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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냄을 받은 자의 선택 (욘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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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냄을 받은 자의 선택 (욘 1:1~10)


오래 전에 신 학생들과 이 요나서를 공부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당신에게 지금 찾아오셔서 말씀하신다면 당신 마음이 어떨 것 같습니까? 
다양한 반응이 나왔지만 공통적인 것은 굉장히 부담스럽다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거 참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예배에 나오셨고 하나님 말씀 듣기 위해서, 그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여러분 나오셨는데 상당히 아이러니한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과 동행하며 일평생 살겠다고 신학 배우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니 오늘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들어가세요. 하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오셔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면 여러분 기분이 어떠실 것 같으세요? 여러분도 아마 그런 심정일 것입니다.  

왜냐, 오늘 요나를 이렇게 바라보면 요나는 자기의 계획이 있었거든요. 
이미 선지자로서 적절한 대우도 받고 생활도 안정되고 있었고 그리고 자기 일에 만족하고 있는데 어느 날 자기의 기쁨과 자기의 만족과는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불러서 자기 일 하라고 그렇게 찾아 오셨을 때는 이거 참 입장 곤란한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1절 읽으면서 어떤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QT하고 1절 읽으면서 “참 요나 골치 아프게 생겼다” 그 생각했습니다. 
왜요, 발신인과 수신인이 정확합니다. 이름이 동명이인이 있을 까봐 그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면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여러분 우리가 오늘 설교 시간에 말씀을 들어도 별로 우리가 가슴이 찔리는 것도 없고 삶의 변화도 없는 이유가 뭘까요? “저거 내 얘기가 아니야! 다른 사람 얘기야! 우리 마누라가 와서 들어야 되는데 오늘 따라 왜 빠졌지!” 이렇게----

그 익명성 때문에 내 마음이 좀 편안한 거예요. 그런데 이름을 딱 찍어서 얘기합니다. 
“너, 너에게 내가 분명히 얘기하는데 네가 해야 돼!” 
이렇게 수신인이 정확하게 지정이 되면 그거 참 부담스럽습니다. 
그 다음에 발신인이 정확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발신인이 어떤 분이냐?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의 삶을 인도 하실 뿐만 아니라 가장 결정적으로 우리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 최후의 심판의 심판 주 되시는 그 하나님이 나의 이름을 콕 찍어 불러서 이것 하라고 할 때 이거 부담 안 되는 분 있겠습니까? 
참 요나 안 되었습니다. 제가 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정확하게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우리 살아가는 삶의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것을 바라봅니다. 이 영어 성경을 보면 But, But, But, 그러나, 그러나 이렇게 반전 되는 게 참 많은 이유는 우리가 살아오는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산다는 것, 주의 음성을 듣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서 증거하고 나타내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뭐 정확한 얘기가 될는지 모르겠지마는 제가 성경을 보고 또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께 연령대 별로 하나님께 나가는 통로가 조금은 다른 것 같습니다. 10대와 20대는 철저하게 복종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하나님은 훈련시킵니다. 왜 그러냐 하면 10대와 20대는 자아의식이 형성 되기 때문에 자기 것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복종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복종이라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대체적으로 많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30대와 40대는 결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길을 많이 보여줍니다. 여러분 30대와 40대는 기회도 많습니다. 유혹도 많습니다. 여러 가지 삶의 가지치기가 되어서 내 삶이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가지치기 하면서, 결단하면서 나가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결단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준비시켜 줍니다. 

50대 이상은 뭐냐? 내려놓음입니다.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하나님은 열어주지 않습니다. 50대 넘은 분의 훈련의 중요한 점은 너 가진 것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아픈 것도 상처도 괴로운 것도 원망하는 것도 성공한 것도 가지고 있는 것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가는 길을 결단코 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 삶 속에 복 주시기 위해서 부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마는 오늘 우리가 찾는 하나님은 내 계획과 내 뜻과 내 생각에 도움을 주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하지 하나님의 사역 앞에 부르시고 주님께서 쓰시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잘 갖지 못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모습이 바로 지금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이 괴롭고 고통스럽고, 이렇게 순종했다면 우리의 삶이 뭔가는 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이전과 별 차이 없이 오늘도 반복되는 그 삶을 사는 이유 중에는 오늘 요나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말씀 듣고 도망가는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거의 흡사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일 먼저 요나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 이유 중에 자기 자신에게서 변명을 댑니다. “나는 약합니다. 나는 안됩니다. 나는 가진 것도 없습니다. 나는 나이가 이미 많이 먹었습니다. 나는 은퇴했습니다. 나는 여자입니다.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가난합니다. 나는 초신 자입니다. 나는 이미 다 살았습니다.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도 많습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이 많고 나는 내 나름대로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번도 해 본적도 없습니다. 내 취향에 맞지도 않습니다. 내가 하기에는 너무 잘 할 것 같지 못해서 두렵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제시 됩니다. 

요나가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했을 때에 이 니느웨성은 가로 질러 가도 3일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성 안에는 어린 아이만 12만 명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한 50만 명쯤의 인구가 될 거예요. 그가 혼자 전체를 다니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것, 이거 정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을 보게 됩니다. 

때는 저물었고 돈도 없고, 돈이 있다 할지라도 먹을 음식을 살 수도 없고 우리가 가진 것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밖에 없고 먹여야 될 사람은 장정만 5000명이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Mission Impossible 불가능, 여러분 맞지요? 예, 객관적입니다. 

“내가 하기엔 너무 약합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은 너무 크고, 너무 많고, 나는 가진 것 없고 너무 약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가 쉽게 안전하게 변명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수많은 이유 중에 하나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말씀 앞에 복종하지 않는, 순종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이해 관계를 통해서 볼 때, 아무런 이익이 없을 때, 오히려 하나님 말씀 따라 갔다가 더 큰 손해를 본다고 판단 될 때 순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책임 지려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고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 조차도 하나님에게 정말 존귀하고 귀한 사람으로 남으려고 하는 것보다 나와 더불어 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고 하는 일들을 많이 봅니다. 이것이 인정 욕구에서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사랑 받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 불편하거나 무리한 일을 감수하지 않습니다. 늘 삶의 수준이 그 수준에서 맴돕니다. 

오늘 이 요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기가 히브리 인인데 이 니느웨라는 곳은 자기들을 공격할, 앞으로 멸망시킬 앗수르의 수도 입니다. 그리고 역사가들에 의하면 역사 속에서 가장 잔인한 민족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자기가 적진에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화약을 지고 불 속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선교사로 파송 되라고 그러면 지금 아프카니스탄의 그 전쟁 터지는 바로 거기에 투입되라는 말하고 똑 같습니다. 가봐야 본전 건질 것 없는데 왜 가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 명령이지만 자기가 계산해 보니까 뻔한 결과 이거든요. 안 갑니다. 

그 다음에 가서 좋은 말합니까? 여러분! 
가서, 야! 내가 기도하는데 아프카니스탄이 정말 복 받는 나라가 된다, 미군을 이기고, 조금만 인내해라, 승리해라. 그래도 이 사람들이 어떨까 모르는데 ------
이 니느웨 가 가지고 “망한다 너희들 다 폭삭 망한다.” 

여러분 집에 누가 와서 ‘내가 기도해 보니까 너희 집 폭삭 망한다’ 여러분 기분 좋겠습니까? 기분 안 좋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 가만 두겠습니까? 가만 안 둡니다 여러분! 

이 요나가 생각할 때 좋은 메시지가 아닌데 이거 가가지고 전하다가는 이거 참 자기 신변이 참 위태롭습니다. 게다가 너 무슨 근거로 얘기하니? 그렇게 물어보면 회피할 문서나 자료가 있어야 되는데, “근거 없다 하나님 말씀이 그렇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누군지 압니까? 믿습니까? 자기나 믿지 ‘하나님이 그렇다’ 근거 없는 것 가지고 가서 ‘망한다’ 이렇게 하려고 하니까, 여러분 계산해 보면 나오는 것 아니겠어요. 잘 하면 살아나오고, 조금만 더 어려움 겪는다면 실컷 얻어 터지고 나오고, 잘못하면 나오지도 못하겠구나! 

여러분 주님께 부름 받을 때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소용되는 것이 있는데 시간과 돈입니다. 시간 아깝습니다 여러분! 내가 내 일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주의 일합니까? 그렇죠. 돈, 귀중합니다. 여러분 돈 많은 분 돈 쉽게 생각할 줄 압니까? 아닙니다. 돈 많은 분 쉽게 이렇게 내놓고 그렇게 못합니다. 왜요, 돈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그분들은 돈을 모은 분들입니다. 누구든지 돈은 소중합니다. 그 돈 쓰는 것 별로 안 좋아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주의 일을 할 때 돈이 얼마큼 들어가느냐? 누구 돈이 들어 가느냐? 그리고 누가 어떤 자리에 앉느냐, 이거 계산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주의 일이 뭔가를 따집니다. 
여러분 주님 일 할 때 어때요. 손해 봅니다. 손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아이고, 예수를 믿어도 아주 요령 것 믿고 지혜롭게 믿어야지 저렇게 미련하게 믿다가는 안 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우리는 순종하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세 번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기준 때문에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 유대주의 라는 사상은 하나님이 유대 백성만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 그 사상이 전통과 관습과 문화 속에 배어져 내려왔어요. 

그런데 이 앗수르에게 가서, 이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하나님이 멸망케 하신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바로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는 는 것, 그것 정말 허락 지 않습니다. 조국을 배신할 수도 없고 자기가 지금까지 그렇게 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기 신념에 위배 되기 때문에 그 일을 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평가 그리고 자기가 공부하고 자기가 느끼고 깨달았던 것, 이것이 형성되어서 우리 신념이라는 게 만들어지는데 오랜 역사 속에서 경험 속에서 문화 속에서 형성된 이 신념의 틀을 깨트려서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욥바라는 곳에서 정규 기도시간이 되어서 기도 처에 갔을 때 그 환상 속에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는데 그 속에는 율법과 전통과 관습과 가르침이 금지한 벌레가 가득했습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그 벌레를 잡아먹으라 그럴 때 베드로가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이런 부정한 것, 율법이 금하고 하나님 말씀이 금한 것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하나님 말씀이 너 고넬료 집으로 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 만약에 베드로가 자기 신념 속에만 있었다면 이방인의 선교의 문은 열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깨달음이 있지 안습니까? “사람은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구나!” 그 놀라운 깨달음의 교훈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내 신념의 틀에 하나님이 갇혀있습니다. 내 손해와 이익 관계에 하나님이 갇혀있습니다. 내 자신의 연약함에 하나님이 갇혀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든 하나님일 순 있어도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산에 따라 제한 되고, 행정에 따라 제한 되고, 내 상식에 따라 제한 되고 환경에 따라 제한 된다면 그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은 더 이상 아닌 것입니다. 

오늘 이 모든 일에 궁극적인 근거가 뭐냐? 이유가 뭐냐? 하나님 말씀에 불 순종과 불 신앙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롱 당하는 분이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어떤 이유를 갖다 대도 양심적으로 마음 깊이 근본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 말씀을 못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하나님 말씀 앞에 부담스러운 이유이기도 하고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 변화되지 않는 바로 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끝나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요나를 다루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제일 먼저 하나님은 저희들 절대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큼 투자하셨는지 아십니까? 자기 아들을 죽이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쉽게 포기하시겠습니까?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부담스러운 것이 우리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다윗도 굉장히 부담스러웠습니다. 부패한 인간의 모습 속에는 하나님 뜻을 즐겨 순종하고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내 마음대로 내 자유를 가지고 내 생각대로 살기를 원하는 부패한 생각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이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명령 앞에 도망가고 난 다음에 그는 시편 139편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7절부터 12절까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에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이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 이다.”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이 새벽 날개 호를 타고, 쾌속정을 타고 바다 끝까지 가 있어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더라는 거예요.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낮과 밤이 일만이라는 거예요. 다 본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치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포기치 않는 그 끈질김 때문에 오늘 우리의 삶은 구원을 얻었고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치 않고 붙드시는 그것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을 믿으십니까? 예! 

우리의 귀찮아 하고 힘들어 하는 그 주님의 끈질김, 자기의 아들까지 투자해서라도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의 알 수 없는 그 끈끈한 사랑과 정이 우리에겐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부담스러운 사랑이 오늘 우리가 진정 복된 삶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셨고 구언의 길로 인도하신 놀라운 진리가 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그리고 17절에 자기가 그 속에서 돌아와서 왜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인가 하는 것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시편 62편 1절 보니까 “나의 영혼이 하나님만 잠잠이 하나님만 바람이며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 도다” 6절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도망다니고 피해 다녀도 하나님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피할 수 없을 바에는 일찍 들어가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예, 그런데 표정 보니 밖에서 좀 더 놀다가 가실 것 같아요. 

그 다음에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분이십니다. 이 참 불합리하고 이해하지 못할 사건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한번 보십시오. 
이 큰 니느웨 성에 어린아이만 12만 명이 있는 이 성에, 한 50만 명 되는 이성 인구의 전체에 운명을 요나 한 사람 그 사람에 의해서 좌지 우지 하겠다는 거예요. 어떤 요나 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받은 요나 ----
여러분 다시스로 가는 그 배에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부자 가난한 사람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 인품이 있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 남의 돈 떼 먹고 도망가는 사람 살인자 도둑놈 무수한 죄인들 다 타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이 배의 운명을 좌우하지 않는 다는 거예요. 이 배는 하나님 말씀을 들은 요나 하나에 의해서 뒤집어 질 수도 있고 살아 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아간 이라는 한 사람이 말씀 순종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 큰 프로젝트를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계획을 가지고 엄청난 이 사람들이 진행해 나가는데 이 한 사람 때문에 스톱되고 아이성에서 패배함으로 수많은 자기 백성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다윗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7만 명이라는 사람을 치셔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여러분! 왜요, 하나님 말씀을 들은 한 사람을 하나님은 소중히 여기시고 하나님 역사를 열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 듣고 계시죠? 

제가 설교했지만 이토룍 여러분이 갈등 느끼면서 불안해 하면서 말씀 듣는 표정은 처음 봅니다. 하나님 말씀 듣고 계시죠? 아멘 

그렇다면 우리 좌우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좀 말씀해 보십시오. 
“당신 참 알고 보니 소중한 사람입니다.” 예 좀 해 주세요 괜찮아요. “당신 참 소중한 사람입니다” 예, 여러분 저도 나이가 먹을 만큼 먹었고 위치도 있고 한데 하라고 부탁 드릴 때는 쑥스러운 것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상으로 저도 점잖습니다. 하라고 그러면 한번 해보십시오. 평생 못합니다 안 하면! 표현할 때 달라집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 말씀 들은 내가 참 소중한 존재구나! 왜요, 이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풀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 이었지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주님 말씀 앞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가 될 수 있는 사사 시대와 왕정시대의 전환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귀중한 교훈을 남기면서 그 사무엘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 일을 로마서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9절에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하나님은 이해하지 못할 분이지만 그 하나님의 분명한 특징은, 성경에 나오는 특징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바로 그 사람을 주목하고 그 사람의 응답을 귀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여러분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러분 가정을 살리실 수도 있고, 교회를 살리실 수도 있고 민족을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 우리는 존귀한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은 그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 들려질 때 더 이상 미루거나 연기하거나 딜하지 아니하고 그 말씀 앞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따라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귀하게 이루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형통한 길을 열어주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하는 사람의 길은 하나님이 막습니다. 여러분 일이 잘 안 풀리고 어렵고 힘들면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나는 말씀을 어떻게 듣는 사람인지 곰곰이 고민하셔야 돼요. 

물론 듣는다고 해서 형통하고 그런 것 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내가 참으로 내 삶에 있어서 왜 이리 막힘이 많을까, 풀려지지 않을까 할 때, 여러분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펴보셔야 됩니다. 
이 요나를 보십시오. 자기는 하나님 말씀 순종하지 않고 그 비싼 돈 주고 아주 멀리 가는, 다시스로 가는 뱃삯을 주고 타지만, 여러분 배 삯 환불 받았습니까? 목적지까지 갔습니까? 중간에 물 속에 내렸기 때문에 환불 받았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열심히 하면, 처음에 딱 가니까 다시스로 가는 배가 대기하고 있었잖아요, 배 시간 맞추기도 참 힘들 텐데---- 도망가는 사람은 1초가 바쁩니다. 딱 다시스로 가는 배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야 이거 하나님 주신 기회구나!” 숨통에 돛 단 듯이 나가는 것 같지만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하나님 말씀 거역하고 살면 잘 되는 것 같지만 가만히 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곤고해지는 거예요. 

저는 그런 분들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애쓴 뱃삯 리턴 못 받습니다. 그대로 물 속에 다 집어넣어야 됩니다. 목적지도 못 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 하나님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러분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아시지요. 아버지 아므람을 아시죠.
그 당시에 애굽에서는 히브리인 중에 남자들이 많이 태어나니까 명령을 내립니다. 
히브리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산파들 보고 다 죽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그거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거 보시고 축복하십니다. 그 중에 요게벳이라는 여인에게 아들이 태어납니다. 다들 아들이 귀합니다마는 이 요게벳의 삶과 사역을 이렇게 바라보면 이 아들이 하나님께서 쓰셔서 이 민족을 구원하는 그런 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역사 교육을 나중에 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그 마음을 가지고 이 아들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숨깁니다. 이 아들을 살리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어떻게 하든지 쓰십시오, 주님 뜻에 맡깁니다.” 그래도 이 아이가 크니까 안 되어서 갈대 상자를 만들어서 나일강에 띄웁니다. 

그리고 그 누이 미리암 보고 어떻게 하든 보라고 이릅니다. 마침 그 갈대상자는 바로의 공주의 손에 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바로 공주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순간 이 아이를 기르고 싶은데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일 사람이 없을 때 하나님은 준비해왔던 미리암에게 얘기 합니다. 미리암이 가서 “공주님, 유모가 필요하십니까? 제가 젖이 잘나오고 자녀를 너무나 사랑스럽게 잘 기를 유모를 한 사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모세는 자기 친 어머니에게 인도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출애굽기 2장 9절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아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여러분 자가 아이 젖 먹이는데 삯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 아이 키우는데 나라에서 막 삯을 주고 모든 것 뒷받침 다 해주는 것 보셨어요? 게다가 법적으로 불안하고 두려우나 키울 수 없는 그곳에서 당당하게 자기 엄마가 당당하게 이 아이를 키웁니다. 

여러분 다윗이 고백했던 것처럼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신다”고 했어요. 내 원수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상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을 목자로 섬기는 그 백성들을 어떻게 축복하시는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하신다고 그랬어요. 하나님 축복은 공개적입니다 여러분! 

한 여인이 매일 베렌다에 나와서 ‘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랬더니 옆집에 있는 불신자가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계속 이렇게 얘기합니다. 한 날은 ‘하나님 양식을 주십시오,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앞에 양식이 어느 날 와 있는 거예요. ‘양식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럴 때 이 옆 집에서 ‘신은 죽었다, 그 양식은 내가 갖다 준 것이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이 여인이 다시 외칩니다. ‘하나님 저에게 양식도 주시고 양식 대금을 지불할 사람도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뜻대로 하면 내가 내 일 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세요. 
전 제가 어릴 때 저희 어머님을 통해서 들은 얘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어머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렸지만 저는 분명히 기억합니다. 
형준아 이상한 게 있다, 뭐 예요? 내가 저 사람 좀 도와야지 마음 먹으면 이상하게 돈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게 여러 번 반복 되니까 아! 이게 내가 내 돈을 돕는 게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받으시는 구나! 

여러분 하나님은 거지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을 시킬 때는 자기 것 가지고 하라고 그러지 우리 것 가지고 하라고 그렇게 안 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축복 주시고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게 일이 많다고 내가 시간이 없다고 바쁘다고 그러고, 하나님께서 쉬게 눕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더 건강하게 하셔서 활동 많이 하게 하는 게 좋습니까? 분명하게 여러분 선택하세요. 우리가 분명한 우리의 삶의 가치를 분명하게 정립하고 나가야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나는 뱃삯을 내고 갔지만 자기 목적지에 가지도 못하고 어렵게 마련한 뱃삯도 돌려받지 못했지만 요게벳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선택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신 모든 것을 지불해 주시고 요게벳이 정말 이루려고 하는 것을 완전히 이루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자기 자녀에게 젖을 먹을 먹이며 민족 교육을 시킬 수 있는 바로 그 기회를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돈에 묶기면 우리는 돈이 하나님이지 우리 성경에 나오는 그 하나님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상식과 내 경험에 묶기면 하나님은 내 상식과 경험에 불과한 존재이지 우리가 정말 믿어야 될 그런 존재는 아닙니다. 오늘 십 대 이십 대에 여러분이 있다면 복종함으로 주님께 나가십시오. 삼십 대 사십 대 결단하십시오. 오십 대 이상 내려놓으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 나갈 길이 보이게 됩니다. 아멘 입니까? 예! 

하나님을 만날 때 그 하나님이 주시는 포기치 않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호주와 캐나다 코스타에서 장로님들 귀한 분들 두 분을 만났습니다. 한 분은 다음에 좀 소개를 하고요, 한국 쿄세라 전공에 전이인 장로님을 제가 만났습니다. 이분은 우리 교단인 충신교회의 장로님이신데 자신이 섬기는 이 회사는 일본과 합자회사 입니다. 

그런데 이런 회사가 세계적으로 180개가 있는데 이 회사에서 설립한 분이 쿄세라 경영 마인드라고 그러면 일본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받아드리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쿄세라의 경영방식이 아니라 이 장로님은 하나님의 경영방식을 도입하면서 180개의 회사가 지난 10년 동안 목표 달성을 한번도 못 이룬 적이 없고, 완벽하게 이룬 회사는 이 회사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회사가 이렇게 세워진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이 장로님께서 IMF 때에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때 문득 자기가 자기 자신의 신앙과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온 우주를 창조하신 이 하나님과 이 IMF 이 경제적인 환란이 내가 지금 사역하는 직장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남이 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면 이 사업과 내 신앙이 뭔가 관련이 있어야 되는데 자기는 이거는 따로 신앙 따로 ----
마침 회사가 어렵기도 했지만 40일 특별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어떻게 됩니까? 할 때,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너를 통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큼 되냐?” 

하나님 저는 예수 믿게 하는 게 제 목적이 아닙니다. 저는 돈을 벌어서 장로로서 교회에 헌금 많이 하고 주의 종 잘 섬기고 그리고 월요일 마다 목사님들 모셔다가 여기에서 예배 드려서 하나님 말씀 듣고, 직원들이 하나님 믿게 되는 것이 그 일이지 하나님 그것은 제 사명이 아닙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이 장로님에게 다시 한번 그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를 통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큼 되느냐?” 

자기가 지난 십 년 동안 자기 위해서 사업하니까 믿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성경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장33절, 그 말씀을 주시는데, 아하! 하나님께서 내게 물으시는 것이 얼마큼 이윤을 남기고 얼마큼 거 하는가 그것보다도 이 경영, 먹고 마시고 사는 경제적인 삶의 원칙이 뭐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거구나! 

그때부터 이 직원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업체에서 더 힘들고 어렵게 해야 되는데 이 장로님은 부인들이 여자들이 직장에 나올 때에는 그 사연들이 복잡하다는 거예요.여자들이 직장 나올 때에는 그 삶이라는 게 참 힘들고 찌들어 있다는 거예요. 또 그런 분들은 삶 속에 여러 가지 꼬이는 문제가 있는데, 직장에 나와서 사랑을 받습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희망을 찾습니다. 가정이 회복됩니다. 

자기 회사에는 똑똑한 사람 없다는 거예요, 그 분들이 가정이 회복되고 마음이 회복되고 한 공동체가 되면서, 뭐 회사 목표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섬김, 사랑 ---
우리 김현준 목사님 같이 들으셨으니까 아마 잘 아실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를 세워나가시기 시작하는데, 지금 우리 미션하고 똑 같은 거예요. “삶의 현장을 하나님 나라로”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직장이었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고 나니까 이 장로님께서 저는 왜 이 일이 이렇게 됐는지 모르셨는데 목사님 통해서 왜 된지를 알게 됐습니다. 

이번 캐나다 코스타 가니까 그분이 강의 하면서 그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이 김목사님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고,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가시는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어가시고 이 직장이 교회 같아요. 한 200명도 안 되는 회사가 지금 사내 커플이 28쌍인데요, 정말 그곳에 사랑이 있고 회복이 있고 치유가 있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직장이 옛날에 교회 같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역사를 체험하고 간증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18개 회사의 사장들이 모여서 회의 할 때 이 장로님이 먼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저 전상 하나님 찬양한다고 그러는데 회사에서 인장한다는 거예요. 일본인들이 자기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그때 이제 나타내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회사만이 계속 매출을 올리니까요. 목표를 달성하니까요. 그리고 정말 연구하러 보내기도 하는, 그 연구하러 온 일본인들을 개종시켜서 하나님 믿게 하고 주님 섬기게 하는 일들, 지금은 상당히 많은 대부분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저절로 변화되어 있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면 하나님께서 일 하실 것을 주세요. 
오늘 이 제주도에 장로님 한 분이 계시는데 이 장로님은 제주도에 있는 야자수 80%가 이 장로님 것입니다. 이 장로님은 DTS 그러니까 YM 이라고 하는 예수전도단에 DTS 강사 이기기도 하는데 이 분의 재정관이 그거 예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올려드렸더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찾았더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놀랍다고” 이 삶의 원리를 깨달아야 된다고--- 그건 다음 기회에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장로님들 저희 교회에 모시려고 그런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신앙, 우리들의 신앙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경험 속에 묻혀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돈 속에 갇혀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지혜 속에 갇혀있고 우리의 상처 속에 갇혀있고 우리의 현실 속에 갇혀있는 그 하나님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 그런 하나님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치 않기 때문에 우리를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한 사람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다시 한번 깨달으면서 요나처럼 회복이 시간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 요나를 깨우는 음성이 있습니다. 선장이 와서 잠자는 요나를 깨웁니다. 

여러분, 요나를 깨울 때, 이거 참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이방인인 사람이 와서 기독교를 깨웁니다. 요즘 기독교가 뭔지 아십니까? 개독교 입니다 개독교 ---- 
목사가 아니고 먹사 입니다, 요새는 ---- 
이방인들이 와서 이 기독교를 깨울 때 일어나야 됩니다. 교회가 일어날 생각을 안 합니다. 교회가 누굽니까? 여러분 자신 입니다. 그리고 일곱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일곱 가지 질문의 내용이 뭐냐, “네가 누구냐?” 하는 거 ‘네가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정말 하나님 앞에 네 삶을 헌신하고 네가 정말 천국에 인생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냐?” 그 질문 일곱 가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속이지 마십시다. 내 자신도 속이지 마시고 ---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하나님 저 좀 알려주세요. 내 인생 헛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 좀 재미있게 믿게 해주세요.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 믿고 신나게 살게 해 주세요. 언제까지 그냥 왔다 갔다 하면서 분위기만 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그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확실히 세워가면서 때로는 이 삶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 삶도 담대하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주세요. 

오늘도 우리를 일깨우시는 그 하나님의 일깨움 앞에 다시 나가서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다져보면서 포기치 않는 하나님 사랑 감사하고, 하나님 말씀 들은 바로 우리를 귀하게 여기셔서 하나님의 파트너로 삼아 나가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일을 하실 때 하나님 모든 것 예비해 주시고 형통함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믿으면서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한국교회의 신앙이 다시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그런 귀한 기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내가 아노라 
하나님 요나가 안전한 배에 있을 때에는 풍랑이 일었지만 그가 정말 있어야 될 곳, 그 바다에 던져질 때 그 곳에서 새로운 살길이 열려진 것처럼 하나님 우리가 주님 말씀 순종하고 그 말씀 앞에 응답하는 삶을 살게 해 주셔서 이방인들이 지금 기독교와 우리 자신의 삶의 믿음을 일깨우는 이 소리를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깊은 잠에서 깨게 하셔서 이제 믿음의 결단, 살아있는 하나님 그 주님을 믿는 믿음의 헌신들이 우리 삶 속에 살아서 약동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들이 못 알아들으면 인내를 가지시고 계속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셔서 마침내 복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정말 신뢰합니다. 주님을 요청합니다. 우리의 간구들을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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