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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례] 당연한 이치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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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치 (히 11:13~16)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당할 때마다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인도의 어느 산간에서 수도하고 있는 성자에게 한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어린아이를 끌어 안고 이 성자에게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성자가 보니 이 어린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성자가 부인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살려드리겠으나, 그 대신 저 동네에 내려가서 겨자씨 하나를 구하여 오십시오. 그런데 그 겨자씨는 지금까지 죽음의 고통을 한번도 겪지 않은 집에서 구해 와야만 합니다.” 물론 그 부인은 그런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성자는 다시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죽음의 비애를 겪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고요히 맞이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이란 아무리 길다 하여도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 조명하여 볼 때 안개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생이 영원히 지속될 것같이 살아갑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삶이 어느 날 반드시 중단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삶의 태도는 현저히 달라질 것입니다. 

한 로마의 황제는 인생을 엄숙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얻기 위하여, 그의 신하가 매일 아침 문안을 할 때마다 “폐하시여, 죽음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명하였답니다. 그는 이 신하의 인사를 통하여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의 삶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를 떠나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정체를 알고 있는 성도들은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절망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며, 앞서간 성도들과 만나는 일입니다. 죽음은 부활의 약속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광의 교량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인생을 성찰할 때, 인간은 결국 나그네의 삶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입니다. 

본문은 “이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고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은 한번 결단한 믿음을 죽기까지 계속 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죽기 이전까지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생을 결산하는 가장 엄숙한 순간입니다. 믿음의 생활이 없이 믿음의 죽음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의 열조들은 소망을 영원한 천국에 두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아갔습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보고, 환영하며, 증거하엿음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의미있는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려면 이 세 가지 단어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볼 수 없는 천국을 믿음의 눈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그들의 삶이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환영하였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메시지와 약속의 주님인 그리스도를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하였습니다. 영원한 빛 아래서 발견한 놀라운 삶을 증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나그네 생활은 어떻게 출발할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출발하였다고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멀리 볼 수 있는 커다란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보는데 따라서 그 삶에 큰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볼 줄 알아야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볼 수 없는 나라를 바로 볼줄 알아야 우리가 산다. 미리미리 보아야 한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 같이 모든 고난을 참았다고 했습니다.그리고 이 믿음을 소유하려면 멀리 있는 것을 붙잡아 들이는 커다란 팔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믿음을 위해서는 멀리 있는 것을 소유한 감격을 증거하는 입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그네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까? 본향을 확인하며 삽니다. 

아브라함은 돌아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는 그의 고향에는 넓은 땅과 가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고생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돌아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본향이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딸인 김혜령 성도는 이 땅에서 길지 않은 생을 살았습니다.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인간 편에서 볼 때 남편의 지극한 간호도 외면했고, 부모님의 정성도 다 허사가 된 것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형편이기도 합니다. 못다한 일들이 많고, 너무나 안타까운 젊은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 계십니다.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읍시다. 그래서 본향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주께서 강건하게 하시며, 위로하시며, 함께 하심의 은혜가 넘쳐 나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고 김혜령 성도를 떠나 보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유족들을 돌아보시사 하늘의 위로와 은혜를 덧입혀 주시옵소서. 특히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부활의 소망을 안겨 주신 주님께서 이 자리에 임재하셔서 우리가 고인을 다시 만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위로받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구원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절망 중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신뢰의 마음을 주옵시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 만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옵는 것은 육신의 나약함으로 인하여 고생하는 이들과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 위에 자비로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로우신 뜻에 합당하게 하셔서 육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시어서 거룩한 주의 전에서 주님께 감사드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힘과 생각을 북돋아 주셔서 이전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복종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자비로 더 가까이 가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한 하나님께 세세토록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전케 하시는 주님! 말씀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열매맺는 삶을 살게 하시며, 소망가운데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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