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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후에 할 일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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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할 일 (막 10:17~22)
  

한 농부가 집으로 돌아가다가 바위 틈새로 삐쭉 나와 있는 호랑이 꼬리를 발견했습니다. 집으로 줄행랑을 치고 싶었으나 호랑이가 알아채고 나오면 죽을까봐 호랑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바위 뒤로 다가가서 호랑이 꼬리를 있는 힘을 다해 움켜쥐었습니다. 호랑이는 빠져나가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 때부터 바위를 사이에 두고 농부와 호랑이 사이에 필사의 힘 겨루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농부는 갈수록 힘이 빠졌습니다. 꼬리를 놓치면 당장 호랑이가 달려들 게 뻔했습니다.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마침 한 스님이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소리쳤습니다. <스님, 저기 있는 저 낫으로 이 호랑이를 찍어 죽여주십시오 제가 이 꼬리를 붙들고 있는 한 스님에게는 절대로 위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근엄한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말했습니다. <농부여, 불교 계율에는 살아 있는 동물을 죽이지 말라고 했오. 당신이 딱하지만 내 어찌 살생을 할 수 있겠오?> 하고는 자기 길을 갈려고 했습니다. 

희망이 사라져 버린 농부는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 너무 지쳐서 이 꼬리를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호랑이는 우리 둘 중 하나를 잡아먹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호랑이는 바싹 마른 저보다는 뚱뚱한 스님을 잡아먹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부탁합니다. 계율 때문에 호랑이를 죽일 수 없다면 제가 기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잠시만 호랑이 꼬리를 함께 잡아주십시오.> 잠시 생각하던 스님이 말했습니다. 

<그래 호랑이 꼬리를 잡는 것은 계율을 어기는 것은 아니니, 내 잠시 함께 잡아주지.> 스님은 큰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꼬리를 잡았습니다. <꽉 잡으세요> <알았어, 꽉 잡았네!> 스님이 꽉 잡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농부는 잽싸게 손을 뗐습니다. 이젠 스님 혼자 꼬리를 잡게 되니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당황한 스님이 소리쳤습니다. <여보게 손을 놓으면 어떻게 하나? 제발 부탁이니 저 낫으로 호랑이를 죽여주게.> 그 때 농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라고 어찌 살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 잡고 계시다가 살생을 예사로 여기는 망나니가 지나가거든 그때 부탁을 해 보시지요.> 

이 이야기는 동남아 일대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인데, 계율을 지킨다는 것, 율법대로 한다는 것, 그래서 착하고 선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할 때가 많은가를 잘 보여줍니다. 율법을 지켜 선하게 산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이 남을 죽일 때도 있고, 그런가 하면 입장이 바뀌면 딴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착하고 선하게 사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이 신앙의 목표라고 여깁니다. 실제로 19세기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위대한 스승이므로, 그 분이 가르친 대로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선하게 산다>는 것처럼 힘든 일은 없습니다. 선을 행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생각은 우리를 심각한 이중 인격자로 만들어 우리에게 두 가지 문제를 가져옵니다. 

하나는 교만입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고 나면 교만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일은 나니까 하는 것이지, 저 사람은 못해. 난 오늘도 선을 행했어! 내가 생각해도 내가 자랑스러워!>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진 전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선하게 산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두 번째는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선을 행하지 못한 사람은 심한 자책감에 빠집니다. <넌 형편없는 녀석이다. 넌 오늘도 선을 행하는데 실패했다. 그러고도 어떻게 신앙이라고 하겠느냐?> 이런 생각은 우리를 깊은 열등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교만과 열등감은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속에는 서로 반대되는 이 두 가지 감정이 뒤섞여 혼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도 그런 사람 하나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이 사람은 젊은 사람으로서 높은 관원이었습니다. 또 재물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선하게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대화를 주목해 보십시오. 19절과 20절을 읽어봅시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란 그의 대답에서 자신감이 배어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착하게 살아왔습니다. 살인도, 간음도, 도둑질도, 거짓말도 하지 않았고,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어디 내 놔도 자신 있다. 난 흠이 없이 살았어. 나 보다 선하게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을라구> 이런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영혼에 만족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선하게 살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인가? 이렇게 하면 영생을 얻는 것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잘 하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해서 정말 이 세상의 삶이 끝난 이후에 하나님께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 저 무서운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회의를 느꼈습니다. 

그는 이 문제로 깊이 고민하다가 예수님께 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분은 영생을 가르치는 분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 선생님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씀하는 분이라면, 단순히 착하고 선하게 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선하게 사는 법에 관해서라면 굳이 예수 선생님을 찾을 필요가 없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만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에게 물어도 얼마든지 알 수 있어. 그러나 내 영혼의 불안감, 영원한 생명의 문제라면 그들로는 부족해. 뭐가 해결책이 있어야 해. 예수 선생님을 찾아가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보세요. 이 사람에게는 교만과 열등감, 두 가지가 다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율법을 다 지켰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아직도 영생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꼈습니다. 그에게는 교만과 열등감이 혼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주신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21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아멘.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가 해야 할 일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보면 예수님은 그에게 부족한 것이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라고 하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좀 이상하지요? 우리는 이 부분을 잘 보아야 합니다. 부족한 것이 한 가지라고 하시면서 왜 두 가지 명령을 내리신 것일까요? 그것은 두 명령 중에서 예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은 하나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 하나가 무엇일까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일까요? <나를 따르라>는 것일까요?

바로 이 대목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자선사업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누구든 모두 다 칭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선한 일로 영생을 얻는 것이라면 그 다음 명령이 필요할까요? 필요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그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말씀하면 그만일 텐데, 왜 예수님은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덧붙였을까요? 그것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선행을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한 일을 통해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선한 일을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혼란을 겪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착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렇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이지 또 무슨 다른 일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영생의 구원은 선한 일을 통해서 얻는 게 아닙니다. 영생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는 영생을 얻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선하고 착하게 사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양심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착하고 선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그 후에 할 마지막 일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입니다. 

자, 이제 다른 문제를 더 생각해 봅시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이 영생을 얻는 방법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이라면 <영생을 얻고 싶으냐? 그렇다면 나를 믿고 따르라>고 하시면 될텐데, 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하셨을까요? 그 명령은 왜 하신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선한 일도 좀 해야 영생을 얻기 때문이다. 영생의 구원이란 예수님의 은혜에 우리의 선한 일이 더해져서 얻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캐톨릭 교회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 이전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은혜만으로는 영생을 얻는 데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재물에 집착한 나머지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물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영생이 귀중하기는 하지만, 아직 재산을 팔아 주면서까지 영생을 얻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증거가 22절에 나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은 이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을 따른 데 걸림돌이 되는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걸림돌을 먼저 제거하고 그 후에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혹시 재물이, 이 세상의 권력과 명예, 향락이 자신을 구원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것들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는 데 망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천한 인간에 구원을 줄 만한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해답은 분명해졌습니다. 영생의 구원을 얻는 비결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 안에만 참 구원과 영생이 있습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중적인 허위의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여기서 다시 앞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선을 행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우리를 이중적으로 만든다고 했습니다. 선을 행한 사람은 교만하게 됩니다. 선을 행하지 못한 사람은 열등감에 빠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이 두 가지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교만에서 해방됩니다.그는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은혜의 결과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선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은혜로 영생의 구원을 얻은 자신이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저 같은 죄인을 건져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남은 인생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겠습니다. 당신께서 착하게 살라고 하시니 착하게 살겠습니다. 선하게 살라고 하시니 선하게 살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제 삶을 인도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둘째로, 선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도 열등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지 못해 마음이 괴로울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오늘도 당신께서 원하시는 선을 제대로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는 저같이 연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며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저를 더 강하게 만드셔서 주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안에서 저 같이 부족한 사람도 더 아름답게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용기를 얻어 일어서게 됩니다. 결코 열등감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교만도 열등감도 모두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해결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구원자로 분명히 믿으십시오. 예수님만 따르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그것이 물질이든, 명예든, 세상 즐거움이든 다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십시오. 그 은혜 안에서 교만도 버리고, 열등감도 버리십시오. 완전한 자유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유명한 기독교 작가인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죄의 반대는 선이 아니라,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행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은혜만이 우리 신앙과 삶의 해답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92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1517년 마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여 95개 조항을 내걸고 시작한 종교개혁의 모토는 <오직 은혜로, sola gratia>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주님의 은혜 안에서 자유를 얻게 되길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만찬 예식을 거행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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