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야곱과 에브라임 (호 11:12~12:14)

  • 잡초 잡초
  • 747
  • 0

첨부 1


야곱과 에브라임 (호 11:12~12:14)


나폴레옹이 어느 전쟁터에서 전투 중에 겁을 집어 먹고 전선을 이탈한 한 소년 병사에 대한 군법재판을 열게 되었는데, 그는 그런 도망병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해서 대부분의 경우 사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웬일로 그날따라 나폴레옹이 기분이 아주 좋았는지 아니면 그 병사의 어린 나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졌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는 평소와는 전혀 달리 그 소년 병사를 매우 자상하게 대했습니다.
  
어쩌다 전선을 이탈했는지 조용히 물어 본 후에 그 소년 병사가 겁이 나서 그랬다고 솔직히 대답하자 나폴레옹은 그를 관대히 용서해 준 후에 좋은 말로 격려까지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나폴레옹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그 소년 병사는 "예, 제 이름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입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소년 병사의 이름은 성에서부터 이름까지 나폴레옹의 것과 똑같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때까지는 그처럼 자애롭고 부드러운 얼굴로 그 소년 병사를 대하고 있던 나폴레옹의 얼굴빛이 즉시 경직되더니 서서히 달아오르면서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곁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부관들은 나폴레옹이 어떻게 나올까 하고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윽고 나폴레옹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로 그 소년 병사에게 "너, 그 겁쟁이 성격을 지금 당장 바꾸든지 그것을 못하겠으면 아예 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갈아치워라."고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이해해 줄 수 있었던 나폴레옹도 자기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병사가 그처럼 이름값도 못하는 겁쟁이라는 사실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3대 선조 중의 하나였던 야곱도 자기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을 볼 때 그런 나폴레옹과 비슷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야곱의 아들인 '유다' 혹은 야곱의 손자인 '에브라임'의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선조 '야곱' 혹은 그의 새 이름인 '이스라엘'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1장 12절에 보면 "12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궤휼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라고 했으며 12장 2절에서도 "2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 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으로서는 그 얼마나 기가 막히고 창피할 노릇이겠습니까?
원래 '축복'의 대명사와 같은 자기의 이름이 '거짓과 불신'으로 가득 찬 민족의 대명사로, 아니 한술 더 떠서 '하나님의 벌과 보응'을 받게 될 대상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모르기는 하지만, 야곱이 만약 호세아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을 만날 수만 있었더라면 "네 행실을 바꾸든지 아니면 당장 그 이름이라도 바꾸어라."고 야단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자손의 행하는 일들을 그들의 선조인 야곱과 비교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정말 그 축복의 대명사인 '이스라엘'의 이름값도 제대로 못하는, 아니 그 축복의 선조가 보여 주었던 삶과는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고 경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호세아 선지자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 즉 에브라임은 그들의 조상 야곱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랐던 것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그 차이점을 보여 주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저 신앙의 조상들이 누렸던 축복을 똑같이 누릴 수 있는 후손이 되기 위해서 그들에게서 배우고 본받아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간절히 기도드린 후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12장 1절로 6절에 기록하기를 "1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2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 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4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5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6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고 했습니다.

선조 야곱이나 그의 후손 "에브라임" 족속이나 자기 인생이 육신적으로도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방법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족속 즉 북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일을 성취하고자 함에 있어서 오직 인위적인 계책과 수단에만 전적으로 의존했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는"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원래가 그들은 목자 되신 여호와를 따라 꼴을 먹고 물을 마셔야 할 백성이었지만, 이제는 식물을 오히려 말려 태우는 바람, 특히 팔레스타인의 유명한 동풍 즉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열풍을 따라가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스스로 멸망의 길을 찾아가는 자를 가리켜 '동풍을 따라간다.'는 표현을 흔히 쓰고 있는 것입니다(욥 15:2).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그와 같은 행실은 "날마다 거짓과 포악을 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특히 이웃에 대한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서, 그들은 남보다 더 많이 벌고 더 잘 살기 위해 온갖 속임수와 나쁜 짓을 서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버릇은 그들의 정치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으로 보내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에 오직 인위적인 수단에만 의지하여 뇌물 혹은 굴욕적인 화친책으로 난국을 타개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조상인 야곱은 어떠했습니까?
야곱도 초기에는 그처럼 오직 자기의 욕심을 따라 목적을 세우고 자신의 꾀와 술수로써 그것을 성취하려 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을 때부터 보여 주었던 습성이었습니다.
축복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욕심과 그 욕심 성취를 위하여 자신의 경쟁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본성은 아예 출생 때부터 타고났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런 수준에서 평생 머물지 않고 거기서 한 꺼풀 벗고 한 단계 위로 성장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2절에 기록된 대로 그가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던" 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전까지 그는 '사람만을 상대로' 힘을 겨루었습니다.
형이든지 외삼촌이든지 하여튼 자기가 이기기만 하면 자기에게 더 많은 것이 돌아올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경쟁상대의 발꿈치만을 잡고 바로 그 사람을 누르고 올라앉아서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을 때 야곱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제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기도로써 씨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라고, 자기 환도뼈가 부러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늘어지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그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면서 '하나님을 바라는' 자가 되었을 때에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축복의 새 이름을 받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과 '에브라임'의 차이점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신자라 하면서도 여전히 '인위적인 술수'에만 의지하는 '에브라임 자손'들이 있습니다.
어찌하든지 남을 잘 속일수록 내게 남는 것은 더 많고 다른 경쟁상대를 희생시킬수록 내게 돌아오는 몫은 더 커진다는 사고방식에 꽁꽁 묶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기에게 이롭다고만 생각되면 불신자에게도 머리를 숙이고 자기보다 강해 보이는 상대에게는 굴욕의 타협책을 취하는 것 역시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축복의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그처럼 다른 사람의 '발뒤꿈치'만 붙잡고 늘어지는 인생을 벗어나서 '항상 하나님만 바라볼 줄 아는' 고차원의 단계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힘을 겨루는 기도'입니다.
  
사실 명색이 신자라면 다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고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는 하지 않고' 그냥 바라기만 하는 데에 있습니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마 7:8)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구하지는' 않으면서 그저 '얻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그 얼마나 염치없는 자세이겠습니까?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 - 실로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결과인 것입니다.
  
남을 경쟁상대로 삼고 남의 것을 빼앗아서 더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말려 버리는 '동풍'을 따라가는 자멸행위임을 깨닫고,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 하늘 아버지만을 바라봄으로써 이미 예비해 두고 계시는 축복의 문들이 활짝 열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 새 축복을 향한 전환입니다.

7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7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 8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9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기를 명절일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10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에브라임'은 물질적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온갖 거짓과 포악을 서슴지 않았던 자손이었습니다.
'저는 장사꾼인데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람 속여 먹기를 좋아한다.'라고 여기 7절에서 또 한 번 말씀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난 후에 그들 스스로 한 말이 또한 기가 막히는 것이었습니다.
8절을 좀 더 알기 쉽게 번역하자면 '나는 정말 부자가 되었다. 이 모두가 내가 수고하여 얻은 재물이다. 그러니 나를 보고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말할 자가 누가 있겠느냐?'라는 말입니다.
즉 갖가지 사기와 불법을 다 동원해서 한 밑천 크게 벌어들인 후에 그것을 자수성가라고 자화자찬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은 양심에 거리낄 만한 아무 나쁜 일은 하지 않았다고 큰소리를 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돈 문제에 대해서는 죄의식이 가장 약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일에 대해서는 그래도 양심도 작용하고 회개도 할 줄 아는 사람이 일단 돈 버는 일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양심에 화인 맞은 자'처럼 그 심령이 어두워지고 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죄를 안 짓고는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고 아예 미리 단정하고서 그 '거짓 저울과 사취'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야곱' 역시 그런 죄가 전혀 없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야곱이야말로 그런 수법에 있어서 웬만한 사람 뺨칠만한 전문가이기도 했었습니다.
배고픈 형으로부터 그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사 들이기도 했으며 눈먼 아버지 속여 그 축복을 대신 받는 것도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에브라임'과는 달랐던 점은 자신의 그와 같은 죄에 대하여 진심으로 회개하고 변화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본문 4절에 보면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울며"라는 내용은 창세기에서 기록되어 있지 않는 특별한 언급입니다.
이 말은 그날 밤 야곱의 기도가 자기에게 축복해 달라는 간구뿐 아니라 지난날의 지은 죄에 대한 간절한 회개 역시 동반된 것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야곱이 그처럼 사람을 속이고 복 받으려고 했던 죄에 대하여 아무 회개도 없이 그냥 축복해 달라고만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들어 주셨을 리도 만무한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야곱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도 크게 달랐습니다.
둘 다 꽤 한 밑천 잡았지만, 에브라임은 그것을 자기의 노력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고만 여기고 자찬과 교만에만 빠졌던 반면에, 야곱은 거부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여지며 자기의 지난날의 죄를 그처럼 뜨겁게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9절에서 하나님께서 에브라임 족속에게 하신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기를 명절일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는 말씀은, 그들이 지금은 "명절일" 즉 장막절 기간 동안에만 옛날 광야생활을 기억하면서 초막에 기거하지만, 장차 아예 완전히 장막 생활하도록 즉 옛날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아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하던 백성이 된 것처럼 에브라임을 징벌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북조 이스라엘은 결국 나라를 잃고 타국에서 유리하며 방황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이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영적 자기비판을 해 보고 그 잘못을 찾아서 회개하고 고치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그 어떤 돌파구가 열릴 수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시행착오의 쳇바퀴만 돌리다가 끝나든지, 아니면 조금 성공했다고 자만에 빠져서 오히려 완전히 망하게 되는 꼴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 뻔합니다.

우리는 축복을 크게 받은 믿음의 조상들의 공통된 특기가 '회개를 잘하는 것'이었음을 깨닫고 그것을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그처럼 축복의 조상이 된 것은 우리보다 죄를 덜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이 연약했고 실수도 많았고 실족까지 한 적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런 일을 두고 즉시 솔직하게 자복하고 진심으로 회개할 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축복을 받는 전환점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욥이 환난을 통과한 후에 이전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이나, 다윗이 밧세바의 사건 이후에도 끝까지 이스라엘의 최고 임금으로서의 영광을 누렸던 것이 대표적인 예가 아니겠습니까?
조금 자수성가했다고 교만해 하는 것은 그야말로 '패망의 선봉'이 될 수밖에 없음을 늘 기억하고 오히려 더욱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겸손의 회개를 통하여 과거의 시행착오의 굴레를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단계의 축복으로 발돋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서원을 이행하고 감사를 넘치게 드리는 것이 더 큰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본문 11절 이하 14절에 기록하기를 "11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저희는 과연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같도다 12옛적에 야곱이 아람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 13여호와께서는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선지자로 저를 보호하셨거늘 14에브라임이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 주께서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또 한 번 '에브라임'과 '야곱'의 공통점이 일단 제시됩니다.
그것은 양자가 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받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옛날 '야곱'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해 "아람 들" 즉 밧단아람으로 도망쳤었고 거기서 아내를 얻기 위하여 외삼촌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양치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시고 또 나중에는 큰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 주심으로써, 바로 4절 하반절에 있는 대로 "벧엘에서" 그에게 해 주셨던 모든 약속을 다 이루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꼭 마찬가지로 '에브라임' 즉 야곱의 후손들 역시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쳤었고 거기서 먹고 살기 위하여 애굽 왕의 밑에 있었으며 나중에는 노예 생활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에브라임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모세를 통하여 역시 인도해 내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인도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본문 12절과 13절에서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로, 또 "에브라임"으로 바뀌고 있는 이유는 선조 '야곱'이나 후손 '에브라임'이나 이처럼 어려울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은 체험은 똑같은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 뒤는 전혀 달랐습니다.
야곱은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기억하면서 제일 처음에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돌아가서 옛날에 서원했던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즉 에브라임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는 대신 오히려 우상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11절의 "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라는 말씀은 그 대답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에 하는 설의법적인 질문입니다.
즉 그 뒤에 곧 이어서 "저희는 과연 거짓되다"라는 대답이 따라오고 있는 것입니다.
길르앗은 북조 이스라엘 중에서도 가장 기름진 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땅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길갈을 중심으로 우상에게 온갖 제물을 갖다 바쳤으며, 그 제단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마치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처럼 곳곳에 널려 있었던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애굽에서부터 인도함을 받아 길르앗을 위시한 기름진 땅에 살게 되는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기는커녕 이처럼 하나님을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기 때문에 결국 그 "피와 수치"는 그들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과 에브라임은 둘 다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체험했지만 그 이후에 서원을 이행하고 감사를 드리는 일에 가서는 이처럼 극과 극으로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서원했던 것을 잊어 먹고 감사드리는 것을 빠뜨리는 것' - 이것이 오늘날의 '에브라임 자손'들이 처음에 받았던 축복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대표적인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 사회에서도 상대방에게 좋은 일을 해 주었지만 고맙다는 인사조차 못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괜히 도와주었구나.'라는 후회가 들 뿐 아니라 다음번에는 결코 다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그처럼 좋은 일 실컷 해 주고 난 후에 상대방으로부터 감사 인사도 못 받는다든지 혹은 오히려 약속했던 일에 대하여 배신을 당하는 경우에 대하여 통계를 내 본다면 아마도 하나님이 단연 1위가 되실 것입니다.
  
자기의 드린 기도가 분명히 응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일예배 시간에 감사헌금 한 번 드리지 않는 교인들, 새로 시작한 사업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도움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결국 큰 축복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하나님께 약속했던 서원은 까맣게 잊어 먹고 마는 교인들이 이 지상교회 안에 그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그런 꼴로 살고 있으니 그 받았다는 복도 그야말로 '반짝 복'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그 반대로 '자기 축복의 수단'으로 써 먹으려 하는 자에게 어떻게 더 큰 복을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미 베풀어 주신 축복에 대해서 '감사'조차 하지 않으면서 더 달라고만 하는 자, 실로 당신을 '만홀히 여기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내려 주실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저 명성 높은 신앙의 선조들이 축복에 축복을 더 크게 받고 노년으로 갈수록 더 많은 축복을 계속 쌓아 받게 되었던 이유는 바로 이미 받은 축복에 대하여 감사드리면서 그 서원을 지켰던 것에 있음을 깨닫고 이 축복의 비결 역시 꼭 배워 익히고 스스로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벌써 축복의 약속이요 보장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 더 나아가서 '개혁주의 기독신자'라는 명예로운 이름, 거기서도 '경향인'이라는 특별한 명칭은 실로 '야곱의 새 이름'들이며 축복의 대명사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이 '에브라임의 저주'를 받는 실패자로 전락되지 않고 정말 '이스라엘의 축복'을 이어받는 후손이 되는 것은 그저 그 이름만 물려받았다고 절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야곱'이나 '에브라임'이나 똑같이 때로는 고난도 받고 때로는 축복도 받았지만 결국에 가서는 극과 극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시작할 때에 간구하고 어려울 때에 회개하고 잘 될 때에 감사드릴 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그런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생활에서 축복을 받지 못한다면 오히려 '기독신자'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신행일치'를 말끝마다 붙이면서도 정작 그 삶에서는 아무 '경건의 능력'도, '말씀을 생활에서 체험한 열매'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차라리 '개혁자와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명칭을 떼어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정말 '예수쟁이'라는 이름값을 할 수 있는 신자,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명칭에 걸맞은 축복의 삶을 보여 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는 기도'로써 시작하고 난관이나 위기가 닥치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회개'로써 돌파구를 찾고 언약하신 대로 축복을 받게 될 때에는 '서원을 신실하게 이행하고 감사를 풍성하게 바침'으로써 오히려 이전보다 나중을 더욱 창대케 해 주시는 축복까지 반드시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