿음 지킨 것입니다. 

이들이 지킨 믿음이 지금 우리가 신조어로 받아드리고 있는 웨스트 민스터 신조어에 아주 핵심이 됐어요. 이 역사를 통해서 청교도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선교의 역사가 계속 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세계가 바뀌는데 피를 흘리면서 유혈혁명이라고 그러지요, 그런 혁명이 일어난 반면에 이 영국은 무혈혁명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사회가 바뀌는 놀라운 일들이 이 신앙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역사 속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이 사라진 곳에 억울한 사람이 없어집니다. 노예가 해방됩니다. 연약한 사람이 새 힘을 얻습니다. 여자들이 새로운 자기의 권리를 찾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유 함을 얻게 됩니다. 이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서요. 그 역사를 만들어 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 언약대에 오른 언약교 중에 제임스 거슬 이라는 사람의 죽음 직전의 메시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죽음 직전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나의 영혼을 의탁합니다. 나는 이 교수대를 영국 전역에 있는 감독 주의자들의 궁궐이나 대 저택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인 괴수에게 자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고 나로 영원한 복음의 사역자로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단과 세상의 의도와는 반대로 나의 사역의 영향력을 소수의 사람들이 아닌 스톨링시 전체와 그 노예를 통해 광범위하게 미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나의 생명이며 빛이요 의요 힘이요 구원이요 모든 것 되십니다. 오직 그분에게 나의 영혼의 힘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충성할 것입니다. 나의 영혼아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분을 송축할지어다. 

주여 이제 나의 눈으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언약도여 언약도여 그대들이 스코들랜드의 부흥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 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 피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간것을 봅니다. 그로부터 200년 뒤 그 에딘버러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 청년의 가슴에 이 감옥은 그 청년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낮에는 해가 비춰서 그들을 상하게 만들고 밤에는 달을 보며 마음이 괴롭고 상했던, 그리고 연약했던 그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이 믿음이 내가 믿는 이 복음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에 서로를 격려하며 저 펼쳐지는 저 산을 바라보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노래했던 바로 그들의 믿음의 선조를 생각하면서 지었던 찬송이 있습니다. 그것이 73장의 찬송입니다. 

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 산악이라 
날 돕는 구원 어디서 오나 그 어디서 
하늘과 땅을 지은 여호와 
날 도와 주심이 확실하도다. 
주께서 나의 가는 곳마다 지키시며 
졸지도 않고 깨어 계셔서 늘 지키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 
쉬지도 않고 살펴주신다. 
여호와 나의 보호자이시니 늘 지키며 
오른편 그늘 되신 날개로 가려 주사 
낮에는 해가 상치 못하며 
또 밤에 달이 해치 못하네 
여호와 나의 영혼 지키사 돌보시며  
내 모든 환난 면케 하시고 늘 지키네 
이날로부터 영원 무궁히 
주 너의 출입 지켜 주시리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어쩌면 저와 여러분은 단두대에 섰습니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 물질과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예배 드리고 있는 이 하나님, 이 복음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문화라는 이름으로 다가와서 어느새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쾌락을 추구하고 욕망을 추구하고 내 명예를 추구하고 내 자존심을 추구하는 그 중요한 선택에 서서 이 복음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때로는 내 삶에 실패와 아픔 고통 좌절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그 절망까지도 이 단두대에서 내가 믿는 이 복음이 얼마큼 소중한지, 어떤 고백을 여러분 하시겠습니까? 그 고백은 여러분의 삶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고백은 인생의 분기점을 만들고 역사의 분기점을 새롭게 그어갈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은 나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암담했던 역사에 어두운 터널 이 복음의 빛을 위하여 삼천리 강산 금수강산 노래 부르며 하나님의 소망을 노래했던 그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없었다면 배교하라고 요청하는 요구하는 고문하는 그래서 가족을 찢어놓고 그리고 자신의 모든 희망을 다 갈라놓아버린 그 상황 속에서도 이 복음이 복음으로 되어 내 삶 속에 살아서 역사해야 되겠기에 이 복음이 나의 복음만이 아니라 이 민족 위에 이 역사 속에 우리 민족 속에 함께 지켜져야 될 이 복음이기에 기쁜 소식이기에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그 피 흘림 속에 오늘 우리가 다시 서게 된 것입니다. 

이제 다시 우리는 결단하셔야 됩니다. 내 자존심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돈에 대한 나의 욕망 명예에 대한 나의 욕망 내려놓고 이 복음의 본질 앞에, 주님 다시 내가 믿는 그 주님, 나의 왕 되신 주님 그 주님을 찬양합니다. 낮의 해가 나를 상하게 만들고 밤의 달이 내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 할지라도 내 자녀가 목이 잘려 죽어가는 바로 그 상황 속에서도 이 복음이 무엇 때문에 이만큼 중요하단 말인가? 그 질문을 던지면서도 맞습니다 주님,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이 신앙의 고백이 역사를 새롭게 하고 민족을 새롭게 만들고 소망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에게 참된 하늘나라의 비전을 주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단두대에 함께 선 여러분 어떤 노래를 부르시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묻기를 원하십니다. 프리야스 감옥, 비가오면 비를 다 맞고 눈이 오면 눈맞고 바람불면 바람을 다 맞고 아무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태양의 뜨거움과 달이 뜰 때 추위와 더불어서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절망하게 만드는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나의 왕은 주님입니다. 주님의 이 복음이 이 진리가 세워져야 됩니다. 인간의 이데오르기는 희망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희망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이 복음만이 다시 세워져야 됩니다.”  이 복음의 헌신과 결단을 했던, 단두대에 살아졌던 그 분들 오늘 어쩌면 우리의 역사는 단두대에서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얼마큼 소중합니까? 사업의 실패보다 소중합니까? 자녀보다 소중합니까? 여러분의 자존심보다 소중하십니까? 왕 되신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삶의 단두대에 서신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자녀가 죽어가던 그 앞에서도 거절하지 않았던 그 신앙의 결단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자막을 한번 비춰주세요. 감옥의 자막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이 자막을 보시면서 여러분 묵상을 좀 하시기 바랍니다. 저들은 우리만큼이나 소중한 생명을 가졌습니다. 자녀들도 사랑했습니다. 자기의 꿈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그 언약 앞에 담대했었던 저들의 무덤이 죽음의 무덤이 아니라 생명의 무덤입니다. 소망의 무덤입니다. 

오늘 나의 삶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되어졌으면 좋겠는가? 내가 믿는 하나님이 그토록 가치 없는 하나님이었단 말인가? 내 사업보다도 내 명예보다도 내 돈보다도 내 자존심보다도 가치 없는 보험이었단 말인가? 여러분에게 있어서 복음은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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