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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왕상 1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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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왕상 19:1~18)


권투 시합을 보면 링사이드에 '세컨드(second)'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라운드 도중에 선수에게 코치도 하고 응원도 하지만, 라운드 중간의 휴식 시간이 되면 선수를 코너에 앉혀 놓고 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면서 물로 입안을 헹구게 하거나 얼굴의 상처가 있으면 응급처치를 해 주는 등, 선수로 하여금 다음 라운드에 더 힘을 내어 싸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다가 만약 자기 선수가 다운이 되면 빨리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싸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화나 영화에서는 그런 경우에 세컨드 대신에 그 선수의 여친이 지금 상대 선수에게 얻어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쓰러져 있는 자기 남친에게 눈물 섞인 독려나 애틋한 격려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조금 전까지 녹아웃(knockout) 직전에 있던 그 선수가 갑자기 기사회생하여 극적인 역전 KO승을 거두는 스토리로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처럼 엘리야 선지자를 독려하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이세벨 왕비가 주동이 된 북조 이스라엘의 바알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홀로 고군분투하던 엘리야 선지자는 그 싸움에 너무 지친 나머지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엘리야 선지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기운을 북돋우어 주시고 또한 따끔하게 독려하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서 그 싸움의 새로운 라운드에 나갈 수 있게 만들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제492주년이 되는 기념주일입니다.
로마 카톨릭이라는 거대하고도 강력하기 짝이 없는 원수를 대항하여 소수의 종교개혁자들이 용감한 영적 전투를 시작했을 뿐 아니라 그 서전에서 상대방을 일격에 쓰러뜨리는 혁혁한 전과를 거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거의 5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전세가 완전히 뒤바뀐 듯한 느낌입니다.
그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라는 개신교의 교회와 목사들 중에 적지 않은 숫자가 그 싸움을 계속하기는커녕 그냥 수건을 던지면서 천주교에 항복하려는 저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대의 영적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싸움은 정말로 이미 끝난 것이겠습니까?
오늘날 개신교와 천주교가 '화합'하려는 소위 '축제 분위기'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이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지키면서 개신교와 천주교가 애당초 어떻게 '분리'되었는지를 상기하고 그 '전투 의식'을 고취시키려 하는 개혁주의 교회와 성도들은 과연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주어진 말씀을 통하여 왜 이 싸움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며 또한 결코 포기해서도 안 될 싸움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개혁주의 교회의 영전(靈戰)은 아직 건재한 원수가 끝까지 발악하고 있는 한 여전히 끝나지 않은 싸움입니다.

본문 1절부터 8절의 말씀에 "1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2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4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앞의 18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의 생애 중에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한 대 사건, 바로 '갈멜산의 제단'이 나옵니다.
거기서 엘리야가 거둔 승리는 그야말로 혁혁한 것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대항하여 혈혈단신으로 싸운 전투였지만 그 갈멜산의 제단에서 오직 엘리야 선지자만 '하늘로서 내려오는 불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또한 엘리야 선지자는 그 호기를 놓치지 않고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 선지자들을 하나도 도망치지 못하게 잡도록 하고서는 기손 시냇가에서 단체로 즉결처단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분위기만 본다면 그 누구의 눈에도 이제 싸움은 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악한 이세벨 왕비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아합 왕으로부터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던 우상선지자들이 다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오히려 엘리야에게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고 자기가 믿는 우상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면서 살해 위협을 보내왔습니다.
  
마치 한 방 크게 얻어맞고 쓰러졌던 상대방이 그대로 KO되는 대신에 오히려 더 독기를 품고 다시 일어나서 덤벼드는 형국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 선지자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갈멜산의 대결을 통하여 우상선지자들을 일망타진했으니 이제 승부는 결정 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상대방은 백기를 들기는커녕 더욱 악에 받쳐서 자기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고 카운터펀치를 날리면서 덤벼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형편을 보고" 즉 이세벨로부터 그런 뜻밖의 반격을 당하여 당황하게 된 엘리야는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을 코너에 몰아넣고 승리를 거두기 일보직전인 것 같이 보였던 것이 엊그제였는데 한 순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결국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약 5:17)이었으니 그 얼마나 낙심되었겠습니까?
그런 그의 심정은 그가 자기의 사환을 브엘세바에 남겨두고 혼자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엘리야 선지자가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무슨 '자살 충동의 발로'나 '자기 생명에 대한 저주' 같은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기로서는 이세벨과 우상숭배자들을 대항하여 최선을 다하여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허탈감과 낙심이 하나님께 그런 기도를 드리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그런 심정은 곧 이어지는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즉 자기가 가진 능력의 한도는 여기까지밖에 되지 못하니 이제 더 이상 싸울 기력도 없다는 '탄원의 기도'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그로기(groggy)' 상태에 빠진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선 천사를 보내시어 그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마치 피곤에 지친 선수의 어깨나 다리를 세컨드나 코치가 주물러 주듯이, 지금 로뎀나무 아래에서 잠에 곯아떨어진 엘리야 선지자의 육신의 피로를 그렇게 회복시켜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먹고 마시게 하심으로써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는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나 먹고 마시고" 난 후에 이번에는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혹자는 엘리야 선지자가 광야로 들어갈 때부터 '호렙 산'에 가서 하나님을 만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석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엘리야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지 않으셨다면 엘리야 선지자가 자기 힘으로 호렙 산까지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니 애당초 그럴 의도도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그저 좌절감 속에서 '광야로 하룻길쯤' 들어간 후에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났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는 여기서 주저앉아 버려서는 안 된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라고 그를 다그치셨던 것이었습니다.
  
즉 엘리야 선지자는 결코 거기서 싸움을 포기해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북조 이스라엘에는 여전히 이세벨 왕비가 건재해 있었고 그녀를 중심으로 한 우상 세력을 완전히 무찌르기까지 그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소위 '종교 간의 갈등 해소'라는 말을 참 자주 듣게 됩니다.
천주교 교황이야 예전부터 입에 달고 다닌 말이지만 요즘은 웬만큼 유명하다는 각 종교의 지도자들뿐 아니라 기독교 교단의 총회장들이나 대형교회의 목사들의 입에서도 거의 '약방의 감초'처럼 나오는 말인 것입니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정말 웃기는 소리입니다.
종교 간에는 원래 '갈등'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서로 다른 신을 믿고 있고, 서로 다른 구원관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른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이에 어떻게 갈등이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종교 간의 갈등 해소'라는 것을 자신의 목회 철학의 하나라고 내세우는 목사는 이미 '하나님만이 참된 유일신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믿지 않고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종교들 사이에 '갈등' 정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고 인간을 타락시켰을 때부터 바로 이 적대관계가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영영히 원수가 되리라고 그 '영적 적대관계'를 분명히 천명하셨습니다.
  
그 적대관계는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마 13:39),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등 사복음서 곳곳에서 명백히 선포하고 계시는 사실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천명하시고 예수님께서도 확인하신 영적 적대관계를 도대체 목사가 그 얼마나 '스스로 선하고 의롭기에' 자기가 나서서 '해소'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적어도 이 영적 적대관계에 있어서는 종교개혁 시절이나 지금이나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한 펀치 맞고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결코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았습니다.
트렌트 공회(1545-1563년)를 중심으로 한 소위 '반종교개혁'(反宗敎改革) 운동은 겉으로는 자체적인 개혁운동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개신교에 대항하기 위하여 천주교의 전열을 재정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비록 천주교가 지금 겉으로는 '나누어진 형제' 운운하면서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지만 실제로는 '양의 탈을 쓴 이리'의 그 본성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개신교를 향하여 '용서, 이해, 화합'의 미명을 내세우면서 자기네들이 주도하는 종교통합운동에 참여하라고 종용하는 천주교이지만, 그들이 마틴 루터에게 내렸던 파문을 철회했습니까?
천주교가 진정으로 개신교와 화합하기를 원한다면 그 개신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마틴 루터에 대해서도 뭔가 최소한의 달라진 입장을 표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천주교가 '누구든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우리 개혁주의 교회의 핵심적인 신앙고백을 두고 '공식적인 저주'를 내렸던 트렌트 공회의 결정을 번복한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제2차 바티칸 공회(1962-1965년)는 그 트렌트 공회의 신학적 입장을 재천명함으로써 여전히 우리 개혁주의 교회들을 공식적으로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개혁주의 교회는 이런 영적 전시 상황을 똑바로 파악하고 이 이단의 괴수에 대한 긴장의 끈을 조금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이" 보였던 "짐승"이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면서"(계 13:3) 오히려 교회와 성도를 향하여 내면적으로는 더욱 극렬한 공세를 퍼붓고 있기 때문입니다.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을 완전히 도말하려고 최후의 대공세를 펼치고 있는 이때에 결코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있지 말고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힘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분연히 일어서서 영적 전투의지를 굳게 다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개혁주의 교회의 영전(靈戰)은 소수이기는 하지만 아군 또한 남아 있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필요가 없는 싸움입니다.

9절 이하 18절에 기록하기를 "9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1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5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16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 선지자는 거기서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하나님께 솔직히 하소연하게 되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말씀은 '너 왜 이세벨과 싸우지 않고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는 말씀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추궁에 대하여 엘리야 선지자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힘을 다하여 섬겼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엘리야 선지자는 자기로서는 그처럼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 보았지만 상황은 여전히 호전되지 않고 있다고 탄원했습니다.
  
갈멜산 전투 이후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이스라엘 자손"은 "주의 언약"과 "주의 단"과 "주의 선지자"들에 대하여 적대행위를 계속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이제 혼자 남은 자기마저도 이세벨의 추격 앞에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 하나님 앞에서 두 번이나 똑같은 말로써 한탄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좀 특이한 방법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처음에는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 등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는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셨고" 그 대신에 마지막으로 "세미한 소리"로써 그에게 찾아와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도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가 된 이유는, 지금 하나님께서 악한 이세벨의 세력을 완전히 도말하기 위하여 행하실 역사는 어떤 강력한 외적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엘리야 선지자의 심령에 들려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로 하여금 우선 "하사엘에게 이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또한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 "하사엘의 칼"과 "예후의 칼"을 우상숭배로 범죄한 북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똑같이 사용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기름을 부어 세웠던 또 한 사람은 바로 "엘리사" 선지자였는데, 17절에서 하사엘과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고 하신 말씀은 엘리사도 직접 사람을 죽이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사역 역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엘리야 선지자로 하여금 북조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당신의 전면적인 심판을 수행할 왕들과 선지자를 세우도록 명하시면서 아주 놀라운 말씀을 결론적으로 덧붙여 주셨습니다.
  
바로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과 싸우는 사람이 자기뿐인 줄 알고 '하나님, 저는 이제 혼자만 남았습니다.'라고 비명 같은 탄원을 올렸는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엘리야와 똑같은 편에 서서 싸우는 아군이 무려 '칠천 인'이나 더 있다고 밝혀 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 '칠천 인'은 다 한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의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져서 숨어 있던 그 신실한 자들을 하나하나 다 확실하게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내가... 남기리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아무리 원수가 수적으로 많고 그 세력이 압도적으로 보여도 당신의 참된 소수의 성도를 끝까지 보호하시고 보전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너무나도 놀랍고도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악한 이세벨 여왕이 그처럼 살기등등하게 하나님의 단을 헐고 선지자들을 죽이던 시대는 오히려 '절대로 바알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는 칠천 인'이 극명하게 성별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온 백성들이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기회주의자'로 전락해 버린 혼란의 상황이야말로 '철저히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선지자와 성도'가 뚜렷하게 돋보이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도 그처럼 곳곳에 산재해 있는 '칠천 인'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한 가지만 들자면, 피터 왈도라는 평신도로부터 시작되었던 '왈도파'는 로마 카톨릭의 부패한 성직자들과 말씀이 빈곤한 교회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시작된 운동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권위보다는 성경의 권위가 우위에 있다.'고 믿었던 까닭에 평신도라도 직접 성경을 읽으면서 전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죽은 성자'에게 기도하는 것이나 '성모축일, 사도축일' 등을 지키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고 무자비한 죽임을 당하게 되어 그 신도의 수는 점점 감소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일부 후손은 알프스 지역에서 계속 잔존하다가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자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지금까지도 약 2만 명 정도로 구성된 왈도파 교회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위클리프(John Wyclliffe)나 후스(Johannes Huss) 등 소수의 진리파들이 그 거대한 로마 카톨릭 세력에 대항하여 '남은 자' 운동을 연연히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지난 총회에서 우리 교단이 공식적으로 반대투쟁을 결의한 'WCC(세계교회 협의회)'는 "우리는 하나 되기를 원한다."(We intend to stay together.)이라는 모토로 창립된 단체입니다.
  
하지만 이 WCC는 종교다원주의, 인본주의 성경관, 종교 혼합주의를 주장하는 반기독적인 운동일 뿐 아니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까지도 기독교의 이름으로 지지해 왔던 좌파적인 정치단체이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 WCC는 로마 카톨릭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위에서 밝힌 WCC의 말이나 행동이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것과 아주 잘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WCC에는 우리나라의 개신교 중에서도 많은 교단들이 가입해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WCC 제10차 총회 한국개최 반대운동'을 우리가 전개한다는 것은 이미 초전부터 중과부적의 수적 열세의 싸움이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싸움이 '나만 홀로 남았으니'라는 외로운 싸움이 되지는 않을 것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조국의 교회들 안에도 분명히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인'을 남겨 두셨을 것이 틀림없으며, 이 '외적 열세의 싸움'은 오히려 '소수의 진리파'를 규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끝까지 같은 편에 서서 싸울 우군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겠습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그 '소수의 남은 자'를 끝까지 지켜 주시고 끝내 이기게 해 주실 것이니 무슨 염려나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비록 '바람과 지진과 불'의 기적은 동원하지 않으시더라도 '세미한 말씀'을 듣는 성도의 순종과 충성을 통하여 끝내 이세벨을 이기게 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이제 최후의 고비를 맞이하는 이 영적 전투의 현장에 각자 자신의 생명을 먼저 투입함으로써 '칠천 인'의 소수 정예부대의 한 일원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종교개혁으로 시작되었던 개혁주의 교회와 로마 카톨릭의 전쟁은 절대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기네들이 불리해 보일 때에는 '순한 양'처럼 나오지만 일단 세력을 잡으면 '이리'처럼 기독교를 죽이려 달려드는 로마 카톨릭이 여전히 그 적의를 속에 감추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WCC가 아니라 그 어떤 '세계적인 금송아지 운동'이 일어나서 모든 종교를 다 통합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그 혼합종교의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아니할 '칠천 인'은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와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을 불과 유황 못에 던져 버리실' 때까지는 이 영적 전쟁은 중단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끝나지 않은 싸움을 끝났다고 하는 사람은 이미 '항복하고 포로가 된' 패배자이든지 '적과 동침하고 아군에게 등을 돌린' 배신자이든지 둘 중에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아직도 진두지휘하고 계시는 싸움, 전투하는 지상교회가 마땅히 치러야 될 싸움, '그리스도의 군사' 된 성도라면 당연히 복무해야 할 이 영적 전투에 끝까지 '칠천 인' 가운데 서서 함께 싸우며 끝내 승리의 개가를 같이 부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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