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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받으라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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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으라 (요 20:19~23)
  

영국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킬박사는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해 그것을 분리시킬 수 있는 약을 개발합니다. 지킬박사는 저녁이 되면 약을 먹고 하이드로 변합니다. 낮에는 지킬박사라는 고상하고 온유한 성품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저녁이 되면 하이드가 되어 도덕의식에서 벗어나 온갖 악을 저지릅니다. 

아침이 되면 약을 먹고 다시 지킬박사로 돌아옵니다. 이런 일이 거듭되는 사이에 지킬박사는 약을 먹어도 하이드의 모습을 늘 지니게 되어 결국 자살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게 됩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작품은 인간 내면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다룬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선과 악, 그리고 밝음과 어두움의 이중성이 있고 그 속에서 갈등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인간의 이중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신분의 변화는 이루어졌지만 악의 문제로부터, 죄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이중성을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크리스챤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고,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 할 수가 없고, 의인의 영역과 죄인의 영역이 서로 충돌하며 갈등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내면속에 있는 선과 악의 갈등으로 인해 심각하게 고민했음을 고백했습니다. 로마서7장 21-24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사도 바울 조차도 자신의 내면에 있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의 싸움과 갈등으로 인해 괴로웠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이중성의 문제는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요한복음1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이름입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은 ‘작은 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몬이라는 이름 안에는 그의 약함과 변덕스러움, 어둡고, 죄로 얼룩진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붙여주신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변화된 모습을 담은 이름입니다. 담대함과 용기, 그리고 선하고 의로운 모습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시몬이라는 이름과 베드로라는 이름을 함께 사용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이 대표적으로 사용된 곳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혔을 때 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어부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부끄러워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을 물으십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실 때 사용하신 호칭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세 번을 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베드로야 네가 나를 믿고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반열에 서 있지만 동시에 너는 아직도 옛 사람의 성품인 시몬의 속성이 네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만이 네가 나에게 진정한 사랑을 고백할 수가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스스로가 자신에게 시몬의 속성이 있음을 마지막까지 고백했습니다. 베드로후서1장 1절을 한번 찾아 읽어봅시다. 382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박해를 받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을 소개할 때 ‘시몬 베드로’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시몬 베드로’라고 소개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가지고 복음 사역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아직도 죄인의 속성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은 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두 개 나옵니다. 19절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말합니다. ‘기뻐하다’는 말은 ‘두려워하다’의 반대되는 감정의 표현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감정의 변화의 원인은 문 밖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 밖의 상황은 변화가 없습니다. 변화는 문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음이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 버리고 부활의 소망 안에서 평강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하게 된 이유는 환경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환경을 극복하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문 안에서 일어난 변화는 문 밖의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내 마음의 변화는 내 삶의 상황과 환경을 바꾸는 힘의 시작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 변화가 일어나 우리의 환경과 상황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로 얼룩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나를 세상에 보낸 것처럼 나도 너희들을 세상의 고통과 죽음의 근심 가운데 떨고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복음의 사역자로 파송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덧입을 때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들이 세상을 향해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불안의 유전자를 제거하고 담대함과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프리카 케냐의 사파리에 지프차를 타고 나가면 지프차가 가는 곳마다 모든 동물들은 놀라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지프차가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 동물이 있습니다. 어느 동물인지 아십니까? 사자입니다. 사자는 지프차가 가까이 오거나, 옆으로 지나가도 도망가지를 않습니다. 앉아서 지켜봅니다. 사자가 지프차를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지프차가 사자를 비켜 갑니다. 

사자가 지프차를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자에게는 두려움의 유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들판에서 사자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움직이면 모든 동물들이 자신을 피해 다 도망을 갑니다. 사자는 자신이 겁을 낼만한 상대를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사자에게는 두려움의 유전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환경과 변화에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적인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자녀에 대한 불안감, 나의 미래에 대한 근심 등이 우리를 하루도 편하게 놔두지 않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며 불안해합니다. 들판에 지프차가 지나가면 놀라 소리를 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물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 약함과 두려움을 가지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사자처럼 지프차 조차도 비켜갈 수 밖에 없는 담대함과 용기 있는 마음과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사단이 무서워 벌벌 떠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사단이 뿌려 놓은 불안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바로 사단과 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옷을 파는 상가에 가면 상가 마다 마네킹들이 있습니다.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온갖 모양을 다 내고 있습니다. 외형은 아름답고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만 그 마네킹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생기, 즉 성령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볼 때 마네킹과 같은 모습입니다. 마네킹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양은 그럴듯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양은 있으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담대함과 능력은 없습니다. 

두려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불안해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영적인 마네킹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들에게서는 믿음의 모양은 있지만 믿음의 기쁨과 평안, 그리고 능력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환경을 뛰어 넘지를 못합니다. 죄와 어두움의 지배를 받아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강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세상으로 평강의 사도로 파송하면서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고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해 내쉰 숨은 예수님의 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성령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과 동행하지 않는 삶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입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의 생애를 보면 왕으로 세워진 초기의 삶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삶을 살았습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린 다윗과 경쟁의식을 가졌습니다. 사울 왕이 두려움과 불안에 싸여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두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6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상 16장 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 때 성령께서 그를 떠났습니다. 성령이 떠한 후에 그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죄와 어두움에 의해 지배 받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떠는 제자들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의 생애는 시작부터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어린 나이에 블레셋 군대의 골리앗 장군과 싸우러 나가면서 ‘너는 칼과 창으로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 고 외치며 물매 돌로 골리앗 장군을 쓰러뜨리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는데 단 한 가지만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믿음의 대장부가 되라는 것입니다.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다윗의 유언은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그의 삶은 기도와 찬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시편이 150편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대부분의 시가 다윗이 지은 것입니다. 그의 삶이 결코 평탄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험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항상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윗은 기쁜 일이 있으면 입을 크게 버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의 기도와 찬양은 성령님께서 그에게 임하시며 동행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다윗의 생애는 선이 악을 지배하고, 평강이 두려움을 지배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두려움과 불안함이 내 마음과 삶을 지배하는 삶입니까? 아니면 기쁨과 평강이 지배하는 삶입니까?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고 죄인인 동시에 의인인 우리의 삶이 의인이 지배하는 영역이 큽니까? 아니면 죄인이 지배하는 영역이 큽니까?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도 ‘성령을 받으라’ 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을 통해 죄인의 영역이 좁아지고 의인의 영역이 날로 넓어지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두려움이 기쁨과 평강으로 변하는 것은 세상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불안해 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은 어느 상황에서도 평안해 하고 소망을 갖습니다. 이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고 세상을 향해 일어서는 모든 성도님들이 성령님을 사모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며 그 분이 주시는 힘으로 넉넉히 승리하며 의인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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