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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세에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들 (단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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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에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들 (단 12:1~4)


오늘 말씀을 보니 별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주를 알면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뉴욕 하이헨 천문대의 천문학자들은 한사람도 불신자가 없다고 합니다. 우주가 광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되면 무신론자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아십니까? 지구가 있는 은하계에 2천억 개 이상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은하계에 있는 별들을 세는데 걸리는 시간이 6천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와 비슷한 또 다른 은하계가 약 1천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별들이 아주 정교히 운행됩니다. 하나님께서 관리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얼마나 넓습니까? 그런데 태양의 속이 비었다고 가정할 때 130만개의 지구가 그 속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태양의 크기가 상상이 됩니까? 굉장하죠. 그런데 안타레스라고 하는 별의 속이 만약 비었다고 하면 6,400만개의 태양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헤라클레스의 별자리 가운데 있는 한 별은 1억 개의 안타레스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큰 별로 알려진 에프실론은 헤라클레스 별자리 가운데 있는 별 수백만 개를 삼킬 수 있는 크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데 365일하고 6시간 조금 더 걸립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속도가 시속 106,000km(서울에서 부산 을 127번 왕복하는 거리)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굉음을 우리 귀로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소리를 듣게 된다면 우리 고막이 다 찢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너무 작은 소리도 안 들리게 하시고, 너무 큰 소리도 안 들리게 하셨습니다. 태양도 은하계의 성군 속의 한 작은 별입니다. 은하수를 중심으로 1바퀴를 도는데 태양계가 2억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인간의 숫자로 2억년은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세월입니다. 
아름답고 광대한 세상을 하나님께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의 종말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본문에서는 세상의 종말과 새로운 세상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기독교 교리는 4개의 큰 기둥을 갖고 있습니다. 창조의 교리, 타락의 교리, 구속의 교리, 종말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쉽게 수용되지 못하는 교리가 종말의 교리일 것입니다. 
1절에 보면 큰 환란이 나옵니다. 이 환란은 개국이래로 그때까지 없었던 커다란 환난입니다. 여기서 ‘개국이래로’는 ‘나라가 세워진 이래로’라는 말로 ‘세상이 열린 이래로’, ‘창세 이래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창세 이래로 전에 없었던 큰 환난의 시대가 올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4절에 보면 “마지막 때 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종말론이 열린 시대, 계시록이 열린 시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에 관한 글이 열린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환란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마지막 환란을 7년대환란이라고 하는데 7년대환란은 전3년반과 후3년반으로 나뉩니다. 이 환란에 관한 견해 중에는 성도가 환란을 통과할 것인가 혼란을 통과하지 않을까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저는 1절, 7절, 10절, 11절 12절에 근거해서 성도들도 대환란을 통과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7년대환란에 접어든 시기는 아니지만 대환란에 근접한 종말의 시기임은 확실합니다. 종말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근거를 본문에서 찾는다면 4절의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다니엘서가 기록될 당시인 2,50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대로 그 말씀이 응한 시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말세에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잘 들으시고 보다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육신의 생명보다 영원한 생명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은 육의 생명이 있고 영의 생명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보통 7,80년입니다. 길면 100년을 삽니다. 영의 생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영원히 산다고 영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영원히 불멸하지만 영생을 얻는 자들이 있고 영벌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땅에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자는 자’는 육신이 죽은 자를 말하고, ‘깨어나’는 부활을 말합니다.합니다. 

‘영생을 받는 자’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는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들 앞에는 영생과 영벌이 분명히 기다리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의 생명에만 관심이 있지 영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말세는 노아의 때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 심판을 말씀하셨고 방주를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노아는 종말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눅 17:27) 지금 이 시대도 동일합니다. 세상 종말이 눈앞에 다가오지만 사람들은 영원한 세상이나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육신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한 세상에 들어가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길입니다. 1절에 보니 책에 기록된 사람들이 구원을 얻습니다. 여기서 책은 ‘생명 책’을 말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엡 2:8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요5:24에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10절에 보면 지혜 있는 자는 깨달아 구원을 얻는 자입니다. 그런데 누가 지혜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잠 9:10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내세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 즉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어느 집에 어리석은 종이 한 사람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장난삼아 그에게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너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보이거든 지팡이를 그에게 주어라”고 하였습니다. 종은 그 지팡이를 받아들고서 밖으로 나가서 어리석은 사람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주인이 아파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종이 죽어가는 주인을 보고 물었습니다. “주인님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죽음 후의 세상을 준비해 두셨습니까?” 주인은 “아니, 아직 준비하지 못했어”라고 답했답니다. 

그러자 종은 “아니, 사람들이 하루 여행길에도 완벽하게 준비하고 떠나는 법인데 영원을 위해 준비한 것이 없어요?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은 처음 보았네. 자 여기 지팡이가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주인님이니, 여기 이 지팡이를 가지세요.”라며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육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생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어떤 환란이 있어도 믿음을 지키기를 바랍니다.
믿으면 만사 OK,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반드시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7절에 보면 전3년반 동안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진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극심한 고난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10절에도 보면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는 사람들이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보다 영원한 생명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떤 고난이 있어도 믿음을 붙잡고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2. 물질보다 사람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권세나 명예를 얻기 위해서 수고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 달려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목표와 수단을 잘 구별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수단이 목표가 된 사람들은 그 수단을 가지면 목표가 사라지기 때문에 허탈해지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한 은행 지점장이 자살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남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인데 자살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보니까, 직장생활 하면서 최고의 목표가 승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행에서는, 지점장까지 승진하면 그것이 거의 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 더 이상의 목표가 없어진 것입니다. 오로지 인생의 목표가 승진이었는데, 그 인생의 목표가 없어지는 그 순간에 그 사람은 절망한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했습니다. 

이런 삶은 불신자들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는 나오지만 실질적으로는 주님을 떠나서 살아갑니다. 주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고 주님은 그 목표를 이루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인생을 빛나게 하려면 명예나 권세 그리고 재물이 목표가 되면 안 됩니다. 정말 빛나는 인생을 만들려면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십시오. 전도에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십시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전도를 위한 도구로 생각하십시오. 

3절에 보니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사람은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됩니다. 하늘나라의 스타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별들은 이미 오래전에 빛을 발해서 이제 지구에 도착한 빛입니다. 지난 번 태국에 선교가서 산지족 마을에 갔을 때, 성도들과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나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땅 바닥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산 아래 저 멀리 도시 쪽에서는 계속해서 번개가 치면서 불꽃놀이를 보여주고, 하늘에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나 보았음직한 그런 초롱초롱한 별들이 무리를 이루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연기도 아니고 구름도 아닌듯한 뿌연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은하수라고 하더군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 때 보았던 은하수까지의 거리가 약 3만 광년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 보았던 은하수는 이미 3만 년 전에 있던 은하수입니다. 은하수에서 출발한 빛이 3만년 동안 날아와서 우리들의 눈에 은하수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처럼 빛난다는 말씀은 영원한 역사에 남는 위대한 빛을 발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이라는 것입니까?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기억될 일이 전도요 선교인 것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의 변종길 교수는 ‘성경적교회성장의 개념과 원리’라는 논문에서 교회성장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전파이고, 교회성장은 복음전파에 종속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복음전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전도하는 교회가 성장을 하고 성도들의 삶이 성결해진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가 건강하고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아름다웠던 것은 그들이 기도에 열심을 내었고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서 전도에 힘을 썼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기독교 조사기관인 바나 리서치 센터가 2002년 8월부터 2003년 5월까지 미국 48개주의 성인 4,265명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조사를 벌였습니다. 그 설문조사의 결과는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전도자들이 전도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신앙과 생활면에서 만족감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도하는 사람들 중 ‘자신의 삶이 매우 행복하다’고 응답한 사람들은 74%로 전도하지 않은 사람들의 63%보다 11%포인트나 높았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인 신앙심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도 전도자가 78%,전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60%를 차지했습니다. 
이들은 교회생활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비율도 72%와 52%로 전도하는 사람들이 훨씬 높았습니다. 주일학교 참석 비율도 47%와 24%, 주중 소그룹 모임 참여 비율도 41%와 22%로, 전도하는 사람들이 월등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배나 성경공부 시간 외에 성경을 읽는 비율도 전도자들이 74%인데 비해 비전도자들은 47%에 머물러 큰 차이가 났습니다. 

교회에 대한 헌신도도 전도자들이 높았습니다. 1년간 헌금액도 3배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전도하는 교회가 재정적 측면에서도 탄탄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믿음도 상당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성경 가르침의 무오성에 대해서 전도자들은 77%가 ‘틀림없다’고 대답했으나 비전도자들은 57%에 그쳐 성경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성경 말씀이 진리이고 믿을 수 있다’는 질문은 81%와 61%,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는 질문은 54%와 36%로 나타나 전도자들이 높은 수치를 보였습니다. 

교단별로는 하나님의 성회 성도의 67%가 전도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으며 오순절교회와 독립교단 교회들의 전도 비율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침례교는 40%, 장로교는 31%, 루터교는 24%, 감리교는 21%, 성공회는 13% 등으로 나타나 대조를 보였습니다. 최근 미국 내에서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등 전통 교단보다 오순절교회 등이 훨씬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번 조사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입니다. 

이 같은 조사 결과에 대해 풀러신학교에서 전도학을 가르치고 있는 리처드 피스 교수는 “전도하는 사람들과 전도하는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사실이 통계적으로 입증됐다”면서 “주님의 지상명령인 전도는 우리가 살면서 매순간 해야 하는 과제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제 미국교회 뿐 아니라 세계교회가 새로운 전도운동을 일으켜 잃어버린 영혼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모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만난 즉시 전도를 시작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거라사 지방에 귀신들려 무덤을 배회하던 사람이 예수님 만나고 치유를 얻자 예수님을 좇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네가 먼저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고 하십니다. 전도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전도하면 성령충만합니다. 전도하면 기도하게 되고 성경공부도 하게 되고 전도하면 신앙이 살아 움직입니다. 전도하면 인생이 변화됩니다. 전도하면 영원한 세계에서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3. 분주함보다 우선순위를 따라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4절에 보면 말세의 징조 중에 하나가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는 것입니다. 속도감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분주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가 사는 시대는 너무나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분주함보다 우선순위를 따라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노를 젓는 것보다 묶인 로프를 푸는 것이 먼저 이듯이 먼저 해 야 할 일이 있고 나중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당장의 필요를 따라 움직이게 되면 급한 일들을 먼저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굉장히 바쁘게 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들은 놓치고 실속 없이 살게 될 것입니다. 급한 일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먼저 하는 사람은 속도가 느린 것 같고 답답해 보이지만 중요한 일들을 놓치지 않고 결국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웹스터 사전에서는 ‘우선순위’란 ‘절박함, 중요함, 가치 따위에 근거하여 우선하는 순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우선순위를 두고 살고 있습니까?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아니면 예배생활입니까? 여러분의 생활을 보면 자기가 어떤 것을 우선순위에 놓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마 6:33에 보면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미국 실업인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분이 아더디마스 장로님입니다. 그 장로님은 CCC회관 건립을 위해 엄청난 거액을 헌금했고 유산정리를 해서 5,600억 원 정도를 선교재단을 위해 헌금한 분입니다. 그 분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이 형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데 문제는 원칙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6가지의 원칙을 소개했습니다. 

‘①주일성수 ②하루의 첫 시간에 기도하는 것 ③온전한 십일조 ④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돈을 주님을 위해 쓰는 것 ⑤주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 ⑥사업의 모든 문제와 필요를 주님이 해결하시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알렉산더 블렉이라는 소설가는 사람들이 평소에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잘 던졌다고 합니다. "당신이 만약 지금 백만장자가 된다면 그 돈을 제일 먼저 무엇에 쓰고 싶습니까?"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평소의 생각이 어디에 제일 많이 가 있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시간관리 전문가가 경영학과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퀴즈를 하나 해 봅시다.” 그는 커다란 항아리를 하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주먹만한 돌들을 꺼내 항아리 속에 하나씩 쌓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리에 돌이 가득 차자 그가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예!” 그러자 그는 “정말?” 하고 되묻더니, 다시 테이블 밑에서 조그마한 자갈을 한 움큼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항아리에 집어넣고 깊숙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항아리를 흔들었습니다. 

주먹만한 돌 사이에 조그마한 자갈이 가득 차자 그는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글쎄요.”라고 대답했고, 그는 “좋습니다.” 하더니 다시 테이블 밑에서 모래주머니를 꺼냈습니다. 모래를 항아리에 넣어 주먹만한 돌과 자갈 사이의 빈틈을 가득 채운 후에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했고, 그는 “그렇습니다.”라고 하면서 물을 한 주전자 꺼내 항아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매우 바빠서 스케줄이 가득 찼더라도, 정말 노력하면 새로운 일을 그 사이에 추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시간관리 전문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 실험에서 말해주고 싶은 것은 '만약 당신이 큰 돌을 먼저 넣지 않는다면 영원히 큰 돌은 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왜 실패합니까? 그것은 우선순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큰 돌을 집어넣어야 하는데 엉뚱하게 작은 것부터 집어넣기 때문에 결국에는 큰 것을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 되는 사람은 교회가 우선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우선인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학개서를 보면 당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생계 문제로 성전 건축을 중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들이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나 교회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의 생계가 더 중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우선하지 않자 하나님은 곧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10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우선순위가 잘못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징계의 매를 드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바쁘게 사실 것입니다. 보지 않아도 압니다. 지금 시대가 그런 시대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예배보다 바쁜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일을 위해서 예배를 희생하는 사람을 축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배를 위해서 자신의 일을 희생하는 사람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4. 지식보다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4절에 보니 말세의 징조 중에 하나가 지식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지식이 많은 시대는 없습니다. 초등학생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제가 초등학교 때는 알 수도 없었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지식이 많아진 시대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모든 정보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어떤 정보든지 검색만 하면 어떤 것이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세계 구석구석의 모든 소식과 모든 지식들을 다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전 8:1에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지식보다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말세가 되면 사랑이 식어집니다. 주님은 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마 24:12에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는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하지만 사랑에는 열심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연조가 더해지면 교회생활이나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아지는데 사랑은 식어지고 있습니다. 신혼 때는 부부가 뜨겁게 사랑하는데 결혼 생활이 더해지면서 사랑이 식어지고 의무감만 남는 경우가 흔합니다.

수년전 치매로 고생하는 아내를 둔 남편 위스컨신주의 Mr. Still water씨의 이야기가 Moody Monthly라는 잡지에 실린 일이 있었습니다. 아내를 요양원에 맡긴 것이 마음에 걸린 남편은 하루를 마다 않고 거의 매일 저녁 요양원에 들려 한 두 시간을 곁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양원을 찾을 때는 늘 아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갔다고 합니다. 하루는 자녀들이 함께 와서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가르키며 이분이 누구냐고 묻자 남편을 몰라보는 아내는 “아이스크림 사다주는 좋은 아저씨라”고 대답합니다. 

하루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어느 날 남편이 아내 옆에 앉아 “내가 좋으냐?”고 묻자 아내는 “아이스크림 사다 주니까 좋아”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편은 기다렸듯이 “그러면 나하고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아내는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아이스크림 계속 사다주면 결혼할게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남편은 요양원에서 봉사하시는 목사님께 특별한 도움을 요청하고 자녀들 그리고 요양원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탄절 오후 조촐한 결혼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주례가 치매 걸린 아내에게 묻습니다. “옆에 있는 이분을 남편으로 맞이하시겠습니까?”고 아내는 또박 또박 “예”하고 대답합니다. 남편은 주례의 허락을 받아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인사 시간을 갖고 준비해온 메모지를 읽어내려 갔다고 합니다.

“오늘 저희들의 결혼식에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저의 아내와 이런 번거로운 결혼식을 다시 준비한 것은 단 한번이라도 제 아내에게 ‘사랑하는 남편’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일 다시 제 아내가 저를 기억 못해도 저는 오늘만이라도 저의 사랑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저희들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이날 저는 저의 아내를 선물로 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도 저의 아내에게 오늘 하루라도 다시 한 번 남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식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오늘을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희에게 이 사랑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성탄절 우리 부부는 고귀한 사랑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분의 아내는 치매가 치유되지 못한 채로 약 6년을 더 살았는데 그러나 한 가지 자기 남편을 남편으로 부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남편은 아내의 장례식에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제 아내가 요양원 결혼식후 적어도 저를 남편이라고 불러준 것 그것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고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남은 저의 인생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제 아내보다 더 외롭고 아픈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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