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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칭찬받은 스데반 (히 11: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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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받은 스데반 (히 11:36∼40)


히브리서의 저자(著者)는 누구일까요? 히브리서 저자문제는 확실하게 교통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학자들 간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A.D 150년경 초기 사본에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 혹은 ‘거룩하고 항상 존경할 사도 바울이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이 길다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풀네임(full name)보다는 간단히 ‘히브리서’라는 책으로 전해 내려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초대 알렉산드리아 교부였던 클레멘트(Clement of Alex)나, 교부 오리겐(Origenes)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심증(心證)은 확실하지만 결정적인 물증(物證)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아닌 그 어떤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더더군다나 없다.’고 바울 저작에 무게를 둡니다. 그래서 저 역시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견해에 지지를 표합니다.

 ‘믿음’을 다루면서 히브리서의 저자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본문 때문입니다. 본문 중에서 ‘돌로 치는 것’(37절)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끌기 때문입니다.

히11장 전체의 문장구조를 보면, 히11:1-32절까지는 구약시대를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히11:33-38절까지는 신약시대를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33-38절 부분은 실명(實名)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언급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도 언급하는 사람들이 저자와 동시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37절에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한 사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 그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했던 사건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메섹도상 사건일 것입니다(행9:1-19).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난 사건을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죄 없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여도 좋다고 하며 증인(證人)을 선 사건일 것입니다(행7:58). 사람을 죽이되, 돌로 쳐 죽이는 것, 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 방법입니까? 그것도 죄 없는 사람을 말입니다. 만일, 히브리서를 바울이 기록했다면 ‘돌로 치는 것과’ 이 말은 누구를 떠올리며 쓴 것이겠습니까? 스데반입니다.

구체적으로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행6장에 보면,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파가 생겨 서로를 향하여 손가락질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헬라파 사람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행6:1). 

이스라엘은 교통의 요충지(要衝地)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편한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유대인들은 조국을 등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중요한 절기이면 조국을 찾았습니다(행2:8-10). 반대로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고난과 시련, 나라가 망하는 국난(國亂) 속에서도 조국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누가 더 발언권, 힘이 있겠습니까? 단연 히브리파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이 곳간 열쇠를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팔이 안으로 굽는 행동을 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을 우선해서 구제(救濟)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 구제명단에서 빠지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이에 헬라파 유대인들의 불평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문제가 불거지자 사도들은 교회를 섬길 직분자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을 그 기준(基準)으로 제시했습니다(3절).

 저들이 사도들의 말에 동감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위시한 일곱 집사를 직분자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먼저 ‘믿음충만’을 기준으로 떠올렸습니다(5절). 사도들이 제시한 기준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까? 아니면, 기준을 임의(任意)로 정했다는 뜻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이 부분에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란 무엇인가?’하는 가르침입니다.

3절을 보면, 믿음의 사람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칭찬 듣는 사람은 곧 믿음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5절). 즉, 참된 믿음은 칭찬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표현 되어야 합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것으로, 에녹은 자녀를 낳는 것으로, 노아는 방주를 짓는 것으로,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사라는 웃음을 되찾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 믿음이 칭찬 듣는 것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칭찬 듣는 것,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성경은 ‘의인(義人)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롬3:10)고 말합니다.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죄인들의 특성은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칭찬은 커녕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롬3:13).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는데 인색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칭찬받는 공동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행2:44-47). 저들이 어떻게 ‘온 백성에게 칭찬’을 받았습니까? 첫째, 나눔이 있습니다. 둘째, 모임이기에 힘씁니다. 셋째, 가정을 행복하게 이끌어 가는 사람입니다(46절). 넷째, 성결한 사람입니다.

며칠전 광화문 교보빌딩에 걸려있던 걸개의 시귀(詩句)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 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 질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 정석주의 <대추 한 알> - 

한 알의 대추가 잘 영글어서 먹음직스럽게 변하는 것이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행2:44)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어떻게 표현됩니까? 칭찬으로 표현됩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칭찬받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면, 나눔에 앞장섭니다. 모이기를 힘씁니다. 가정을 잘 이끌어 나갑니다. 그리고 성결한 생활을 합니다. 이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요,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도 칭찬받는 자였습니다(행16:2). 백부장 고넬료도 칭찬받는 자였습니다(행10:22). 선지자 아나니아도 칭찬받는 자였습니다(행22:12). 저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칭찬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의 최종적인 모습은 칭찬받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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