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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롬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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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롬 10:1~4)

 
사람의 성공의 기초가 무엇일까?  사람의 행복의 토대가 무엇일까?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기본적으로 눈을 떠야 할 것은 자기 성품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인생 여정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자신의 좋은 성품을 만드는 일에 눈을 뜨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삶의 행복과 성공의 근거가 되는 올바른 성품을 자기 내면화하는 작업입니다.  나의 옛 자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아름다운 성품을 만들어 가는 작업입니다.
 
어느 때엔가 내가 그렇게 안 먹고 안 입고 모았던 그 소중한 재산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갈 수 있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떠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내면화된 성품은 영원히 내 곁에 남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어떤 재산을 유산으로 남겨주려고 하지 말고 좋은 성품을 남겨주려고 하십시오.  어려서부터 자녀들에게 좋은 성품을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좋은 성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속에서 수많은 연단을 통하여 만들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성품은 다양성을 수용할 줄 아는데서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지 마십시오.  제가 너무 자주 하는 말이지만 틀리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십시오.  그 사람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다를 뿐입니다.  이 방식이 성립되지 않으면 결코 좋은 성품의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다름의 원리를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 좋은 성품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이야기에 경청하고 공감하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이 경청과 공감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아주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경청은 자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공감은 자기 방식이 아니라 상대방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되면 관계가 멀어집니다.  이것이 안되면 주변에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친구가 없습니다.  우리들 주위에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친구가 없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말만 할뿐이지 상대방의 이야기는 도대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한 인간이 모든 문제를 바라보고 접근하는 방식은 그가 구축한 성품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인생 길에서 좋은 성품이 중요합니다.  사실 성품이란 한 개인을 위대하고 존경받게 만들어 주는 숨겨놓은 비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품은 내 가치입니다.  성품이 최고의 밑천이고 자산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너희 안에 이 성품을 만들어라.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열심이 없이 위대한 일을 시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하나님도 열심이 있는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37장 32절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그곳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그들은 다시 시온의 땅에 돌아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복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증언하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하나님께서 열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 11절에서 이렇게 권면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사랑하는 여러분,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순기능적이고 생산적인 중요한 동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열심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열심에는 역기능적이고 파괴적인 기능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역사 속에 있었던 히틀러의 열심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소위 유대인 말살 정책을 추진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열심히 유대인 600만명을 죽이는 비극적인 역사를 낳았습니다.  히틀러의 열심이 초래한 비극이요, 불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을 추구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열심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열심,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열심보다 중요한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먼저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열심의 정체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열심의 정체성을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적 열심이었고, 또 하나는 민족적 열심이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종교적 열심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인 열심을 대표하는 그룹으로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파는 본래 주전 160년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북방 시리아에게 정복당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과정에서 소위 유다 마카비 형제가 일어나 독립운동을 합니다.  그 독립운동에 편성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과 경건을 지키기 위한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한 그룹이 바로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그들의 선배와 경건했던 조상들, 소위 하시딤의 전통을 지켜서 정결을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체의 가증한 것과 더러운 것에서의 구별이나 분리를 추진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들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율법이나 계명을 철저하게 열심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희랍어로 '바리새인'이라는 말을 '파리사이오스'라고 하는데, 본래 이 단어는 아람어의 '페라스'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이 단어의 본래의 뜻은 '구별한다', '분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과거에 바리새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그 당시 바리새인들 가운데서 큰 영향을 끼친 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율법사에게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연스럽게 바리새인의 전통을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아주 대단한 열심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3절과 14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유대교인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유대교를 그냥 보통 믿은 것이 아니라 지나치도록 믿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상의 전통인 율법에 관해서는 열심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열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비슷한 맥락의 말씀이 빌립보서 3장 5절과 6절에 고백되어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바울이 바울 되기 전에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던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했던 것은 열심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기 전에 바울은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식이 들려오는데 하나님을 안 믿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을 안 믿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정과 열심 때문에 그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복음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심이 이런 식으로 작용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열심히 믿지만 그 열심이 틀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 주위에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같이 교회에 다닐 때 열심이 특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종교적 열심이 그들로 하여금 이단에 빠져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열심히 믿는 것보다 바르게 믿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바울이 보여주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열심, 그 자체는 칭찬할 만 하지만, 그러나 그 열심은 매우 잘못된 열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옆에 있는 분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열심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내가 가진 모든 열심이 정당하다고 가정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자기 중심적인 열심이 공동체의 선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열심 가운데 또 하나의 측면은 민족적인 열심이었습니다.  민족적인 열심을 대표하는 그룹이 예수님 당시에 있었는데, 그들을 가리켜서 열심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열심당도 원래는 바리새인들의 한 분파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열심히 공부하고 적용하고 지키려고 애를 썼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박해하고 있었던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행동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행동이 없었던 것을 유감으로 여겼던 바리새인들 중에 정치적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바로 열심당원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셀롯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셀롯인'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읽어봐야 기억이 나지요.
 
이들은 본래 벨릭스라는 사람이 유대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그냥 평범한 행동으로는 우리의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아주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열심당원 가운데서도 전위 부대를 가리켜서 '시카리우스'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시카리우스'라는 말은 '단검의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아주 작은 단도 같은 것을 주머니에 숨겨 가지고 다니다가 길에서 자기 동족이지만 로마에 빌붙어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옆에서 그 칼로 찌르고 사라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의식 구조나 행태는 요즘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의식이나 행동과 유사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보면 그들은 온 몸에 폭탄을 장착하고서 대 도시의 한 복판에서 자살테러를 감행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순교가 그들의 알라 신에게 충성하는 것이고, 그 충성이 그가 죽는 순간에 곧 바로 천당에 가게 되는 보증수표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나안인 시몬도 바로 열심당원 출신이었습니다.  왜 열심당원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까?  아마도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이라고 하는 이상을 추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과 방법은 이런 열심당원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 윤리는 목적은 결코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당한 목적을 세웠으면 수단과 방법도 정당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수단이나 방법을 다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윤리는 소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가 있다는 이슬람의 윤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비성경적인 애국적인 광신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심은 매우 잘못된 방법으로 포장될 수 있고, 오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만으로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심 이상으로 필요했던 것, 정말로 참된 지식은 어떤 지식일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인 로마서 10장에서 특별히 두 가지 지식을 강조합니다.  이 두 가지 지식은 지금도 소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종교인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하고도 필요한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열심 이상으로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두 가지의 바른 지식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구원의 바른 지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바른 지식이 중요하다는 것은 강조를 하고 또 강조를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 열심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고도 구원을 받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 사상 보기 드문 초인적인 극기수행과 용맹정진을 통해서 정각을 얻어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성철 스님을 보십시오.  그는 성불하고자 한때 8년간 드러눕지 않고 정자세로 앉아서 초인적인 극기수행을 했습니다.  10년간 사람의 근접을 막기 위해 암자 주위에 철망을 쳐놓고 홀로 용맹정진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불자들은 그를 가리켜서 '우리 곁에 왔던 부처'라고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죽을 때에 남겼던 열반송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
 
자기의 노력으로 도에 이르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 결과 '세상을 속인 죄가 너무 커서 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고 말했던 성철 스님의 절규는 구원의 바른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열심히 하고도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고 있었던 구원이 바른 지식에 근거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은 있었으나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그런 삶의 모습을 본문 3절과 4절에서 계속해서 지적합니다.  본문 3절과 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의는 모르고,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의 의를 세우려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무엇이 정의다, 무엇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의는 매우 주관적이고 상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의를 추구하고 살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상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는 복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믿는 자의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만약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의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예수님은 결코 십자가를 지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사람의 최선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행동을 해도 그것으로 의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시고 죄 값을 치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내가 생각하는 내 선행이 내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종교 여론조사에 보면,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교회 안에 출석하는 사람들조차도 자기의 선행이 자기를 구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확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 출석을 해도 구원의 기쁨이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니까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저는 그와 같은 분들에게 들려드릴 단 하나의 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여러분의 의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의 구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의 희망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의 인생에 길이요 진리가 되십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만 나의 최선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구원자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드는 그 순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로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삶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인 열심을 가졌으면서도 이런 구원의 바른 지식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져야 할 바른 지식으로써 또 하나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두 번째로, 전도의 바른 지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대교인들은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유대교는 전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신앙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면 교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전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절대로 전도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구약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관심이 많으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웃지만 종종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런 비슷한 사고를 가지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확신과 나름대로의 교리 때문에 전도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구원받을 사람들을 미리 태초에 작정하고 선택했기 때문에 전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이중 작정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작정하셨다면 버림받을 사람들도 미리 작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과거 청교도들이 미국의 신대륙에 건너갔습니다.  그들 1세대들은 믿음이 신실했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믿음이 없는 세대였습니다.  오히려 젊은이들은 길거리를 방황하며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때 미국에서는 거대한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침례교라든가 다른 교단들은 모두가 영적 대 부흥운동에 동참을 하는데, 유독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교단만은 선택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해서 부흥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와 버림받을 자를 태초에 선택하셨는데 부흥운동은 교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 극단적인 종교적 교리주의자들이 오히려 전도를 방해하고 구원의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의 후반부를 통해서 성경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원에도 얼마나 관심을 가지신 분이신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선택받은 백성들의 중요한 책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0장 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셨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님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주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선택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칼빈은 프랑스 신앙고백에서 말하기를 선택의 교리는 사변을 위한 교리가 아니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그 이유를 가르치는 교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할 뿐임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면 나는 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들은 이 선택을 소명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것은 나만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된 것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주가 되시는 그분을 증거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10장 1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분이 모든 사람들의 주가 되신다는 소식을 듣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들려주어야 합니다.  들려주어야 들을 수가 있습니다.  들어야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또 하나의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10장 17절의 말씀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1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믿음의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이 복음을 들려주기 위해서 복음을 들고 이웃들에게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선교적인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이제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직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과 구주가 되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마지막 21절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이방인들을 향해서 손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얼마나 아름다운 발걸음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열심이 다 선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의 바른 지식을 깨닫고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이웃들을 가슴에 품고 그들에게 복음으로 찾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가을에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아름다운 복음 전도의 사역을 위해서 아름다운 발을 갖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아름다운 발을 갖기 위해서 발 맛사지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발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뛰어 다니는 발입니다.  저는 그런 아름다운 복음 전도의 발을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열심 가운데 가장 존귀하고 기치 있는 열심은 영혼을 구원하는 열심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열심을 다른 일에 낭비하지 마십시오.  전도하는 일에 한 번 드려보십시오.  그러면 이 가을이 너무나도 소중한 가을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조지 포먼이라고 하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70년대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와 함께 세계의 권투계를 3분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지 포먼은 흑인 빈민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학교 공부를 싫어했고, 자라면서 휴스턴 뒷골목의 불량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었던 주먹이 가공할 만한 파괴력이 있음을 발견한 어떤 권투 코치에 의해서 그는 권투선수가 됩니다.
 
드디어 1973년에 그는 당대의 무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조 프레이저를 꺾고 헤비급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 1974년에 그는 무하마드 알리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그리고 깊은 좌절에 빠져서 그는 권투계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가 이제 모든 일에 좌절하고 실의에 빠졌을 때 누군가가 찾아와서 조지 포먼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려줍니다.  그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됩니다.  그는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성경을 공부하다가 만족할 수 없어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됩니다.

그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마약과 범죄로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흑인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청소년을 전도하기 위한 교회를 개척합니다.  교회 한 구석에 체육관을 만들어서 운동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훈련을 시킵니다.  그의 꿈은 자라나기 시작했고, 더 많은 흑인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달하고 주님의 제자로서 잘 키워가기 위해서 청소년 커뮤니티센타를 짓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그의 청소년 회관은 건축하는 과정에서 재정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는 권투선수로는 회갑의 나이로 불리우는 38세에 회관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사각의 링에 서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나이 45세라는 나이로 WBA와 IBF 통합 헤비급 챔피언이 되는 신화적인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그가 마지막 경기에 나섰을 때, 그를 잘 아는 스포츠 기자가 이런 기사를 남겼습니다.
"아마 복싱 사상 돈을 위해서도 아니고, 명예를 위해서도 아닌 전혀 다른 동기로 이런 챔피언 전에 나섰던 유일한 경우가 아마도 조지 포먼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마지막 챔피언전을 치르면서 그의 마음속에 복음으로 그가 양육하는 수많은 청소년 제자들의 얼굴들을 떠올리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경기를 진행했다고 간증합니다.

조지 포먼의 딸 나탈리는 그의 아버지의 생애를 증언하면서 그녀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달라진 삶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날 이후 내 아버지에게는 더 이상 권투도 관심이 아니고, 돈도 관심이 아니고, 명예도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내 아버지의 유일한 열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분을 믿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삶을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오직 한 가지만이 그의 영혼을 붙들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가질 수 있는 모든 열심, 그리고 가장 생산적인 열심이 있다면 복음의 바른 지식을 갖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우리들이 우리들의 주변에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웃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삶의 공간을 그분 앞에 드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열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분의 열심은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의 열심과 열정은 도대체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이 가을에 여러분이 가진 인생의 열정과 열심을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드려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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