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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마음을 돌이키게 하심 (왕상 18: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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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돌이키게 하심 (열왕기상 18:30-40)


세계 모든 개혁교회들은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개인의 신앙과 교회를 비추어 어긋남을 바르게 하고 말씀이 원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합니다.   오늘이 제492주년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31일 독일의 수도사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그대학 정문에 부패한 교회를 고발하는 95개 조항 반박문을 붙이고 개혁을 부르짖음으로 시작된 개혁의 불길은 순식간에 전 독일을 휩쓸었고 8주 만에 전 유럽을 향해 번져나갔습니다.   

프랑스의 존 칼빈과 스위스의 울리히 쯔빙글리,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 등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슬로우건을 내걸고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외침,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 움직임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교회 제도나 형식과 전통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앞세우던 죄악에서 돌이켜 신앙의 근본이 되는 십자가 복음,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외침이었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부끄러운 중세 기독교 천년의 역사를 새롭게 하려는 말씀회복 운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자비한 핍박과 고난 속에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던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인정받은 이후 교회는 어느새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인간 권력의 협조와 도움에 길들여진 교회는 더 이상 핍박당하는 약자가 아니고 권력을 행사하는 강자가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들의 정치적 보호와 경제적 후원에 힘입은 교회는 서서히 종교 권력을 키워갔고 그 핵심에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세속 정권과 손잡아 부귀영화를 한 손에 거머쥐는 특권층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교회가 가진 권위는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세워진 영적 권위가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빙자한 인위적 권력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본질은 가리웠으며 교회의 순수성을 잃음과 동시에 교회는 즉시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건물과 장엄한 예배의식이 있으며 거룩한 모습을 한 영적 지도자들이 입술로는 평화와 사랑을 말하였지만 그 속에는 추악한 인간 욕심으로 가득하였습니다.     너희가 회칠한 무덤같다고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예수님의 책망은 중세 교회의 거짓 지도자들을 향한 탄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어떨까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람답지 못하게 살면 하나님은 거룩한 이름이 훼손되는 것을 싫어하시고 그들을 엄히 다스리십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할 구별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어리석은 우상을 섬기면 약속하신 복을 거두시고 대신 기근과 질병과 전쟁으로 벌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두시고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항상 그곳에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면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릴 것이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 하나님을 떠난 성전은 하나님 없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구별하여 불러내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와 약속은 전혀 복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만 섬기고 순종하면 그 길이 복되고 형통할 것이요, 만일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 없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모든 재앙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는 단순명확한 약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틈만 나면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다른 신에게 눈짓하였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이방신들에게 달려가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며 하나님께 드린 기도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 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을 가르쳐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왕상8:35, 36)    이 기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을 근거로 혹시 범죄한 백성들일지라도  깨닫고 돌아올 때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했던 솔로몬 자신이 얼마 못가 이방 나라 공주들을 왕비와 후궁으로 맞이하며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함께 받아드린 실수를 범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어 이방인 아내들이 가져온 우상들을 거기에 모시고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성전을 봉헌하며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던 그 신앙은 어디로 사라지고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르는데 앞장을 선 불행한 왕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의 아들 르호보암 대에 남북으로 분열되는 비극을 맞이하였고 여로보암이 반역하여 세운 북쪽 왕국 이스라엘은 시작부터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북쪽 백성들이 남쪽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제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백성들의 마음이 흔들릴 것을 우려한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 두 곳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너희가 예루살렘까지 내려갈 것 없다  이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건져낸 신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단과 벧엘에 제단을 만들고 자기 마음대로 남쪽 유다의 절기와 비슷한 절기를 만들어 거기서 제사를 드리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이런 우상숭배 전통은 여러 왕조를 지나며 계속되었고 아합 왕이 다스리던 시대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의 극치에 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돈 왕의 딸 여자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한 이스라엘은 최악의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던 최악의 영적 암흑기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에게 교훈을 주시려고 3년간 하늘을 닫으셨고 그 땅에 비를 내리지 않아 가뭄으로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땅에서 얻는 모든 것들이 과연 누구로부터 나오는 것인지 분명히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특단 조치였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을 찾아가 가뭄을 선포한 것이나 3년 만에 다시 찾아가 참 하나님이 누구신가 결판을 내자고 도전장을 낸 것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거짓 신들을 찾아 방황하는 이스라엘의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사랑의 조치였습니다.    

유목민 조상을 둔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농사를 주업으로 삼은 때부터 가나안 지방 사람들이 섬기는 농사신 바알을 수호신으로 받아드리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목민 조상들을 돌봐주고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여행할 때 보호자가 되어주신 광야의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제 가나안에 정착했으니 그 지역의 신 바알을 섬기는 것이 유리하다는 계산에서 나온 현실주의, 실용주의 신앙관입니다.    물론 조상적부터 믿어온 여호와 하나님을 아주 버린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도 신으로 존경하고 섬기지만 가나안에서는 바알과 아세라 신이 더 힘을 가진다고 생각한 다원주의 신학이며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혼합주의 신앙이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천년 동안 쌓여진 중세 교회의 부패에 대한 개혁이라고 한다면, 엘리야의 신앙개혁은 솔로몬 성전시대 이후부터 분열 왕국 아합 왕조까지 이르는 이스라엘의 타락한 종교를 개혁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풍요와 번영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독이든 약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 먹는 현대인들의 가치관도 그들과 다를바 없습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불법도 거절하지 않고 타협하며 성경의 가르침마저 밀쳐내는 기독교인들은 아합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많은 점에서 비슷합니다.     
   
바알을 따르듯 물질숭배에 빠진 현대 교회와 교인들을 향한 엘리야의 외침에 귀를 기울입시다.    어느 때까지 바알과 하나님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하나님과 바알 양쪽에 발을 담고 나의 필요와 편리를 따라 둘 사이를 오고가는 이중신앙에서 오직 하나님 신앙으로 돌아서라!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 것이지 왜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고 있느냐?    참 하나님이 누구인가?    마음을 분명히 정하고 그를 좇으라고 촉구합니다.

물질풍요에 눈이 멀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바알을 따르는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당장 살아남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나무 조각상 신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돈이 보이고 권력이 보이며 땅과 건물은 보이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우선 보이는 것들을 얻기 위하여 그것이 불법이든 투기이든 상관하지 않고 갈데까지 따라갑니다.    냉혹한 생존경쟁의 세상에서 내 것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사람들 역시 바알을 따른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돈이 우상이고 명예와 학교와 학벌이 우상이 되어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여겨질까요?   하나님은 그저 나의 목적하는 바를 얻도록 도와주는 바알과 아세라 신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신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결코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하겠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이름은 그런 식으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복과 평안과 행복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는 신입니다.    그분이 만일 나의 행복과 무관하다면 나와 상관이 없는 신일 뿐입니다.     하나님 중심 신앙이 아니라 나 중심의 신앙입니다.

유대인들의 극단적이고 병적인 민족주의와 선민사상은 창조주 하나님,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한갖 히브리 민족 신 혹은 팔레스틴 지역 신으로 축소시켜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실수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오직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시고 죽어서는 천국까지 보장해주는 수호신으로 평가절하시킨 장본인은 교회 밖의 불신자들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이 끈질기게 매달려 기도하며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절간에 찾아가 불상 앞에 일천배를 하고 절 마당에서 탑돌이를 하는 불도들이나 아침마다 정한수를 떠놓고 자식과 가정의 복을 비는 토속신앙인들이 부르는 신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사업 성공과 건강, 장수를 비는 기도는 기독교인들 아니라도 모든 종교의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마음에 염원하는 바이니 하나님은 오직 그런 것들을 만족시켜주시려고 존재하는 신이실까요?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가리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전쟁과 살육을 서슴치 않고 명령하는 두려운 하나님, 잔인한 하나님으로 비난하면서 땅의 복을 말할 때는 그 구약의 하나님을 찾는 모순을 범합니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신약의 하나님,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희생과 사랑은 편리할 때만 슬쩍 언급하고 풍요와 성공과 번영의 복을 말할 때는 들어가도 복을 주고 나가도 복을 주시는 구약의 하나님을 들먹이며 그 하나님께 기대는 것은 이율배반적 신앙이 아닌가요?     

내 편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내가 우주만물의 중심이 되어 내 욕망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신앙이 바로 기복주의 신앙이고 자기 편리한 신 개념 속에 머무는 비뚤어진 신앙입니다.   개혁되어야 할 대상은 그래서 언제나 나 자신입니다.    나부터 먼저 개혁되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가 나의 책임이며 우리의 책임임을 통감하게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회개하며 고백한 것은  ‘나의 죄와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고백이었지 저 사람들의 죄를 사해달라는 것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았습니다.

갈멜산으로 올라간 엘리야는 백성들을 가까이 오게 하였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였습니다.    바알을 섬기느라 멀리 밀쳐놓아 초라하게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하기 위한 단을 다시 쌓았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졌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자리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회복 여기서부터 신앙개혁이 시작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게 빼앗겼던 마음을 다시 하나님 중심으로 돌리는 것이 개헉의 시작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를 외쳤던 16세기 종교개혁은 엘리야의 신앙개혁운동과 그 정신이 서로 통합니다.    바알이나 아스다롯 등 다른 신들 혹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높이던 우상숭배로부터 오직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섬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Soli Deo Gloria) 입니다.    엘리야는 3년간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 땅에 비를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을 믿고 아합 왕을 만나러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 바른 믿음을 가지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제단이 불로 응답받는 광경을 목격한 백성들은 비로소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엘리야는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고 백성들은 그 자리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에게 가뭄의 재앙이 반복되었지만 그들이 다시 돌아오도록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돌아온 자들에게 하늘을 열어 비를 내리심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것은 '오직 은혜!'(Sola Gratia)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사람이 만든 제사 의식이나 전통에 매였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기억하고 그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앙 개혁의 중심입니다.   

492주년  종교개혁주일 아침에 이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 형태를 다시 점검해봅니다.    개혁은 새롭게 바꾸는 것인데 전혀 없는 새 창조가 아니라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무슨 거창한 선언문을 채택하고 대규모 집회를 열어야만 개혁운동이 아니라 먼저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물으며 삽시다.    Coram Deo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누구나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려고 자신을 꾸미고 진정한 자신을 감추는 가면을 쓰고 삽니다.   그 가면을 벗어버리고 나 홀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는 누구인가요?     

가족들을 떠나 유학생활하는 학생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합니까?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던 히브리 소년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처럼 그 어느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 면전에서 살고 있습니까?    곁에 간섭하는 사람이 없으니 원하는 시간에 자고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고 내 맘대로 생활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든지 내게 주어진 자유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나는 누구인가요?   나는 어떤 사람으로 그 자유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내 앞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거룩한 백성의 삶을 위하여 힘쓰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따라 흘러가도록 방치하고 있습니까?    나에게 주어진 자유는 육체의 욕망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도록 주신 기회임을 잊지 맙시다.

한국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외국에 나와 사는 우리들을 봅시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낯선 지역에서 나는 부끄럼 없이 당당한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긴장이 풀리고 느슨해진 자세로 지내다가 불의와 죄악에 자신을 방임하는 일은 없는지 늘 살피며 살고 있습니까?    개혁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먼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개혁자 루터나 칼빈 등 위대한 일을 시작했던 개혁 신앙의 선배들이 한 점 실수와 부끄럼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먼저 깨닫고 용기를 내어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요란하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실현되는 신앙개혁, 말씀의 본질로 돌아가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변화가 우리 삶과 신앙 가운데 끊임없이 자라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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