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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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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마 6:9~13)


오늘 본문의 내용이 주기도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압니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문의 중요성은 이미 초대교회시절부터 강조되어왔습니다. 사도들은 신자들에게 하루에 세 번씩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것을 권했다고 전해집니다. 고대교회 최대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자들이 하루도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일 없이 그냥 지나가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신자들은 매일 주기도문과 함께 일어나야 하고 주기도문과 함께 침대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라는 말은 “주님께서 자신이 기도하실 때 사용하신 기도문”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 속에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청원이 있는데 예수님 자신은 용서를 빌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께는 죄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예수님을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라고 말하며 “모든 일에 우리와 꼭 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고후5:21)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주님 자신이 사용하신 기도가 아니라 제자들이 하도록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에게 새삼 기도를 가르쳐 주셨겠습니까? 그들이 기도할 줄을 몰라서였겠습니까? 유대인들은 기도의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최소한 아침, 낮, 저녁 세 차례는 반드시 기도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여러 가지 종류의 전통적인 기도문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에게 새 기도가 필요했겠습니까? 

그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에 대한 이해와 관습이 잘못되어 있었고 그 밑에 깔린 하나님과 신앙의 이해가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마6:5-8절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잘못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것”이었고, “중언부언하는 것”이었으며 “말을 많이 하여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기본원칙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것이고,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기도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은 겉모양만 보시고 속마음을 알지 못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으시며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의 그릇된 신앙이해와 잘못된 기도관습에 맞서 참된 하나님이해와 신앙의 주된 표현인 기도의 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기도문 속에는 하나님과 신앙에 관한 아주 중요한 진리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교부들 가운데에는 주기도문을 가리켜 “모든 복음의 요약”이라고 부른 사람도 있고, “천국 교리의 체계”라고 부른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형용사가 반드시 명사 앞에 오는 우리말 문법 때문에 우리말로 번역된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헬라어 원문에서의 첫 단어는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는 구약성경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창조주이심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32:6에 보면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합니다. 또 예언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64:8) 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주로, 우리를 그의 피조물로 아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출발이고 기도의 전제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구약성경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언약관계를 맺으시고 구원하시는 이이심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신명기에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신14:1-2) 씌어있습니다. 이사야 또한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63:16) 합니다. 하나님을 단지 창조주로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에로 선택하여주신 은혜의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 바른 하나님지식이며 사실상 우리에게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구약성경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강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03편의 기자는 노래하기를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103:13) 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 또한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렘31:20)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충만하신 우리의 아버지로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진정 우리에게서 기도가 나오게 하는 힘입니다.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에서는 구약성경에서 보다도 훨씬 더 자주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는 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아버지로 본 것이지 감히 각 개인이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아버지 되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말의 “아빠”에 해당하는 말로 하나님을 우리 각자의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이시니 아버지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뻘 되시는 분이라거나 사위가 장인을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극진한 사랑과 절대적 신뢰로 묶여진 친부자간의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혈육적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친구관계, 동창관계, 회사동료관계, 심지어는 부부관계도 헤어지면 남남이지만 부자간의 관계는 취소도 변경도 할 수 없는 영원한 것임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는 사실은 첫째로,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과 그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썼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이렇듯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다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고 불변하는 것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의 죄와 이 세상의 악과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5)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셋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속한 모든 것을 누릴 권세를 이미 얻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4:6-7) 

넷째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염려를 책임지시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있는 자녀들은 스스로 삶의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 후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하셨습니다. 

다섯째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친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멀리 계신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 대하기 어려운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의 삶을 책임지듯이 주인도 종의 삶을 책임집니다. 기업주도 종업원의 삶을 책임집니다. 사령관도 병사의 삶을 책임집니다. 그러나 종이나 종업원이나 병사들에게 주인이나 기업주나 사령관은 언제나 거리가 있고 무섭거나 대하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자녀에게 아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친근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뜻합니다. 

여섯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실 준비가 되어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피곤할 때에는 누가 와서 할 얘기가 있다면 다음에 보자고 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자녀가 “아빠!” 하고 부르면 “오, 왜 그래?” 하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버지이듯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일곱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할 수 있게 된 우리들은 그처럼 오직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이 세상 구원사역에 동참해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나라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특권을 받은 사람은 또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소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치신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관습을 바로잡아주시기 위한 것이었고, 그 밑에 깔린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고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신앙의 개혁을 위해 기도부터 개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기도 많이 한다는 것을 다른 나라의 신자들과의 차이점으로 들먹거리곤 합니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비약적 성장을 이룬 비결이 다름 아니라 새벽기도라고 서슴지 않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갈수록 경쟁적으로 더 많이 하는 한국교회가 왜 성장을 멈추었을 뿐 아니라 감소추세로 돌아섰느냐는 물음에는 뭐라고 답해야 하겠습니까? 기도를 많이 했는지는 모르나 바로 하지 않았고 열심히 했는지는 몰라도 진심으로 하지 않았다는 반성이 그 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진심으로 하는 기도는 헌신의 결단이 함께 따라가는 기도입니다. 우리 교회가 새 성전건축을 위한 기도회를 갖고 있습니다.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도만 하고 헌신의 결단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된 기도이고 거짓된 기도일 것입니다. 겉모양을 보지 않으시고 속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을 모르거나 잊고 있다면 바리새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가 새 성전을 원한다면 우리의 하나님 이해와 기도부터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른 기도를 드리는 일로부터 우리의 신앙을 개혁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종교개혁기념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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