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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일이 기다려지는 교회 (막 2: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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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이 기다려지는 교회 (막  2:18~3:6) 


서론 

예수님의 소문이 사방에 퍼지면서 그 분의 사역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본문은 금식과 안식일 준수와 관련되어 예수님이 그들과 벌였던
논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논쟁들을 통해 안식일에 어떤 일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일어나야하는 지를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일날 우리 교회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또한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를 ‘주일이 기다려지는 교회’로 세워갈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I. 주일, 하나님의 잔치에 함께 참여하고 기뻐하는 교회 (2:18-22)

금식은 음식을 금하며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영적 훈련의 한 방편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1년에 오직 한 번 大속죄일에만 금식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이후에 유대인은 매년 네 차례씩 금식했고 (슥 7:5,8:19) 
예수님 시대 경건한 유대인들은 1주일에 두 번씩 규칙적으로 금식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면 금식하고 있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비난을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왜 금식할 필요가 없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9절)

당시 배경에서 볼 때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유대인도 혼인 잔치에 참여했을 때는 자신이 금식해야 하는 날이라 할지라도
금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다 함께 기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금식해야 할 문제가 있다면 신랑이 그 잔치를 떠났을 때 행해져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금식 문제 때문에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함께 있는 제자들의 모임의 참된 실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혀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혼인 잔치보다 더 기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약 예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가 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잔치를 베푸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롤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을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6-8)

지난 한 주 동안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저의 마음에 얼마나 큰 깨달음과 감동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성도님들 기억하십시오. 주일날 우리가 예배에 참여한다는 것은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베푸신 천국 잔치에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생명의 양식, 그 분의 말씀을 먹습니다.

또한 우리는 맑은 포도주 즉 우리 영혼의 참된 음료가 되는 예수님의 피를 마십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억압하는 마귀와 병과 고통을 멸해주십니다. 
나아가 그 분의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 눈물을 씻겨주시고 수치와 부끄러움을 사라지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어느새 하늘의 기쁨과 감격, 세상을 이길 힘이 솟아납니다. 
하나님의 가족들이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줍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도님들께서 주일 교회에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임을 명심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예배와 모임은 너무도 아름답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주일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II. 주일, 서로에게 긍휼을 베풀어주는 교회 (2:23-28)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그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랐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제자들은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는 노동과 수확의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성경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시며 그들의 무지와 오류를 드러내셨습니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씀은 사무엘상 21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다윗이 심히 배가 고파 제사장에게 먹을 것을 부탁했을 때 
그는 제사장외에는 율법을 통해 먹는 것이 금해졌던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율법에 대해 정통하고 있었던 제사장이 왜 다윗에게 율법에서 금한 행동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율법에 있어 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긍휼과 사랑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주린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정당한 일임을 밝히셨습니다. 
또한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비난하는 대신 그들을 긍휼로 품어주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는 동일한 사건을 다루는 마 12:7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성도님들, 우리 교회가 ‘주일이 기다려지는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서로에게 긍휼을 베풀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을 베풀어주기 보다는 
비난과 정죄를 퍼부을 때가 훨씬 많습니다. 

저는 예배 시간에 주무시는 분들에게 화를 내기가 어렵습니다. 
저 역시도 예배 시간에 많이 잤었고 무엇보다 우리 어머님이 많이 주무셨습니다. 
어릴 때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어머님의 고단한 삶을 잘 알고 있기에
주무시면서도 교회가 빠짐없이 참석하시는 것이 사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주무시는 분들 대부분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 붙드시려는 귀한 분들입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저는 예배 시간에 떠드는 아이들에게도 화를 내기가 어렵습니다. 
어릴 때 저희들은 교회에서 떠든다고 꾸중을 듣다가 자주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저 녀석들은 부모들이 가정에서 교육을 어떻게 시켜서 저 모양이야?”
저희들은 꾸중을 들어도 당연했지만 친구들 중에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이고 
어머니가 밤늦게까지 일하는 아이들은 그 말에 너무 상처를 받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보살펴주지 못해서 교회 왔는데 교회는 그들을 품어주지 못했습니다. 
가정교육 잘 시켜 주는 부모들 있었으면 왜 그들이 말썽을 부렸겠습니까?

저는 목사가 되면서 꼭 세워보고 싶었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교회’
저는 사실 교회에 대해 상처도 많고 실망도 많이 했던 사람입니다.
가장 힘든 것은 교회가 사람들을 품어주지 못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친구들, 후배들,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연약한 것을 아셨습니다. 
세상이 힘들고 악한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대신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를 향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이겠습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 그들을 품어주고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성도들이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더라도 
그들을 더 큰 긍휼과 사랑과 헌신으로 품어줄 수만 있다면 
주일 우리의 모임을 통해 이런 사랑이 서로에게 전해지게 된다면 
우리 교회는 주일이 기다려지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III. 주일, 삶의 온전함과 행복이 회복되어지는 교회 (3:1-6)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운데에 일어사라.”
그리고 사람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들 마음의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의논하였습니다.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건물이 무너져 사람이 깔리게 되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건져주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실 때 분노했을까요?
그것은 당장 죽는 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고쳐주지 않고 내일 고쳐주어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내일해도 되는 일을 왜 오늘 고쳐주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행동을 통해 안식일에 우리가 행해야 할 중요한 또 한 가지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안식일에 우리는 노동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삶의 온전함과 행복이 회복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손 마른 병이 당장 죽는 병이 아니었지만 그 손을 고쳐주심으로 
예수님은 그 삶의 온전함과 행복이 회복되게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과 주일 드려지는 예배를 특별히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주일 6일 동안 이 땅에서 살며 심신이 지쳐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시며 우리 삶의 온전함과 행복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별 것이 아닌 문제라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아픔과 고통과 상한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고쳐주십니다. 

우리 삶의 온전함과 행복을 회복시켜주는 주일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아무리 세상이 고통을 주어도 
주일 예배와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맛보면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주일 예배와 교제를 통해 우리의 삶이 회복되고 행복해지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날 때
우리 교회는 주일이 기다려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2009 내일 희망 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초청하기 전에 먼저 우리 교회가 ‘주일이 기다려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일 교회에 와서 함께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고 기쁨을 누립시다. 
서로에게 긍휼을 베풀어줍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 삶의 온전함과 행복을 회복합시다. 

제가 새 가족들에게 항상 인용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찾아오는 이웃들에게 
인생의 방황과 신앙의 방황을 끝나게 해주는 
좋은 교회 천국 같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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