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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를 따르려는 자의 자세 (마 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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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따르려는 자의 자세 (마 8:18~22)
   
  
마태복음 8장은 기적의 장입니다. 1-4은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 5-13은 중풍병에 걸린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사건, 14-17은 베드로의 장모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사건, 23-27은 풍랑을 잠재우신 사건, 28-33은 군대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이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8장은 온통 기적의 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의 길을 요구하시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병자를 고친 것이나, 풍랑을 잠재운 것이나, 귀신을 내어 쫓은 것과 같이 기적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이 사건이 기적의 기사들로 꽉 차 있는 이 마태복음 8장에 기록되었겠습니까? 그것은 제자가 되는 일, 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 그 자체가 위대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각색 병든 자를 다 고쳐 주셨을 때에, 그 놀라운 소식을 듣고 많은 군중들이 몰려와 주님을 에워싸게 되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병 고치는 마당에는 이런 군중들이 몰려들기 마련인가 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그들을 피하셔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단 한 번도 인간에 대하여 싫증을 느끼거나 귀찮게 생각한 적이 없으셨던 주님께서, 왜 무리를 피하여 떠나려 하셨을까요? 그것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온 목적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허기진 배를 채우는 빵을 얻는 것이 예수님께 나온 목적이었고,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로마로부터 정치적인 해방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저들의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목적과 달랐기 때문에 저들을 떠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처음에는 복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인간적인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모여드는 무리 때문에 탈선하는 목사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집회는 애초부터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신유’를 내세우는 일도 있는데, 이것은 주님의 방법과는 정반대가 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 병 고치시는 능력을 선전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혹은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그들을 괴롭히는 병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고, 그로 인하여 무리들이 모여들어 에워 쌀 때는 오히려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하여 신유, 혹은 축복 등을 크게 광고하고는, 실상은 복음도 없고, 경솔한 안수나 천박한 만담이나 남발하는 집회들이, 주님의 복음전파 자세와는 얼마나 다른가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계가 혼탁하고 세상 끝 날이 가까워 올수록 신유, 은사, 축복 같은 말들을 화려하게 선전하는 자리는 피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예수께서 많은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그 곳을 떠나려고 하실 때, 한 서기관이 나서며 “선생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은 온통 율법을 지키는 일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든지, 문둥병자와 같은 환자의 몸에 손을 댄다든지 하는 식으로 율법의 규칙들을 자주 어기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유대교에 대해 아주 위험스러운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적대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은 그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산상 수훈의 말씀이나, 그분이 행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향해서 사용한 호칭은 여전히 ‘선생님’이었습니다. 서기관이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으로 부른 것은, 그가 아직 예수님을 훌륭한 랍비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좇겠다고 나선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훌륭한 스승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합니까? 주님께서 자신을 주관하시도록 내 삶의 왕좌를 그분께 내어 드렸다면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 되시지만, 그분과의 관계가 단지 일주일에 목사를 통하여 설교 몇 편 듣는 일에 그치고 있다면, 예수님은 아직 나의 좋은 선생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상한 각오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는 서기관을 향하여, 칭찬도 하지 아니하시고, 거절하지도 아니하시고, 다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생이라고 부르는 서기관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인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에 대하여 ‘인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신 것은, 자신은 본래 하나님이시나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서기관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왜 주님께서는 자신을 따르겠노라 작정하고 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찬물을 끼얹을까요? 그를 격려하고 고맙다고 말해도 부족할 터인데, 왜 앞길을 막듯이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무엇보다 주님의 全知性, 즉 사람의 마음 속 생각과 숨은 동기까지 단번에 아시는 주님의 전지성을 염두에 두고, 그 말씀하신 바를 탐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서기관에게 그 같은 말씀을 하신 까닭은  

1)세속적이고 탐욕적인 동기에서 주님을 따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들과 이적들, 그리고 열광들을 보면서, 이 모든 일의 중심인물과 밀접하게 교제하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목격했고, 그만한 권능이면 굉장한 사례금도 받아 곧 재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하게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많은 군중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서기관도 예수님을 빵과 부와 명예와 권력과 이 세상 행복을 가져다 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의 이 같은 오해를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은 이 세상의 부귀영달과는 관계가 없음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산중의 동물과 공중의 새도 그들의 안정된 거처가 있고, 모든 인간도 상하의 차이는 있으나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이 같은 가난함에 대하여 Bengel은 “오 거룩한 가난이여!” 라고 했고, Plummer는 “예수의 생애는 빌린 마구간에서 시작하시어 빌린 무덤에서 마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에게, 네가 나를 따라 올 때, 세상적인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멀 터인데 그래도 나를 따르겠는가? 하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2)주님을 따르는 길의 고난은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여러 가지 매력적인 면만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일시적 감격에서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격은 일순간 불타다가 곧 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또 감정의 물결대로만 따르는 사람도 아닙니다. 감정의 물결은 급히 밀려왔다가 속히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감동을 받는 순간에는 “나는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서기관처럼 “나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변치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세례 문답시 즉흥적으로 대답은 잘합니다. 그러다가 사소한 어려움만 있어도 주님을 헌신짝 내버리듯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를 때 겪게 될 희생이나 대가는 전혀 생각지 않고, 만사형통만을 꿈꾸는 서기관의 허망한 망상을 깨트리시고 정직하게 현실을 직시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 가운데 또 다른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12 제자중 하나가 아닌 넓은 의미에서 예수께 신앙을 고백한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고 요청했습니다. 이 제자의 요구에 대하여 우리는 세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그가 주님을 떠날 구실로 부친의 장례 문제를 들고 나왔으리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서기관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자기의 기대와는 너무나 차이가 있어서 실망한 나머지, 주님을 떠나려고 부친의 장례 문제를 들고 나왔으리라는 것입니다. 

2)지금 그 제자의 부친은 살아 있지만, 언젠가 별세한 후에 그 때 가서 따르겠다는 것으로, 그 때까지 부친을 공양하겠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친을 장사지기내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지, 몇 십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제자가 되겠다는 결단을 지연하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특히 그는 먼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그에게는 부친을 봉양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것보다 우선시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글자 그대로 이 제자의 부친이 당장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장례를 먼저 치르고 따르겠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사를 지내고 돌아오겠다는 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당장 ‘갔다 오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아주 단호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우리는 여기서도 인간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전지성을 전제하고서, 이 말씀을 탐사해 보아야 합니다. 서기관이 열정적이고 즉흥적이었음에 비하여, 이 사람은 미온적이고 소극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는 일을 경시하고, 핑계만 있으면 피하려는 사람임을 주님께서는 간파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님의 말씀에서, 주님이 너무 가혹하고 몰인정하다든지, 윤리 도덕을 무시한 것이라든지, 부모의 장례를 금한 것이라는 오해를 하면 결코 아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핑계 아래, 부모에 대한 의무를 등한히 한 무리들을 엄중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다만 주께서 이 제자에게 말씀하신 참뜻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기회를 상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제자가 즉시 결단하여 따르지 아니하면, 영구히 따르지 못할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일을 후일로 미룹니다. 많은 직분자들이 후일에 충성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약 4:4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했고, 잠 27:1에 “너는 내일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2)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는 전도를 받을 때 이런 식으로 대답합니다. 아이들을 좀 키워 놓고서, 사업의 기반을 좀 다져 놓고서, 돈 좀 벌어 놓고서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일도 예수를 믿는 일보다 우선이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아니 됩니다. 

여기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전자의 죽은 자들이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의미하고, 후자의 죽은 자들이란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생명을 소유한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그가 아무리 젊고 아름답고 건강해도, 아무리 많은 부와 권력을 움켜쥐고 있어도, 그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땅 위에서 썩어져 가는 자와, 땅 속에서 썩어져 가는 차이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엇이 주님께 나와서 새 생명을 얻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까? 만일 뇌출혈로 쓰러진 남편이 있는데, 그러한 남편을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동창회나 계모임에 먼저 갈 부인이 있을까요? 사랑하는 자식이 교통사고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인데도, 장사하고 돈이나 헤아리고 앉아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일들이야 다음에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무엇이 최우선 순위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주님을 따르겠다는 두 사람의 태도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오늘날 주님을 따르겠다는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리라 믿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1. 서기관의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1)세속적이고 탐욕적인 동기에서 주님을 따르려 했고 2)고난과 대가는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이고 일시적인 감정에서 주님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서기관은 주님을 따를 때 오는 이득과 실리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이득과 실리에 정반대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네가 나를 따를 때 이렇게 커다란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세상적인 복만을 받고자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십자가의 과정은 제외한 채 그냥 쉽게 복을 받으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복 신앙이요, 주님은 이러한 신앙을 가진 자들을 서기관을 거절하신 것처럼 거절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 이러한 인간적인 욕망으로 교회를 다니고 주님을 좇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의 신앙을 다시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고난과 희생이 뒤따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상급이 뒤따른다는 것 또한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먼저 자기의 부친을 장사하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한 제자에게 주신 교훈이 무엇입니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사람이 볼 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것이, 참으로 살아 있는 것임을 믿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자기의 부친을 먼저 장사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경시하고, 핑계만 있으면 피하려고 하는 사람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제자에게 주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는 말씀으로 1)기회를 상실하지 말 것 2)이 땅 위에 무슨 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공산당의 3대 각오라는 것이 있는데, 곧 1)얼어 죽을 각오 2)굶어 죽을 각오 3)맞아 죽을 각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을 따르려는 성도 여러분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일찍이 주기철 목사님은 주님을 따르려는 그의 일사각오 정신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길 만은 걸어야 해/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아픈 다리 싸매 주고 저는 다리 고쳐주사/보지 못한 눈을 열어 영생 길을 보여주니 

칠전팔기 할지라도 제 십자가 바로 지고/골고다의 높은 고개 나도 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에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주님 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가오랴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고생이라 못 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 

 우리 모두 이러한 마음의 자세로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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