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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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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9) 
 
  
❚하나님 평화상

알프레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큰 갑부가 되었지만 말년에 자기가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자신이 번 돈을 인류 복지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상금으로 주라며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 기부했고 이것이 바로 노벨상이 되었습니다. 노벨상은 1901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해 올해까지 약 830명의 수상자가 나왔고 그 가운데는 우리가 잘 아는 과학자 퀴리 부인을 비롯해 위대한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노벨상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최고권위를 가진 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노벨상에도 어두운 구석이 있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백인우월주의의 시각에 따라 그 수상자가 거의 구미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무저항운동으로 인류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한 인도의 간디는 무려 다섯 번이나 노벨 평화상 후보가 되었지만 끝내 이 상을 타지 못했습니다. 

노벨 문학상이나 노벨 의학상보다 노벨 평화상은 훨씬 기준이 모호해서 올해 누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고 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해는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과연 이 사람이 노벨 평화상을 받을만한 사람인가?” 하고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올해 노벨 평화상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 합니다. 최초의 미국 흑인 대통령이 된 오바마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과연 노벨 평화상 감인가, 도대체 인류 평화를 위해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는 말인가 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미국의 어느 신문은 이 결정이 “미래의 일에 대해 주는 첫 번째 상”이라며 노골적으로 비꼬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상이요 권위 있는 상이지만 사람이 주는 것이기에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반면에 노벨 평화상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 평화상’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만든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평화상은 노벨 평화상과 달리 여러 사람이 심사위원이 되어 주는 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심사위원이 되어 결정하고 주시는 상입니다. 권위는 노벨 평화상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큽니다. 무엇보다 노벨 평화상과 달리 이 ‘하나님 평화상’은 어떤 인간적인 요소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평화상입니다. 누구도 어떤 사심도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너는 ‘하나님 평화상’ 감이다 하고 판단되면 주시는 상입니다. 이 ‘하나님 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9절을 볼까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누가 이 ‘하나님 평화상’을 탈 자격이 있습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은 무엇입니까? 노벨 평화상 수상자에게는 스웨덴 돈으로 1000만 크로네, 약 16억 8천만 원이 상금으로 주어집니다만 이 ‘하나님 평화상’ 수상자에게는 한 푼도 상금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상이 주어집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상”입니다. 과연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화평하게 하는 자

성경에서는 이 화평을 아주 강조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화평, 평화, 평안이라는 말 모두가 같은 뜻입니다. 이 말은 성경 전체에 고루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약 400회 가량 등장하면서 화평과 평화가 우리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자신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이나 다툼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말 평화를 사랑하는 분이라서 진정한 평화가 없는 세상에 참된 평화를 심어주기 원하시는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참된 평화를 심어주기 위해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장 14절에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천사들이 이렇게 찬송한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리고 이렇게 평화를 위해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참된 평화와 화평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본디 죄인을 가장 잔인하게 죽이던 사형 틀인 십자가가 예수님 때문에 평화의 도구로 변화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보면 이 화평의 정신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세로로 뻗은 나무는 수직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또 이 가로로 뻗은 나무는 수평적인 관계, 즉 인간과 인간, 나와 너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그 누구보다 하나님이, 그리고 그 외아들이신 예수님이 화평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과 그 외아들만 화평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이 화평을 위해 기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화평하게 하는 자”는 헬라어로 ‘에이레노포이오스’인데 성경에 단 한 번만 나오는 표현입니다. ‘에이레네’는 평화를 뜻하고, ‘포이오스’는 ‘만드는 사람’ ‘가져오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에이레네포이오스’는 그대로 번역하면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영어로 번역하면 피스메이커(peacemaker)입니다. 오히려 영어가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이 화평하게 하는 사람, peacemaker를 아주 좋아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peacemaker야말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앞서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고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기를 원하십니다. peacemaker,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평화의 하나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요, 평강의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순종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화평하게 하는 사람, peacemaker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잘 생겼든, 못 생겼든 상관없이 자녀가 자기를 닮았다고 하면 좋아합니다. “얘는 누구 닮았어? 아빠 엄마 아무도 안 닮았네” 하면 부모들은 상당히 스트레스 받고 상처 받습니다. 반면 “얘는 아빠 꼭 닮았네, 얘는 엄마 꼭 닮았네” 하면 아빠 엄마가 상당히 좋아합니다. 심지어 손자 손녀가 할아버지 닮았네, 할머니 닮았네 하면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참 좋아합니다. 

그것은 자녀가 부모를 닮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단편소설에 보면 아들이 자기 안 닮았다고,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하니까 심지어 발가락이 닮았다고 우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만큼 자녀는 부모를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도 반드시 아버지인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아버지를 꼭 빼닮아서 세상의 평강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인 나를 닮으려면 나처럼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팔복설교 일곱 번째로 주님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받는 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닮기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가 없는 이 세상, 가정과 교회 안에서, 이웃과 주변 사람들 속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예수님이 피값 치러 사신 평화를 단순히 누리는 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가 나서서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peace-maker가 되어야만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피스메이커(Peacemaker)의 사명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 피스메이커,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첫째, 나 자신이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그 누구보다 나부터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믿음이 중요하고 바른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고 평화롭지 않고서 남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 자꾸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한가? 왜 자꾸 인간관계가 꼬이고 자꾸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생기는가? 무엇보다 먼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인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의외로 많은 인간관계의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있지 못해서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과 전쟁 중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하나님과 등 돌리고 모른 척 하며 사는 사람도 찾아가십시오.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다가 지금은 멀어진 사람도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그가 하나님과 화평하도록, 친하게 잘 지내도록 도우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은 나와 형제자매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덩달아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전파입니다.

셋째, 나 자신이 다른 사람과 화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다른 사람과 불편한 상태로 교회에 와서 예배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그렇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화평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도, 예배할 수도 없습니다. 왜요? 그 분노와 상처가, 아픔이 내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부부 싸움이나 집안에 다툼이 있은 후 교회 와서 앉아 있으면 몸은 앉아 있지만 마음은 불편해서 제대로 예배도 못 드린 경험이 있을지 모릅니다. 타인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통로가 됩니다. 인간관계에 따라 이 통로가 환하게 열릴 수도 꽉 막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과의 화평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화가가 되기 원하는 소년 몇 명이 당대 최고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방문했습니다. 그 때 다빈치는 아주 조용한 가운데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화판 더미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예민한 그의 작업이 방해를 받아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는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에게 붓을 집어던지며 심하게 꾸짖었고 소년은 울면서 화실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다시 붓을 들고 예수님의 얼굴을 완성시켜 보려고 애썼지만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화를 내고 나자 그의 뛰어난 창조성과 영감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울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미안하구나. 나는 너보다 더 잘못했구나. 너는 그저 화판에 걸려 넘어진 것뿐인데 나는 공연히 화를 내어 나의 생명 안에 흘러드는 하나님의 영감을 막았구나. 나를 용서해주겠니?” 그런 후에야 그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화평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사람들끼리 화평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나 혼자 다른 사람과 잘 지낸다고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집안에서 나는 부모 형제와 잘 지내는데 부모끼리 혹은 형제끼리 다투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나도 괴롭습니다. 그래서 나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끼리도 잘 지내도록, 화평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내가 가는 곳마다, 내가 속하는 곳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속하는 곳마다 자꾸 나 때문에 복잡해지고 다툼이 일어나고 갈등이 생기고 상처가 생긴다면 내가 아무리 교회를 잘 다니고 제법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내가 가는 곳마다, 내가 속하는 곳마다 나를 통해 화평과 화해와 평화가 일어나면 나는 진정한 peacemaker요, 화평하게 하는 자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안이숙 여사의 글 가운데 “그럴 수도 있잖아요”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을 소개하면서 오늘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한 사람의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우리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일에 대해 썼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화평할 수 있는지 좋은 깨달음을 줍니다. 잘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못 생기고 모양 없다고 흉보지 마세요.
그를 지으신 분이 그렇게 만드신 것일 테니까.
그럴 수도 있잖아요.
화 잘 낸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일 때문에 피곤하고
신경이 늘어지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늘상 늦는다고 수군거리지 마세요.
일이 많아 바쁘고
전화 통화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설사 한가했더라도 시계를 보지 않다가
그럴 수도 있잖아요.

욕심이 많다고 욕하지 마세요.
매번 다른 사람 생각을
미처 못 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무식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멸시하지 마세요.
배울 수 있는 길이 제한되어 못 배웠으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인색하고 사랑이 없다고 미워하지 마세요.
경제에 시달릴 때를 염려하여 절제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노래를 못 하고 음성이 나쁘다고 흉보지 마세요.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게으르고 더럽다고 멸시하지 마세요.
신경상태가 늘어져서
감각이 예민하지 못하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눈치 없고 염치없다고 시비하지 마세요.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테니까
그럴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세요!
우리 이해하기로 해요.
내가 나를 싸매고 가리고 변호하듯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밥 먹듯 하기로 해요.

그러면 기쁨이 생겨요.
마음에 늘 평안이 있어요.
세상 사는 것이 재미있어져요.
오나가나 즐겁고 감사하기만 해요.
왜! 왜! 왜냐고 따지지 마세요.

불행해져요.
미움이 생겨요.
친구가 없어요.

세상만사는 모두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요.
세상만사는 모두 그럴 수도 있기 마련이지요.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하는 습관은
행복을 만드는 신호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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