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교회를 헐지 마십시오! (마 16:21~23)

  • 잡초 잡초
  • 338
  • 0

첨부 1


교회를 헐지 마십시오! (마 16:21~23)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는 한 청년! 어느 날, 그는 그동안 나무를 다듬던 대패를 내려놓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꼼꼼하게 못질 하던 망치를 내려놓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들은 이 젊은이에게서 평안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말 새로운 일을 하려는 듯 제자들을 모았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예루살렘 당국자들도 이 젊은이에게 주목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죽은 세례 요한을 대신이라도 하려는가? 다시 태어난 엘리야라도 되는가? 아니면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인가? 이것이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한 청년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나사렛 예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분이셨습니다. 이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온 세상의 죄를 해결하시는 제사장이시고, 길을 잃고 헤매는 방황(=죽음)을 해결하시는 선지자이시고, 인간을 사로잡고 지배하는 사탄을 해결하신 왕이셨습니다. 이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하는 분은 땅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여 주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이 사람들은 죽음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숨이 끊어지는 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하늘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름 아닌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고백하였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천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도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하여 아직 이 땅에서 하셔야 할 일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로써 이 땅에서 남은 사역을 감당하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때로부터’(:21)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고백되고,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바로 이때로부터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비로소’(:21) 예수님께서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드디어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비로소 나타내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I. 기초

21절 말씀입니다.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때부터,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이때로부터, 그 고백 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바로 이때부터 예수님은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드디어 큰일을 위하여 그 중심지로 나아가시겠다는 것입니까? 

아, 그런데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당시 예루살렘 종교의 중심인물들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우시는 교회와 예수님이 지시는 십자가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 위에 서있습니다.
   
1. 교회의 기초는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친히 자신의 몸을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세상 죄에 값을 치르기 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어느 나라에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잘못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고 엄명하였습니다. 왕은 나라에 정의를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이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끼는 아들이 아버지의 법을 어기는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경우, 왕은 정의를 위하여 왕자의 잘못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왕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용서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신하들의 의견이 반반으로 나뉘었습니다. 정의를 위하여 법대로 벌하여야 한다는 쪽과 사랑을 위하여 무조건 용서하여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은 정의를 위하여 왕자에게 벌하도록 하였습니다. 왕자는 채찍을 받기 위하여 윗옷을 벗겨져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왕의 정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의 사랑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실망하였습니다. 드디어 채찍이 내려칩니다. 그 순간 왕이 달려가 왕자를 껴안았습니다. 채찍은 왕자가 아니라 왕의 등에 내리쳐졌습니다. 그리고 채찍질은 계속되었습니다. 왕의 등에서는 피가 흘렀고 왕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정의는 죄 지은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죄를 지은 인간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와 사랑은 어떤 면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충돌합니다. 아무런 값도 치르지 않고 용서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법을 지키기 위하여 몰인정한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이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값을 치르시는 하나님의 정의이자, 죄를 위하여 대신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값없이 거저 받는 구원의 은혜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말로 할 수 없는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만나는 십자가를 통하여 세워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인 사람들이 모이는 예배당은 십자가를 상징으로 높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떠난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만 말씀하셨습니까?
   
다시, 21절 말씀입니다.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은 죽으셔야 할 것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할 것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핵심적인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대신 값을 치르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으심 그 자체가 최종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의 생애가 끝났다면 사랑과 희생의 삶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구원과 승리의 복음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뿐만 아니라 죽음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죽이는, 죽음의 세력을 결박하는 부활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2. 교회의 기초는 부활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부활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자신도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난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사도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고 웅변합니다. 예수님은 죽음도 이기신 왕이십니다.
   
가톨릭의 십자가와 개신교의 십자가가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가톨릭의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달려 계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내려지고 무덤에 묻히셨으나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셨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빈 십자가를 볼 때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의와 사랑이 만나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습니다(롬 10:9).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떠나서는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죽임 당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종종 오해 되었습니다. 


II. 오해

22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2a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열정이 넘치는 베드로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였습니다. 붙들었다는 것은 마치 자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는 것처럼 강압적으로 붙잡고 강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변하였다는 것은 ‘꾸짖다’는 뜻으로 예수님께 책망조로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없이도 교회가 세워지고, 십자가 없이도 자신이 천국의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 없어도 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서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달지 않는 교파도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또 하나의 우상이 되는 것을 배격하는 것입니다. 결코 십자가 없이도 구원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십자가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예배당에 십자가를 달았던지 안 달았던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십자가가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고전 1:18).

또, 사람들은 어떤 오해를 합니까?
2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22b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고 합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충성심이 멋지다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에게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대신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듯 말하는 베드로입니다. 
   
2.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베드로는 땅의 아버지 요나의 도움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도 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백 점짜리 대답이 아니라 만 점짜리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복되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베드로로 바꿔주셨습니다. 더욱이 그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베드로가 바랄 것이 없습니다. 누가 수석 제자냐고 물을 필요도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당시 지도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면 베드로의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발을 벗고 나서서 말려야 했습니다. 그는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도 몰랐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도 없었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죽임 당한다는 것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모든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듯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힘쓰고 애써서 말리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없어도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예배당 건물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그것을 믿는 사람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우리의 힘으로 도울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그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할 뿐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영원안식 얻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영원안식 얻네
   (찬송가 439장 1절)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에 대한 오해는 단순히 몇 점이 깎고 접고 들어가는 점수가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정말 고맙다. 너야 말로 내 오른팔이다.”고 말씀해 주셔야 했는데, 예수님은 단호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III. 책망

23절 첫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23a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님은 가던 길을 휙 돌아서시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조금 전에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탄이라니! 
   
1. 사탄의 도구가 되는 것을 꾸짖으십니다.
   
베드로라는 한 인간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는, 언제라도 사탄에게 시험당할 수 있는 인간은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엄숙한 경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열정이 가득하여 나름대로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한다는 그 일이 사탄이 틈타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체코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의 중앙에는 얀 후스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그는 15세기 체코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로서 체코 제일의 명문대학 찰스대학교의 초대 총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중세 가톨릭의 불합리한 점들을 들어 교황과 성직자들을 맹비난했습니다. 얀 후스는 체포되어 종교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이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집니다. 1415년의 일입니다. 
   
그 때 장작불이 더디게 타오르자 한 농부가 마른 볏짚을 잔뜩 장작더미 위에 쏟아 부으며 잘 타도록 불을 추슬렀습니다. 이때 얀 후스는 그 농부를 가엾은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한마디를 던집니다. 
   “우매한 성스러움이여…”
   
그 농부는 얀 후스를 화형에 처하는 당시 교회가 신앙의 지키기 위하여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화형을 돕는 일이 성스러운 일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어리석고 우매한 일입니까? ‘우매한 성스러움이며’ 이 말은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어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를 위하여 한다는 일이 어리석게도 사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한국교회는 몸으로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또 무엇이라고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까? 
23절 두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23b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한 말이 예수님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훼방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통해서 교묘하게 덫을 놓았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2. 주님의 걸림돌이 되는 것을 꾸짖으십니다.
   
담 옆에 놓인 돌은 그것을 딛고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예수님께 디딤돌이 될 수도 없고 걸림돌이 될 수가 없지만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이 틈을 타면 스스로 실족하여 넘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도 쉽게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는 영적 디딤돌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교회를 세우는 반석, 주춧돌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지금까지 교회의 디딤돌이 되어왔는데 어느 순간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왜 이토록 베드로를 꾸짖으신 것입니까?
23절 세 번째 구절 말씀입니다.
   :23b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사탄의 도구가 되었다고, 예수님께 걸림돌이 되었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라도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순간 실족하여 넘어지게 됩니다. 
   
3.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을 꾸짖으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안에는 우리가 천사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따라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사탄이 틈을 탄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사람들에 불과 합니다. 우리는 위로가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하고 또 협력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서로 기도하여 주는 것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교회가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위해서 큰소리치며 하는 그 일이 교회를 허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일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 순간마다 겸손하게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광스러운 교회로써 매일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자신을 온전한 교회로 세워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온전하나 교회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여전히 불완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의지하고 서로 격려하며 돌아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들녘 예배당 종탑들이 참으로 예쁘게 보이는 계절입니다. 마음에 심겨진 십자가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를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