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안식 (창 2:1~3)

  • 잡초 잡초
  • 334
  • 0

첨부 1


하나님의 안식 (창 2:1~3)


창세기 2:1-3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안식을 잃어버린 현대인

나폴레옹은 온 유럽을 정복했던 영웅입니다. 나폴레옹이 말년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어떤 기자가 방문해서 그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자가 물었습니다. “황제여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이 질문에 나폴레옹은 지그시 눈을 감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스위스 알프스 산을 넘을 때였지. 잠시 전투가 멈춘 어느 일요일 아침, 산 아래 조그만 교회에서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 왔고, 그 종소리에 이끌려 나는 교회에 들어가 앉아 있었지.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네.”

나폴레옹의 이 고백은 이해가 갑니다. 나폴레옹은 평생에 수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호시탐탐 자기 자리를 노리는 정적들의 위협 속에서 늘 긴장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도 잊고, 자신을 위협하던 긴장과 두려움들도 잊은 채 안식의 시간을 가졌던 것은 나폴레옹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삶에 안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서 편안히 안식했던 기억이 있습니까? 낮에는 일로 바쁘고 집에 돌아와서는 집안일과 아이들 일로 정신이 없습니다. 쉬는 날도 지쳐서 늦도록 잠을 자다 무거운 머리를 들고 일어납니다. 텔레비전 리모콘을 잡고 이리 누르고 저리 누르다가 반나절이 지나고, 아내의 성화에 청소를 하고 친척 집을 방문하고 나면 어느새 밤이 됩니다. 다음날 회사에 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얹히는 것 같고, 처리해야 될 일들이 생각나 부담감을 안고 다시 잠자리에 듭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진정한 안식이 필요합니다.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은 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 2절에 하나님도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느라” 3절에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마치 여섯 날 동안의 일이 힘드셨다는 듯이 하나님도 쉬셨습니다. 하나님도 쉬셨는데 하물며 인간이 쉬지 않고 어떻게 버틸 수 있겠습니까? 

괴테의 파우스트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파우스트가 성경을 읽다가 요한복음 1장 1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파우스트는 ‘말씀’이라는 말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철학, 법학, 의학, 신학에 지쳐서 다른 정말 멋지고 더 아름다운 것을 상상하던 파우스트에게 ‘말씀’이라는 단어는 너무 정적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이 구절을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로 바꾸고 만족해합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고 다른 무엇으로 채워지는 그것이 파우스트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침묵과 안식의 가치를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태초에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태초에는 평화와 침묵이 있었고, 태초에는 안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마치 잠시라도 멈추면 안 될 것처럼 인생의 한 순간의 쉼도 없이 굴러가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그렇습니다. 우리 역사에 도무지 안식이 없습니다. 한 사건이 지나면 다른 사건이 그 뒤를 잇고, 한 일이 끝나면 다른 일이 뒤를 잇고 이렇게 우리 한국 현대사가 흘러왔습니다. 일제시대와 독립운동, 해방과 민족분열, 한국전쟁, 4.19 혁명, 산업화 시대, 유신과 독재 정치, 민주화 운동과 10.26사태, 5.17과 광주 민주 항쟁, 군부독재와 민중운동, 올림픽, 6월 항쟁, 연이은 대통령 선거, IMF와 경제 위기, 최근은 촛불시위 등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70년 80년 넘게 살다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식 설교를 할 때 항상 그 분들을 위대하다고 칭찬을 합니다. 무슨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힘든 시대를 살았고 자녀들을 길렀다는 것 자체로 칭찬과 영광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에도 안식이 필요합니다. 

이 서울이라는 땅에도 안식이 필요합니다. 제가 서울에 올라와서 산 것은 80년대 초반부터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제가 서울에 공사가 멈추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지하철 공사와 상하수도 공사, 고가도로 건설로 항상 도로는 항상 공사중이었습니다. 재개발로 이곳저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섭니다. 채 20년도 안 된 아파트를 리모델링이다 재건축이다 하여 뜯어고칠 생각에 정신이 없습니다. 조그만 골목길도 잦은 보도블록 공사로 편히 걸어 다니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발전하는 서울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발전이 아니라 무언가 일하지 않으면 불안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은 손에서 일을 놓으면 불안한 일중독자들입니다. 마치 자전거가 달리면 넘어지지 않지만 멈추면 넘어지는 것과 같은 불안함입니다. 일벌레에게는 한가하다는 것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입니다. 일이 없으면 마치 금단 현상에 걸린 사람처럼 멍해지고 무력해집니다. 우리에게는 안식이 필요합니다.

일하지 마!

오늘 말씀은 그런 현대인들을 향하여 “일하지 마!”라는 하나님의 휴식 선언입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이 말씀이 좀 파격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모든 만물들을 만드셨습니다. 이제 세상은 완성되었고 지구는 생명체로 가득합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도 받았습니다. 마치 출발선상에 서 있는 육상선수들처럼 모든 준비가 되었고 이제 총성이 울리면 바삐 뛸 자세입니다. 새 차를 구입하고 휘발유도 가득 채웠습니다. 이제 시동을 걸고 마음껏 질주하려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휴식 명령이 떨어집니다. 일하지 말고 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일벌레가 되기 쉬운 인간의 운명을 미리 내다보셨을지 모릅니다. 과로사로 죽는 것은 인간들밖에 없습니다. 새나 동물들은 하루 양식만 있으면 족하고 더 이상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지나칠 정도로 일합니다. 1년치 양식이 없어서 불안하고, 남들이 나보다 앞서 가는 것이 불안하고, 또 욕심으로 더 가지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 것까지 빼앗으려 하니 서로 일 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향하여 휴식과 안식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인간이 탄생한 바로 다음 날 휴식을 명령합니다.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닙니다. 쉬지 않고 일하면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병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쉬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가 병입니다. 바쁘게 살면 앞서갈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쉬지 않고 바쁘게 살면 나중에 병원에서 그만큼 쉬어야 합니다. 우리 인체라는 몸을 하나님은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제가 부목사 시절 섬기던 목사님은 정말 부지런히 사셨습니다. 그분은 쉬는 것을 몰랐고 목회자들의 안식일인 월요일에도 교회에 오셔서 무엇인가 일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평신도들은 주일에 쉬지도 못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데 목회자가 월요일에 쉬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교회를 개척하고 근 30년 동안 목회하시면서 한 번도 안식년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지 아십니까? 칠십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70년 동안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70년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나왔는지 아십니까? 역대하 36장 2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어떤 분들은 이스라엘 역사 490년 동안 7년마다 지켜야 될 안식년을 한번도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이 강제로 70년을 안식하게 하신 것이라 해석합니다. 

여러분 쉬지 않으면 죽습니다. 제일 불행한 분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죽어라 일하다 정말 죽어버리는 분입니다. 우리나라는 좀 일을 줄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노동시간이 전 세계에서 가장 깁니다. OECD 연간 노동 시간이 평균 1777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보다 훨씬 많은 2357시간입니다. 하루 여덟 시간으로 계산해도 72일 곧 두 달 넘게 더 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더 잘 사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두 달 덜 일하는 나라들은 다 선진국들입니다. 항상 일만 한다고 해서 능률이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잘 쉴 때 재충전하여 다시 일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1장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킬 것을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 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출31:17) 제 칠 일에 쉬어 평안하였다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평안하였다는 단어는 영어로 ‘refresh’ 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충만해 지는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쉬어야 새 힘이 부어집니다. 쉴 때 묵은 것들이 밖으로 배출되고 신선한 에너지가 공급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잘 놀아야 합니다. 잘 논다는 것은 잘 쉰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 볼링의 원조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볼링의 원조는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옛날 중세 수도사들에게는 나무 막대를 세워놓고 공을 굴려서 넘어뜨리는 놀이를 하였습니다. 놀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나무 막대를 사탄으로 생각하고 사탄을 쓰러뜨리는 놀이를 즐겼던 것입니다. 이것을 대중화 시킨 것이 루터입니다. 당시 루터는 다이아몬드 형태로 핀을 세우고 공을 굴려 넘어뜨리는 놀이를 개발하였습니다. 쉬고 놀면서 우리는 새 힘을 공급 받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서 엘리베이터의 불도 켜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자동적으로 전 층이 서도록 만들어놓습니다. 두 글자 이상을 쓰면 일이 됩니다. 철저히 일주일의 하루를 쉽니다. 그런데 지금 전세계 경제나 언론, 정치, 과학과 철학을 주름잡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에 쉬면 우리 정신이 리프레쉬 되면서 창의성이 생깁니다. 창의력이 곧 경쟁력이고 성공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배짱이는 여름 내내 일하지 않고 노래만 하며 놀았고, 개미는 여름 내내 부지런히 일하며 곡식을 모았습니다. 그 결과 겨울이 되어 개미는 따뜻하고 편안하게 겨울을 보낼 수 있었지만 놀았던 배짱이는 거지가 되어 개미 집에 구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식입니다.

신판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름 내내 개미는 열심히 일하고 베짱이는 노래 부르며 논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달랐습니다. 개미는 너무 열심히 일한 결과 겨울 내내 신경통과 만성 피로증에 시달리며 병원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반면에 베짱이는 탁월한 노래 솜씨 때문에 음반을 취입했는데 그 음반이 대박 나서 편안하게 겨울을 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거룩하고 복된 날

제가 “쉬어라.” “안식해라.” 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도 쉬고 싶다.” “한가한 소리마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그렇게 놀다간 거지된다.” 우리가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려는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먼 미래의 보이지 않는 행복 때문에 현재 가까이 있는 행복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지금 당장 아이들과 함께 하며 놀고 가르치고 시간을 같이 하는 데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바빠서 그 행복을 학원 선생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어 놓고 일만 합니다. 더 큰 집을 얻기 위해,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정작 그때 되면 자녀들은 떠나고 두 부부가 덩그러니 남은 빈 방을 지켜야 됩니다. 

돈도 있고 여유도 있는데 이제는 늙고 힘이 없어 세계 여행을 갈 수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젊었을 때 빚을 내서라도, 시간을 짜내서라도 여행을 갖다 와야 할 것입니다. 큰 집을 구할 때까지 현재의 행복을 잠시 접어 두겠다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행복은 바로 지금 가까이 있습니다. 그 행복을 잡기 위해서는 일하는 것을 잠시 그쳐야 합니다. 제인 아담스란 자녀교육가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엄마와 이야기하려 하면 오븐 속의 음식을 태우더라도 대화를 나누십시오. 아이가 아빠와 이야기하고 싶어 할 때 가게를 한 시간 늦게 열더라도 자녀와 대화하십시오.”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바꾸어야 합니다. 일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라 놀고 즐기는 것이 최고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 3절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 할 때 거룩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거룩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수식어인데 창세기에서는 안식일을 언급하며 이 카도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주일 중 가장 큰 날이 안식일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를 안식일로 지키고 있지만 이제 크리스천들은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주일이 가장 큰 날입니다.  

안식일이 있는 이유는 여섯 날 동안 일했으니까 쉬기 위해서, 또 다음 날 능률적으로 일하기 위한 휴식의 필요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안식일의 낮은 목표에 불과합니다. 안식일 자체가 바로 목표입니다. 안식일을 맞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랍비인 아브라함 헤셀은 『안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안식일이 평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평일이 안식일을 위해 있다. 안식일은 삶의 막간이 아니라 삶의 절정이다.”

오늘 말씀을 읽다보면 매우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2절에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라고 개역판은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를 개역개정판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천지만물을 6일 동안 만드셨으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여섯째 날에 마치시니” 해야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또 하나의 창조 행위를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일곱째 날에 ‘안식’을 만드셨다고 고백합니다. 안식은 고된 노동에서 쉰다는 소극적인 인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평온함, 고요, 평화, 행복, 휴식, 교제 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안식에 있었습니다. 자녀를 낳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녀와 함께 인생의 행복을 즐기는 데 목적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집을 짓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는 것이 목적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안식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창조가 아니라 안식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결혼식 날과 같습니다. 신랑을 만나기 위해 평일 내내 꽃단장을 하다가 안식일에 신랑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주일을 맞으며 이런 기대가 있습니까?

우리는 안식일이라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구별하여 거룩하게 만든 이 날에 우리 또한 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할 때 우리 인생이 복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더 충실해집니다. 이 날은 기술문명이라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날입니다. 이 날은 이익을 얻고자 동료인간과 경쟁하던 것을 멈추는 날입니다. 이 날은 자연과 싸우다가 휴전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가장 중요한 날이기에 그 전날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는 안식일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토요일 전날까지 설교로 끙끙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안식일은 평화의 날입니다. 이 날을 우리는 은총과 평화와 사랑 속에서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헤셀은 “안식일에 화를 내는 것은 죄를 갑절로 지은 것이다.”고 까지 말합니다. 출애굽기 35장 3절에서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보이는 불만 지피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논쟁의 불도, 분노의 불도 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안식일은 걱정하거나 근심하는 날이 아닙니다. 즐거움을 떨어뜨리는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일은 찬양하는 날이지 무언가 달라고 요청하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에는 금식, 애도, 슬픔의 표시를 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주일에는 장례를 치르지 않습니다.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의 의미에 더하여 이제는 주일에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죽음에서 승리한 날을 기뻐하는 축제의 날입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데 금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를 사순절이라고 하는데 이 40일 기간을 계산할 때 주일은 뺍니다.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기쁨과 찬양만이 가득해야 합니다. 안식일에는 수고와 피로 또한 삼가야 합니다. 병문안 가서도 “오늘은 안식일이니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곧 낫게 될 것입니다.”고 말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이 또 신앙인들이 이 안식일의 기쁨을 상실하면서 우리 신앙의 기쁨도 사라졌습니다. 우리에게 주일이 기다려집니까? 주일에 죄와 죽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부활이 주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까? 안식일은 매 주 한 번씩 돌아오는 천국입니다. 감옥에 갇혀 지내던 사람이 이 날 하루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은 이 날만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안식일이 거룩하고 복된 날이라는 뜻입니다.

제대로 안식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쉬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없어도 일은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지라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제대로 안식년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 하나거 자기가 쉬면 교회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인생임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우린 신앙은 안식일을 잊어버림으로써 결정적인 힘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삶에 안식이 있고 안식일의 기쁨과 축제가 회복됨으로 행복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