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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마리아인의 감사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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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인의 감사 (눅 17:11~19)


오늘은, 우리 교회가 매년 시월 셋째주일에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시편 50편 시인 아삽의 증언에 의하면 (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2)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믿음󰡕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23). 감사가 있는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놀라운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감사를 보면, 감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명령입니다. 구약, 신명기 16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 년에 세 번,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 명령하셨습니다.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유월절 다음날부터, 7일 동안 누룩 없는 빵 구워먹으며 지키는 절기)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신 16, 16-17).

신약,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 16-18). 이처럼 신구약말씀을 보면, 감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명령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지탱해주는 요추와도 같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던 중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은 곧장 지름길로 가시지 않고,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다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행보에 대한 누가의 세심한 지리적인 관찰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갈릴리 지방은, 아시는 대로 갈릴리바다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스라엘의 북부 지방입니다. 예루살렘은 남쪽에 위치한 예루살렘 중심도시입니다. 그 사이에 사마리아 지방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적지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면서 지름길로 곧장 가시지 않고 ‘사마리아’와 ‘갈릴리’ 두 지방 사이의 경계선을 따라 여행하는 방법을 취하셨다 합니다. 때로는 예루살렘에 더 가까운 사마리아 촌까지 내려오기도 하시고, 때로는 예루살렘에서 더 먼 북쪽 갈릴리 촌까지 올라가기도 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겁니다(남북으로). 

여행 중,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우연이 아니지요.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 癩病患者 열 명이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인 예수님의 행보였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에게는, 天運이 찾아온 거지요. 소문만 들었던 그 예수님,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얼마나 만나고 싶었을까요? 자신이나 家族이 병들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면, 제일 먼저 누굴 생각할까요? 名醫를 생각납니다. 어느 병원 어느 선생님이 계시다는 데…. 

요즘 같이, 병원도 많고, 유명한 선생님들이 많아도, 진료 받는 일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6개월은 예사고, 1년, 2년 기다리기도 합니다. 이 나병환자들이라고 해서 예수님 소문 못 들었겠습니까? 자기들과 같은 나병도 고쳐주시고, 중풍병자도 고쳐주시고, 귀신도 쫓아내어 주신 예수님 소문, 당연히 들었습니다.

소문을 들었다고 해서, 쉽게 예수님 만날 수 있는 형편 못됩니다. 거의 불가능한 가능성입니다. 나병환자가 처한 상황이 그렇습니다. 나병은 난치성 전염병이기 때문에, 걸리면 격리생활 해야 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습니다. 외모도 흉측합니다. 눈썹이 빠집니다. 코도 없어집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피부에는 반점이 생기고, 환부가 생겨도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악화됩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나병에 걸리면 격리되어 살았습니다. 

사회적인 장벽도 만만찮습니다. 구걸하기 위해서 외출이라도 하자면 (1)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했습니다.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2) 윗입술을 가리었습니다(극도의 自己를 卑下시킨다는 뜻). (3) 또 소리내어 ‘부정합니다 부정합니다’ 외쳐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야 했습니다. 

이런 나병환자들이, 예수님 소문 들었다고 해서, 어찌 스스로 예수님 찾아다니면서, 예수님 만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남북 이산가족의 장벽이 얼마나 큽니까).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예수님 주도적인 예수님의 ‘찾아오심’에 의한 것입니다. 일생일대에 단 한 번 찾아온, 놓칠 수 없는 기회입니다. 멀리 서서, 소리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합니다.

본문의 전후를 보아서 알 수 있지만, 예수님을 만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지금 예수님을 󰡔예수 선생님이여󰡕하고 불렀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아, 바로 저 예수 선생이라는 분, 놀라운 치유의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네. 너도 들은 적 있지?” 하면서 말입니다. 심히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몰랐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이심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닙니까?(天運인데) 

예수님을 그저 병고쳐주시는 능력 많은 선생님으로 알다보니, 그들의 유일한 열망은, 癩病에서 낫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의 큰 소리로 외치는 의미는, ‘여기까지뿐’이었습니다. 바로 이점이, 본문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그런 그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 좀 보십시오. 평소 같으면, 그들 가까이 다가가셔서 인자한 음성으로, 부드러운 손으로, 환부를 만져 주시며 위로하시며, 고쳐주시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러나 가까이 가지도 않으시고, 그저 멀러 서 계신 채로, 명령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병 낫기 위한 최소한의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필요했던 겁니다. 비록, 아직은 여전히 나병 걸린 몸 그대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에게 깨끗해질 자기 몸을 기대하면서 보여주기 위해 가려면 󰡔최소한의 믿음󰡕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걸 요구하신 겁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갈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여기까지는 너무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여기서 갑작스럽게 급반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촌에 들어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보십시오. 15절 말씀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합니다. 여기서부터 또 다른 운명이 갈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 예수님의 관심은, 나병에서 놓임을 받은 열 명 모두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에게”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는,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독사존, doxa,zwn) (예수님께 다시) 돌아온” 사람입니다(시편 기자였다면, 할렐루야, 할렐루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려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개같이 취급하는 사람, 이방인 취급). 

여기, 나병을 고침 받은 열 사람 중, 아홉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이야깁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의 관심, 인생의 목적은,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 목적 없이 살아갑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 그들에게, 의도적으로 목적으로 가지고 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찾아오심은, 天運입니다.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그걸, 어찌 놓칩니까? 문제는, 열 명 중 아홉 명의 나병환자는, 그저 육신의 病 낫고자 하는 熱望, 그것뿐이었습니다.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보다 더 높은, 열망, 갈망, 목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병 낫고자 하는 열망이, 나쁘다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간절한 열망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의 소원대로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예수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삶의 관심, 목적가지고는, 그 열망이 아무리 뜨겁다 해도, 소중하다 해도, 간절하다 해도, 그것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합니다. 구원받는 믿음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열의 아홉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그 믿음이 다 똑같은 믿음 아닙니다. 어떤 믿음은 병 낫는 믿음, 있습니다. 자식 잘 되게 하는 믿음, 있습니다. 돈 잘 버는 믿음, 있습니다. 권력 얻는 믿음, 있습니다. 명예 얻는 믿음,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 없는 믿음은, 구원과 상관없다는 겁니다. 

예수님, 요구하시는 믿음은 마침표를 찍는 믿음입니다. 그 마침표는, 병 낫는 데서 중단되는 믿음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병이 나으면, 자기 병을 고쳐주신 예수 선생님이, 그저 선생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 메시아시라는 것, 구원자시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와서, 엎드려 감사하는 데까지 이르는 믿음되어야 합니다. 그 믿음의 수준까지 기대하십니다(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 번제로 바치는 것 요구하신 하나님). 

우리가 예수 믿고, 세례받기 위해서 공부하는 가장 기초적인 공부, 요리문답 제1문이 무엇입니까? 세례 받으신 분, 세례 받으실 분들은 다 아시지요? 제1문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입니다. 그 答이 무엇이지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아멘이십니까? 아멘이 되시는 분은 그 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말로 하는 답이 아닙니다. 입술로 되는 고백이 아닙니다. 삶의 답이어야 하고, 삶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신 6, 5)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 34-40).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온 율법서와 선지서의 강령이라 하셨습니다. 강령이라는 말의 속뜻은, ‘일의 벼리나 으뜸이 되는 줄거리’라는 말입니다. 江에서, 그물로 고기 잡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벼리란, 고기 잡는 그물의 위쪽 코를 꿰어, 오므렸다 폈다 하는 줄을 말합니다. 그물을 오므리고 펼 때, 벼리만 잡고 풀었다 당겼다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나 한 사람 병 낫는 것 아닙니다. 나 한 사람, 병 나았다고 해서 그게 무슨 큰 대수입니까? 병 나은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 되는 것까지 기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感謝하는 믿음의 자리까지 이르기를 기대하십니다. 그 감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나타내 보여주게 하는 능력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 19). 

제가 ’80年代 末에 부산 소정교회에서 부목사로 목회할 때입니다. 교회가 온천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온천장 시장 길에, 유명한 손칼국수집들, 갈비집들이 즐비했습니다. 칼국수를 좋아했기 때문에, 점심 한 끼 정도는 손칼국수를 많이 먹었습니다. 그 때, 저는 제가 다니던 손칼국수집 아저씨를 대단히 존경했습니다. 그 뜨거운 여름에, 펄펄 끓는 큰 솥에, 칼국수를 손으로 밀고, 썰고, 삶아서, 한 그릇 한 그릇 끓여내는 그 모습이 너무 멋이 있으셨습니다. 아저씨 인상은, 머리카락이 거의 없는 대머리십니다. 배는 볼록하게 나와서, 균형 잡힌 몸매는 아니지만, 저는 그 아저씨를 너무너무 존경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80년대 말 그 때 당시, 나라의 온 뉴스는 부정부패였습니다. “돈 아니면 되는 것도 없고, 돈이면 안 되는 것도 없다”던 시절입니다(요즘도 그런 일 많다고 합니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사람에 비하면, 칼국수 한 그릇 1200원 하는 데, 떼돈 버는 것도 아니지만, 성실하게 일하시는 아저씨, 존경스럽지 않습니까? 부산을 떠나, 서울에 와서 목회하면서도 그 아저씨의 칼국수가 먹고 싶어서, 휴가차 대구에 왔다가, 일부러 부산까지 내려가서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다시 가서 보니, 허름하던 옛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새 가게로 단장했더라고요. 여전히, 그 아저씨 그 모습 그대로, 국수를 끓이고 계셨습니다. 인사를 하고, 돈 많이 버셨네요. 잘 계셨습니까? ….

그런데, 그날 칼국수를 먹고 있던 제 마음에, 한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성실하게 땀 흘려서 돈은 꽤 버신 것 같은데, 아저씨는 돈 벌어서 어디에 쓰시지?…” 몇 해 전에는 그저 열심히 일하시는 성실한 아저씨의 모습만 보는 것만으로도 존경했는데, 그 존경심이 제 안에 ‘질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지금 아마 그 아저씨, 이젠 세상을 떠나셨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자기 병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의 감사를 받으신 예수님은, 세 가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1)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2)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당연히 여기, 같이 있어야 하는데…) (3) 이 이방인(개같이 취급받는 사마리아 사람)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셨습니다. 이 질문이, 우리에게도 질문으로만 남는다면, 우리는 복 된 사람 못 됩니다. 우리도 열 명 중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 될 때, 복 있는 자가 됩니다. 

얼마 전, 대학생 따님을 두신 어느 집사님과 대화를 하던 중, 따님에게 고마워서, 흐믓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얘기내용은 간단합니다. 집사님 따님이, 자기 생일날에 아빠에게 “아빠 기도 때문에 제가 이만큼 잘 자랐어요”하는 문자를 보내준 것이, 너무 좋으셨다는 겁니다. 한 마디 더 하셨습니다. 아직도 그 문자는 지우지 않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집사님께 여쭤보았습니다. 따님 생일이 언제냐고? 양력 1월 15일이랍니다. 50원짜리 문자 한 통화, 얼마나 귀하면 10개월이 넘도록 안 지우고 계실까?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아니시겠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추수감사주일 맞이하여 하나님 의뢰하며 살면서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에 아멘하여 응답합니다. 아홉 사람 같이 되지 말게 하시고,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과 같은 믿음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영광, 감사, 찬송 돌리게 하시고,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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