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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막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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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막 9:1~8)


언젠가 한번은 랍비 샬롭 베르가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무니아는 놀라 물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그들에게서 무엇을 발견하신 것입니까?”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장점을 지녔단다.”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서 아무 특별한 점도 찾을 수 없던데요”라고 무니아가 말했습니다.
잠시 후 랍비는 무니아에게로 몸을 돌려 말했습니다.

“너는 다이아몬드를 파는 상인이지, 내가 너의 다이아몬드 몇 개를 한 번 봐도 되겠니?” 
그러자 무니아는 곧 주머니에서 작은 쌈지를 꺼내 다이아몬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랍비 앞에 쏟아 부었습니다.
“이것은 특이한 아름다움을 지닌 보석이지요!”라고 말하면서 무니아는 다이아몬드를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아무 감명도 받지 못했다는 듯이 잠자코 있다가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 특별한 점도 찾을 수 없는걸”
“오, 선생님, 그건 오직 전문가만이 이 돌의 아름다움을 확실히 평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랍비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무니아,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란다. 오직 전문가만이 순수한 사람의 아름다운 영혼을 평가할 수 있는 법이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같은 것을 놓고서도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이 있고 추하고 더러운 것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것은 볼 줄 아는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흔히 변화산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셨던 산 위에서 벌어진 일을 살펴봄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적 할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을 팔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면 어떻겠나 하는 의논들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눈이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결국 정말로 할머니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고 난 다음 지역이 재개발이 되어서 결국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결국에는 해야 될 일임에도 불구하고 또 해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미적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나가 나 죽은 다음에나 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 죽은 다음에...” 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비슷한 말들을 많이 합니다. 내 몸좀 추스르고 난 다음에, 내 형편이 좀 피고 난 다음에, 조금 여유가 생기거든, 하지만 그 때가 과연 오기는 하는 건가요? 결국 우리네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마음은 원리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나도 하고는 싶지만 내 몸이 너무 아파서, 내 형편이 너무 안 좋아서,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배운 것이 없어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저 먹고 살기에 바빠서 등등 우리가 주의 일에 힘쓰지 못하고 열심 내어 예배하지 못하는 이유들을 댑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오히려 지금 내 몸이 아프기에 죽기 전에 더 몸부림을 치고 더 충성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비록 아프고 힘들기는 하지만 그나마 그래도 아직은 살아있기에 더 움직여야 하는 겁니다. 더 충성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그래 너 그렇게 살다가 끝내라 그러겠습니까? 어차피 죽으면 다 태워버리고 썩어버릴 이 한 몸뚱이 아껴서 무엇합니까? 시간도 그렇습니다. 다른 일을 위해서는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할 때가 있지를 않습니까? 그렇다면 주를 위해서는 시간을 좀 더 낼 수는 없는 걸까요? 흔히 나중에 하겠다고 하지만 그 나중이 과연 나의 몫이 될 수 있기는 하는 건가요? 

하지만 우리가 깨닫는 것은 나중에는 없다는 겁니다. 나중에는 없어요. 지금 우리가 아직 살아있을 때 충성도 하고 은혜도 받고 복도 누려야 하는 겁니다. 아직은 내게 갖춰진 것이 없기에 더욱 하려고 하는 겁니다. 아직 논밭에 아무 것도 없을 때 밭도 갈고 논도 갈고 거기에 씨앗도 뿌리고 모도 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죽고 난 다음에나 들어가서 경험하게 되는 그런 나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고 난 다음에 들어간다고 쳐도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은 죽기 전에 볼 자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아직 살아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체험해야 되고 그 권능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 힘과 내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을 때 우리는 지혜로 가득하게 되고 사랑으로 열매를 맺으며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표적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 앞에 가서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이런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감히 누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아무리 아프다 하더라도 그 아픔이 우리의 길을 막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프기에 더 감사하며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정막 죽을힘을 다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주의 일을 하다보면 그 일을 하는 동안은 아픔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거짓말처럼 아픔은 내게서 사라져 버립니다. 한 발만 뛰어도 죽을 것 같으면 그러면 두 발을 뛰는 겁니다. 그러면서 외치는 겁니다. 에스더처럼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이왕 죽을 것이라면 주를 위해서 일하다가 죽는다면 이보다 더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감사함으로 죽겠습니다. 하고 또 한 발 뛰다 보면 그런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로잡아 가시게 됩니다. 당연히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표적이 나를 통해서 나타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예레미야서 33장 2절로 3절에서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일을 행하겠다 내가 일을 성취하겠다. 그러니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응답할 것이다.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일 것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약속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로 인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던 크고 은밀한 일을 우리가 보고 누리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는 귀한 역사가 우리 가운데 넘쳐 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해야 될 말, 해야 될 고백은 무엇입니까? 
물 한 병이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전부인 가난하고 고독한 늙은 어부를 상상할 수 있나요? 그 늙은 어부는 바로 이국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속에 등장하는 산티아고입니다. 그는 태양 야자수로 지은 오두막에서 혼자 살아갑니다. 이러한 가난 속에서도 자연에 대한 늙은 어부의 사랑은 감격적입니다. 그는 잡은 물고기를 바라보며 이렇게 독백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사람들이란 과연 이 순결한 물고기를 잡아먹어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존재입니까?”
또한 바다 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에 휘말릴 때 그는 또 이렇게 독백합니다. 
“오! 주님, 이렇게 불행할 때엔 행운을 파는 곳이 있으면 좀 샀으면 좋겠습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어떤 존재인가요?

참으로 우리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던 바리새인들은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오직 영의 눈이 열린 사람만이 볼 수 있기에 그들은 보아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맹인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며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셨던 주님은 다시금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가셔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오직 성령 안에서만 할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실 때만 가능한 대답입니다. 

육의 눈으로는 오직 세상의 풍요로움만 보일 뿐이지만 성령 안에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그 예수님이 사실은 얼마나 큰 은혜와 진리의 주님이신지를 깨달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께서 이제 다시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으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보고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드시고 계십니다. 한 높은 산에 이들만을 데리고 올라가셨는데 그곳에서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그들 눈앞에 펼쳐지는데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베드로가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것은 과연 누구에게 좋다는 말입니까? 

자기들에게 좋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그 자리에 함께 계신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에게 좋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몹시 무서워했다는 것은 무슨 말이고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아니 예수님이 갑자기 변형되어 달라 보이기 때문에 무섭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 예수와 함께 말씀하는 것이 무섭다는 것입니까? 

결국 뭔 소린지도 모르고 그저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하고 떠드는데 과연 그게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을 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모독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고 합니다. 또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그 되고 안 되고 하는 기준이 과연 누가 만든 기준입니까? 그저 내 생각대로 내 느낌대로 되고 안 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따라 되고 안 된다는 것입니까? 정말로 주를 위하고 교회를 위한다면 그렇게 해야 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들을 종종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말을 누가 하는 것입니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성령을 빙자해서 내가 하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베드로의 한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더니 주님과 함께 말씀을 하는데 그 말씀하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단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하는 것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주를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만 과연 누구를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정말 주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를 위해서 하는 말입니까?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한결같이 하는 말은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주를 위한 일이며 교회를 위한 일인지 깊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기 베드로가 한 말도 그렇습니다. 왜 하필 초막이어야 하고 그것도 세 개여야 합니까? 그럼 그 자리에 있는 자기들 세 사람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생각이 모자하도 한참 모자랍니다. 

그러면서도 나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죽을힘을 다해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데 정말 그런가요? 겨우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면서 그게 최선이냔 말입니다. 정말 회사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고 내 하는 사업이 망할 각오를 하고 그렇게 주님 앞에 예배하고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 그런 마음조차 먹어본 적도 없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회사에서 쫓겨난다면 하나님이 더 좋은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는 그런 믿음은 안 생기던가요? “주를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으니 주님 내게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이제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내가 충성하겠습니다. 내가 헌신하겠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엎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 본 적이 있던가요? 내가 그렇게 하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습니다. 내 건강도 그렇고 내가 처해 있는 상황도 너무나 안 좋습니다. 그럴 때 내가 주의 일 하다가 죽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죽으면 죽겠습니다. 

그러면 당장 주님 앞에 서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니 어차피 세상에 왔다가 죽을 인생 그렇게 주님의 일 하다가 죽을 수 있다면 예배하다가 찬양하다가 감사하다가 충성하다가 죽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나아간다면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그 믿음처럼 우리를 그 품에 안아 주시거나 아니면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나 자유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걸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하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때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던 두 사람이 왜 하필 모세와 엘리야였던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성경에 나타난 바 호렙산에 올랐던 사람들입니다. 아니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불꽃 사이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호렙산 동굴 밖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와 만나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때 그들의 상태가 어땠습니까? 먼저 모세는 광야에서 목자로 40년을 지내면서 삭을 대로 삭아 있을 때 내 인생은 이제 다 끝났다 싶었던 바로 그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브엘세바에서 네게브 사막 속으로 하룻길을 더 가다가 로뎀 나무 아래서 나 죽여주소 하던 엘리야에게 떡과 마실 것을 주어서 먹고 마시게 하고는 그 힘을 의지해서 40일 동안 광야를 걸어 호렙산까지 이르게 하시고는 그 지쳐있던 나 죽여주십시오 하던 엘리야를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만나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한결같이 절망의 광야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한 때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큰일을 하겠다고 펄펄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완전히 절망 가운데 좌절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시들어버린 그들의 꿈을 다시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다시 힘을 얻어 그들의 꿈대로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되게 만드십니다. 이젠 그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끔 하십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셨다는 것은 우리 역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때 누가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살아가게 되면 요단강도 열리는 것이요 여리고도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정신없이 벌벌 떨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하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마침 구름이 와서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결국 주의 능력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능력이 그러므로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으면 더 이상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심을 알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고 한들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마귀가 유혹을 해도 그들 앞을 목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탁 가로막고 계시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무엇을 염려합니까? 잘못될까봐 두렵습니까? 그럼 목자 되신 하나님이 주무시고 계시기라도 한 것입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돌보심 아래 오늘을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날마다의 삶을 승리로 장식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음성을 들려주시든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와 엘리야 그들은 자기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세워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승리할 수 있던 비결은 따라서 자기들의 모든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동시에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분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우리 가운데 나타내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동행하시게 되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갈 때 우리가 품지 못할 것이 없고 우리가 감당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언제라도 “주님 나는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능력으로 나를 사로잡으시니 내가 감당하겠나이다” 고백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는 귀한 삶을 우리 모두가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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