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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하게 하는 자는 행복하다 (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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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자는 행복하다 (마 5:9) 

  
화평(和平)은 '화활(합치다) 화, 평평할 평'이다. 합쳐서 같이 나누었다는 뜻이다. 헬라어로 에이레네(      ), 히브리어는 솰롬(    )인데, 솰롬의 의미는, 전쟁이나 고통의 중지가 아니다.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처음의 온전한 관계로 되돌아감을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평화를 원한다. 항상 싸움이 그치지 않는, 이스라엘에서도, 매일 주고받는 일상적인 인사말이 솰롬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죄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청결에 이어, 화평을 말씀한다. 청결은 화평의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화평을 깨뜨리는 가장 무서운 죄는, 청결하지 못한 죄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성결을 강조하고, 그 다음에 화평을 말씀한다. (약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하였다. 죄가 해결되어야, 화평이 있다. 죄가 해결되지 않은 평화는, 거짓된 평화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고전14:33).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은 죄에 빠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마1:21).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평화를 위한 활동이었다. 가난한 자를 돌보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죄지은 자를 사해 주시고, 소외된 자들을 위로하신 모든 활동이, 하나님 나라의 평화 운동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내려오시면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통곡하시며 우셨다. (눅19:42)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하시며,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모름을 안타까워하셨다.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사53:5).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21)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평화의 복음을 완성하셨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화평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1. 왜 화평해야 하는가? 

(1)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라는 말은, 우리에게 '화평하게 하는 의무'가 있음을 말한다. 

(고후5:18)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기시고, 너희는 화목제물이 되었으니, 세상에 나가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감당하라고 명령하신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평화의 복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 때문에 형성된 원수관계를 청산하고, 평화를 가져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속에 나타난, 평화의 복음을 믿고,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과는 정반대로, 오늘 우리의 역사와 현실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며, 화해가 아니라 분열이요,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며, 용서가 아니라, 분노가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더욱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 주님과 교제를 위해서다. 
주님은 평강의 하나님(히13:20), 평강의 왕(사9:6), 평강의 영(롬14:17)이시다. (삿6:24) '여호와 솰롬' 여호와의 평강이라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평강의 나라가 주님의 나라이기에, 주님과 함께 살고, 교제하기 위해서는, 화평해야 한다. 평화의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려면, 죄가 해결되어야 가능하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사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라고 했다. 

주님과의 교제의 기쁨을 아는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성령은 우리의 죄를 씻어서, 평화의 사람으로 만든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평화의 사도가 되었다. 거듭난 사람들의 인격 안에는 평화가 있다. 

저주받은 영혼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속의 은혜를 입었을 때, 그에게는 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 평화의 사도가 되었다.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에,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다. 

천국은 화평의 나라이기에, 화평해야 한다. 천국시민이 천국에 가려면, 화평이 필요하다.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 속에, 화평을 요구하신다. 

(3) 성령님은 화평하는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평화는 온 인류의 열망이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구라파에서 여론조사를 했다.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압도적인 열망은 "평화"였다. 

따라서 성도는, 화평을 외치는 자가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성령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을 만든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 평화의 사도가 되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다. 

우리 마음에는, 미움과 증오와 원수 맺는 타락한 본성이 있다(약4:1). 이것 때문에, 분쟁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화평할 수 없다. 이것은 교육으로 안 된다. 사상으로도 안 된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셔서, 평화의 사도로 세우셨다. 그러나 평화의 사도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언제나 마음속에는 칼을 품고 있었다. 로마를 정복하여 이스라엘에 평화가 올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한다. 

(행1:6)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그때 예수님은 (7-8)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면, 너는 평화의 사도가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고, 평화의 사도가 되었다. 칼을 녹이는 평화의 도구가 되었으며, 평화의 사람들이 되었다. 모든 미움과 갈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분들이 되시기 바란다. 

2. 누구와 화평해야 하는가? 

성경은 심리요법이나 요가, 또는 정신통일에 의한, 평화를 말하지 않는다. 평화는 관계에서 나오는데, 우리는 3가지 면에서 관계를 맺게 된다. 

(1) 하나님과 나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라. 
(욥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했다. 인간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평화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평화는 진정한 평화는 못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과 평화하지 못하는가? 성경은 죄를 해결 못하고, 불신앙 가운데서 살아가는 상태를,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라고 말한다(롬5:10). 인간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과 화평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는, 근본적으로, 원수라고 한다. 그러나 복음으로 죄를 해결하면, 이 관계는 변화될 수 있다. 돈 리처드슨이 '평화의 아들'(Peace Child)이란 책을 썼다. 이 책은 리처드슨이 선교사로, 화란 영 '뉴 기니아'의 사위 족에게 복음을 전한 내용이다. 

사위 족은 사람들의 머리를 사냥하는 식인종들이다. 그들은 해골을 베개로 만들어서 잠을 잤다. 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미덕은 배신이다. 상대방에게 잘 해주고, 살이 찌개 한 다음, 상대방을 잡아먹는 배신이 최고의 미덕인 부족이다. 

리차드슨 부부는, 사위 족이 사는 지역에 선교사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때, 두 마을이 고질적인 분쟁에 휘말려 끊임없이 싸우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두 마을이 '평화의 아들'을 교환한 다음에는, 서로 싸우지 않음을 발견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평화의 아들"이라고 복음을 전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화목하지 못한 문제에 대한, 대답이시다. (엡2:14)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다. 

(2) 우리 자신과의 평화이다. 
사람들은 자신과의 갈등을 겪고 있기에, 늘 불안하다. 그래서 바울은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과 평화롭게 된 사람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전도하여 한 영혼이 거듭날 때, 그 사람의 마음에 성령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있다. 주님을 알기 전에 지옥 같은 어두움이,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들일 때, 주님께서는 놀라운 평안을 허락하신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평화를, 맛보시기 바란다. 

(3) 이웃과의 평화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바른 관계가 있어야 한다. 우리 마음 속에 평안이 없을 때, 다른 사람들과도 불편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마음 속에, 평안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대의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분리가 있었다. 이방인과 결혼하면 장례식을 치렀다. 일상 아침기도에, 자기가 이방인이 아님을 감사했다. 성전에서도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 사람의 뜰, 제사장의 뜰이 있었다. 헬라세계에서는 헬라 말을 모르면, 야만인이라 했다. 

이처럼 남을 무시하는 생각을 가지면, 행복할 수 없다. 우리가 모임에 참여함으로 화목해진다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하다. 그러나 참여하는 모임마다 다툼이 생기고 분열된다면, 자신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롬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했다. 우리가 화목해야 할 대상은, 모든 사람이다. 좋아하는 사람, 친분이 있는 사람과만 아니라,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과도 화평을 유지해야 한다. 

주님은 (마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처럼 성도는 화평을 구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까지 다 용서하시고, 평화를 이루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배신할 수 없고, 사기 당해도 사기 칠 수 없고, 억울함을 당해도, 보복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미움을 받고도 사랑하고, 욕을 먹어도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 어떻게 화평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1)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 들어가라. 그리고 주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라. 
우리가 하나님 품에 돌아와 쉴 때까지는, 결코 평안함이 없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관계가 좋은 사람들이다. 능력이 있고, 똑똑하고, 돈도 많아서, 잘난 척해도, 실제로 보면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관계를 잘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하게 보여도, 모자라 보여도, 관계가 좋은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씻고, 우리와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손길을 거부하지 말라. 

(2) 복음을 전할 때, 이 땅이 화평하게 된다. 
예수님은 인류의 가슴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화목제물로 바치셨다. 예수님은 죽으면서도 원수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온전한 희생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자신이 죽지 않고는,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이룰 수가 없다. 누군가의 희생과 손해 없이는, 다른 사람에게 행복과 평화를 줄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람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는 삶을 원한다면, 희생하고 손해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순교는 평화의 사도가 되는 신앙 행위이다. 순교는 원수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 원수와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원수의 손에 죽으면서, 마음속에 미움을 품고 죽는다면, 이는 순교가 아니다. 예수님은 원수의 밥이 되셨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셨다. 

이 얼마나 위대한 복음인가? 그래서 (롬10:15)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했다.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하나님의 평화가 확장된다. 우리는 자신을 죽여서, 부활의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3)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잘못된 철학을 버릴 때, 평화는 온다. 
기독교사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범한 역사적인 범죄가 있었다. 십자군 전쟁이다. 그들은 성지탈환을 위해서 일어났다. 좋은 목적으로 봉기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방법, 즉 증오와 폭력을 썼고, 그 결과 유럽의 수많은 성도들의 가정에 지울 수 없는 상처들을 남겼다. 수많은 어린이들이 고아가 되고, 여인들이 남편을 잃게 되었고, 가정들이 파괴되었다. 그래서 그때가 기독교 복음 정신이, 성경에서 가장 멀리 떠나 있었던 어두운 시절이다. 

그 당시 모든 기독교인들이 흥분했을 때, 사랑의 등불을 켜고, 평화의 기도를 드린 사람이 있었다. 성자 프랜시스였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이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기 바란다. 

결론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의 축복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로 인해, 미움 가득한 세상이 평화롭고 행복해져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2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 주신다. 
홍길동전을 보면, 아들인데도 아들로 인정받지 못함은 비극이다. 그러나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때, "네가 과연 내 아들이다!"라고 인정해 주신다. 주님이 우리를 인정하시면, 얼마나 기분 좋을까? 

(2) 다른 사람들이 인정한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받음은, 선교적 삶을 촉구한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우리가 철야하고 금식한다고 감동을 주지 못한다.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거나,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이 나타나도, 불신자에게는 큰 감동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삶을 살 때, 이것은 그들의 인격 속에,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깊은 도전을 준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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