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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일 (눅 2: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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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성장(信仰成長)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일 (눅 2:40~52)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우리나라를 표현할 때 '금수강산(錦繡江山, Beautiful Korea)'이라고 합니다.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산천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산천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자연의 경관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언제나 금수강산이었습니다. 사실 어느 나라보다 경치가 빼어나고 물이 좋고 산이 좋습니다. 특별히 아름답고 좋은 것 중에 사계절이 뚜렷합니다. 

사계절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계절마다 각각 다른 아름다움과 서정을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같은 계절이라도 기후와 나무에 따라 다른 젗취를 느끼게 해 줍니다. 그래서 어느 계절이든 좋지 않는 계절 없지만 각자 취향에 따라 사람마다 선호하는 계절이 다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계절마다 보편적으로 주는 계절의 맛이 독특하게 있습니다. 

지금은  가을인데 각종 열매로 풍요로움을 느끼게 해 주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유독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가을에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합니다. 그렇게도 푸르름이 오색빛깔로 수놓은 단풍을 보고 있으면 강팍한 마음도 스르르 녹아내립니다. 또한 가을을 가리켜 독서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옛날 어른들은 가을을 가리켜 ‘등화가친(燈火可親)’하기에 좋은 계절이라 하였습니다. ‘불을 가까이할 만하다는 뜻으로, 서늘한 가을 밤은 등불을 가까이 하여 글 읽기에 좋음을 이르는 말’로 고사숙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도 신앙성장을 위해 가을을 잘 바르게 사용(선용, 善用- 알맞게 쓰거나 좋은 일에 씀)해야 합니다. 가을은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사색의 계절이기 때문에 영성훈련에 가장다 좋은 계절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영성(靈性,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을 추구(追求, 목적을 이룰 때까지 뒤쫓아 구함)하는 신앙입니다.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많이 닮을수록 영성이 깊다>고 표현하고, <그리스도를 닮음이 적으면 영성이 얕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1절 말씀에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 체험’에 깊이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영성은 단순히 성령 체험이나 어떤 은사 체험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영성은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체험하여, 그분의 뜻대로 살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영성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신비적인 하나님을 우리 영혼의 심저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깊이 경험하고 올바로 알려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선교교회 담임목사였던 강준민 목사'는 영성(靈性)에 대해 이렇게 정의[定義, definition]를 내리고 있습니다.

“영성이란? 성령님 안에서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영성이라면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는 우리가 보다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보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영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비본성적인 것들을 내 존재의 한 부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원래 내게 없던 것들인데 내 존재 속으로 스며들고 주인으로 자리잡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우리 는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내 안에는 원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았습니다. 내 밖에 계셨던 분인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자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거룩하게 성화가 일어나록 인도하시고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믿음생활이요, 영성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변화되어 새로운 성향이 내안에 들어왔니다. 내 안에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요, 사단의 종이요, 마귀의 성향이 가득하였는데 이제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인으로 거룩한 성향으로 바뀌어져 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이요, 영성이 깊으면 그리스도의 성향이 크게 나타나고, 영성이 얕으면 그리스도의 성향이 잘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길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중 하나가 불의를 행하고 죄짓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악한 말을 하고, 죄를 짓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잘하게 됩니다. ‘질투를 잘하는 법’ ‘더 많이 화내는 법’ ‘더 잘 싸우는 법’ 이런 것들은 세미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본성이 시키는 대로 하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바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작은 일에 짜증이 나고 화가 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의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이전에는 살았지만 비본성적인 것, 예수그리스도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 예컨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나보다 남을 섬기는 것, 자신을 낮추는 겸손, 온유함, 자비로움, 십자가를 지는 일 이런 것들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덕목들은 그리스도의 본성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본성([本性, 사람이 본래부터 가진 성질)을 내 안에 심는 작업이 영성을 추구하는 삶이요 신령한 믿음생활입니다. 비본성적인 것을 내 안에 심어서 그것이 내 존재 속에 스며들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영성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ㅇ름의 선한 싸움은 한 두 번의 시도나 노력으로 되거나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성이라고 하면 “주여!” 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 부르짖는 기도, 방언을 하고 병이 낫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령한 은사를 체험하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해도 그리스도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꽹과리'인 처럼 올바른 영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랑은 비본성적인 것이요 그리스도의 본성이기에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나의 삶이 지속될 때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성장과정을 보면 우리도 어떻게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인적인 신앙성장을 위해 육체가 강건하고, 지성([知性,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과 감성(感性)과 영성(靈性,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이 겸비되어야 합니다. 영성이 발달하려면 지성과 감성도 함께 발달되어야 합니다. 사람에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만 어떤 사람은 지성이 발달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감성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남성은 지성이 발달되어 있고, 여성은 감성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성보다는 감성이 발달된 사람이 영성발달도 빠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성(性)분포를 보면 기독교의 경우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 6:4, 또는 심한 곳은 7:3정도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깊은 신앙심을 가진 성도를 보면 남성보다는 여성이 많습니다. 남성은 지성이 발달되어 이성적이면서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뭐든지 믿으려고 하기 보다는 먼저 원인을 밝히려고 합니다. 믿음은 그냥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리와 이치를 되묻거나 따진다면 믿음이 약화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성의 삶이되기 위해서는 지성도 개발해야 하지만 감성을 개발시켜야 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성장과정을 통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고 변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52절 말씀,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우리가 이 가을에 집중해서 닮아야 할 목표로 삼고 노력해야 할 일은 무엇(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이 되어야 합니까?

1. 육체가 강건하게 성장해야 합니다.

본문 40절 말씀에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예수님은 키가 건강하게 잘 자랐습니다. "아기가 자라며...그 위에 있더라"는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어릴적 성장 모습을 묘사한 1:80의 내용과 비교가 됩니다. 그리고 52절은 이 구절에 대한 보충 내용이다. 이것은 예수가 12살이 되기(42절)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자라며 강하여지고"라는 표현은 신체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범한 아이와 같이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혜가 충족하며"라는 표현은 정신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표현은 영적 성장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어릴 때부터 지혜와 은혜를 가진 인물로 세례요한보다도 훨씬 탁월했음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아기가 자랐다"고 하는 것과 52절 말씀에 "키가 자라갔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건강한 성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성장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육체의 성장입니다. 신체가 연령에 맞게 정상적인 성장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애인이 됩니다. 우리가 몸이 강건해야 합니다. 키도 자라야 합니다. 육체적 건강이 중요합니다. 우리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깨어져서 담을 수 없다면 그것은 그릇으로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든가요.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영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건강이라고 할 때 단순히 육체적 아픔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사였던 폴 투루니에는 건강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건강이란 병이 없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건강은 삶의 질적 문제다.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구김살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시키는 것이 건강이다” 
이런 건강의 정의를 내린다면 균형이 잡힌 건강을 말합니다. 체격만 크고 다른 것이 자라지 않으면 저능아이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키만 자란 것이 아닙니다. 신체만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영성훈련도 역시 신체의 건강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 갚은 삶을 살고 싶어도 육체가 건강하지 못한 가운데 병상에 누워 있으면 제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정상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는 무엇이 자라야 합니까? 

2. 지성([知性)이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40절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지혜가 충만했다”고 했고, 52절에서는 “지혜가 자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자랐다”는 것은 ‘지성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지성이 점점 자라서 지혜가 충만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정신연령도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그 부모가 해마다...예루살렘으로 가더니"라는 부분에서님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성실히 이행하는 경건한 유대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의식은 온갖 위선과 타락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구약적 차원에서 지켜야 할 율법 의식들은 여전히 중요한 구속력(拘束力)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유대 성인 남자들이 연례 행사로서 삼대 주요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장막절)을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지키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신 16:16). 그러나 바벧론 포로 시대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각처로 흩어지게 되어 이행사에 매년 모두 참석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적어도 유월절 행사에만은 꼭 참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이 행사에 남자들만 참석하도록 명시하고 있으나 유대 랍비 힐렐(Hillel)은 여자들도 축제에 참석하도록 권고하여 그렇게 지켜졌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배운 전통적 규례인 성경 말씀을 실천했음을 보여주고 잇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성인들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지식이 지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바르게 보고 판단하며, 살아가는데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안 됩니다. 세상 지식을 올바르게 배우고 따라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는 성경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하고 따른는 지성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요구되지만 믿은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것과 성경의 진리를 올바르게  분별하고 알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를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올바르게 정립되어 하며, 예수님처럼 진리에 바로 서서 실천하는 삶을 살기 위해 먼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의 무지와 멸망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성경말씀에 근거한 지성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옳게 분별하는 지적능력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사무엘상 2장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4:6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깨닫고 인지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지적능력이 부족하거나 지혜가 부족가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하여 악의 길로 빠지거나 사단의 미혹에 빠질 수 있고,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대적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41절 이하의 내용을 간추려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유월절 명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바로와 종 된 자리에서 해방될 때 전적으로 모세를 보내어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당시에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만나시고 그를 보내어 하나님 자신의 뜻을 전했지만 애굽의 왕 바로가 완고하여 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애굽인들이 섬기던 신들인 열 가지 재앙을 내리는데 열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아홉 번까지 재앙 앞에 애굽의 바로 왕은 백성을 해방시켜 준다’고 약속했다가 약속을 번복하여 출애굽을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바로에게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인 장자의 죽음을 내렸습니다.

이때 애굽 땅에 모든 장자가 완의 아들로부터 짐승의 첫 것까지 모두 다 죽어지는 재앙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는 재앙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재앙이 넘어간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순종했더니 그들은 죽음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바로와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었는데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명절이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명절에 참여할 수 있는 나이가 당시에 12살의 남자 성인이 되어야 참석하여 성전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열 두 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유월절 명절 행사를 다 끝내고 나사렛으로 돌아오는데 예수가 같이 동행한 줄 알고 하룻길을 내려오다가 확인하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기를 찾느라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다른 친족들이 내려오는 그룹에 찾아가 보아도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부모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흘 길을 찾아 헤매며 찾았는데 결국 예루살렘까지 성전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은 성전에서 천연덕스럽게 랍비선생님들과 함께 앉아서 선생님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을 듣는 선생님들은 모두 다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겼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성을 개발시키기 위해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지혜가 자라서 선생님들조차도 함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모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어머니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님께서 부모님에게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라고 해야 할텐데 전혀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49절 말씀에,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여기서 예수님은 성전을 아버지지 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생각할 때는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 자신인데, 성전을 두고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니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니까 이 대답의 말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성전에 머무는 것이 정상적인 행동이라는 지성을 가졌는데 부모는 아직도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50절 말씀,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부모는 예수님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지만 지혜에 대해서는 아들 예수님보다도 훨씬 부족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성을 위해서는 말씀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들어야 합니다. 반복해야 합니다.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을 암송하십시오. 그것도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3. 영성(靈性)이 충만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40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했고, 52절 말씀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영성은 성부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야 합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와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임했으니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더니 결국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럽게 성장했던 것입니다.

1) 51절 상반절에 보면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순종의 삶이 영성적 삶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랐을 뿐만 아니라 영성도 순종함으로 성장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영성발달은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고 칭찬 듣는 일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순종하는 신앙이 습관화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영성은 예수님을 닮아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더욱 사랑스러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영성이 발달하는 방법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닮았습니까? 하나님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만큼 아름답게 순종하는 신앙으로 영적성장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듯에 순종하며 살아갑니까? 이 가을에 우리가 해야 중요한 일은 바로 영적성장을 위한 노력이 요구됩니다. 영성발달을 위한 순종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우리도 스승으로부터 배우기도 하고 질문을 하기도 해야 합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지식을 얻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배움은 반드시 좋은 환경에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깊은 영성이 때로는 아픔을 통해서도 옵니다. 

소설 『빙점』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작가 미우라 아야꼬는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종합병원이라 칭함을 받을 정도로 온 몸이 병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성 안이 있다.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조차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가을에 그리스도의 영성을 본 받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기독교 영성이 충만한 삶이 되려면 우선적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마지막까지 순종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것도 오직 순종에서 나온 것입니다. 

2)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성 가운데 우리가 빨리 배워야 할 것은 온유함과 겸손함입니다. 

마태복음11:29절 말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영성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가을에는 나의 마음이 좀더 따뜻하고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좀 더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하면 안 됩니다. 

가을에 집중해야 할 일은 영성을 위한 일입니다. 즉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배움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배우라” 이 말씀은 “나를 본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15장5-6절 말씀,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바울도 배움의 모델을 그리스도 예수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든 훈련이 영성훈련입니다. 기독교의 깊은 영성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삶에서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 생활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3) 영성 생활은 속사람을 가꾸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이런 내용의 글을 썼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영성생활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영성생활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영성생활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족하는 삶입니다. 영성생활은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성생활의 최고 열매는 사랑입니다.

가을 단풍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깊은 영성의 삶을 살 때에 단풍처럼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가을 하늘이 높음을 느낀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서 우리의 영적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가을 하늘이 맑음을 느낀다면 우리도 영성훈련을 통해서 나의 영이 맑고 깨끗한 영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가을이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임을 느낀다면 우리 또한 영성훈련을 부지런히 하여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농부에게는 가을에 추수할 것이 있어야 하듯이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을에 해야 할 중요한 일, 우리의 신앙 성장을 위해 집중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영성을 위한 삶을 통한 열매를 얻는 일로 예수님처럼 닮아 가는 목표를 성취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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